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의 영광 (계 01:9-20)

첨부 1


오늘 성경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황제숭배를 하는 로마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한 까닭으로 밧모라는 섬으로 유배당해 지내던중 어느날 그리스도의 계시 를 듣게 되고 위엄에 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되었다는 말슴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중에 가장 어린 제자였습니다.그러다보니 제일 나중 까지 살게 되고 또 가장 오래 살게된 제자였습니다. 밧모섬에 유배될 때가 예수께서 죽으시고 난뒤65년이 지난 AD.95년경으로서 로마의 도미티안 황 제시대 였습니다. 밧모라는 섬은 스포라테라고 불리는 군도에 속한 작은 섬 으로서 암석뿐인 불모의 땅으로 소아시아 앞바다6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당시에는 로마에서 에베소로 향하는 마지막 귀향지 였다고 합니다.

유배 당하는 것이 형벌중에 가장 중한 형벌은 아니였지만,시민권을 박탈 당하고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한정된 지역에서의 자유행동이 허락되었습니 다.이러한 형벌은 정치범의 경우이고 요한의 경우에는 오히려 즉시 처형을 당하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 였습니다.그는 예수님의 직제자가 되고 그리 스도인들의 지도자요,황제숭배의 반대자요, 황제를 거역하는 죄인중에 속했 습니다.이곳 유배지에서 그는 채석장에 끌려나가 심한 고생을 하게됩니다.

월리엄 람제이경의 연구에 따르면 [채찍으로 맞고 풀 수없는 착고에 체워 지고 옷이라고는 겨우 몸을 감싸는 정도였으며 음식은 보잘것없고 부족했으 며 깔개도 없이 땅바닥에 잠을 자고 컴컴한 감방에서 지내며 감시병의 채찍 을 맞으며 일했다]고 전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런 생활을 요한은 하고 있음 을 알게됩니다.

이런 어느날 요한은 성령에 감동이 되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게 되고, 몸을 돌이켜 보니 일곱촛대가 있고 ,그 가운데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흰양털 같은 머리에 눈은 불꽃같고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은 찬란한 광경을 보게됩니다.그 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된 요한이 그 영광에 놀라서 하얗게 죽은 자 같이 엎드려 졌더라는 사실입니다.그앞에 엎드려져서 죽은 자같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의 사자를 보면 놀라서 하얗게 질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믿 지않는 자들은 염라대왕 앞에서나 검은 옷을 길게 내려입은 지옥의 사자를 보게되면 새파랗게 질려서 입술도 떼지 못하고 부들부들 뜰것으로 생각합니 다.저승가는 길은 먹을 것도 마실것도 없을 뿐더러 쉬어갈 여인숙도 없는 그야말로 두렵고 괴로운 여정으로 상상합니다. 아무 말없이 앞서가고 있는 죽음의 사자를 따라서 침묵 가운제 공포의 길을 가게될것으로 생각합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이러한 생각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메리메가 쓴 [페데리코]라는 작품을 보면,페데리코라는 사 람이 그리스도를 대접한 까닭으로 자기의 소원을 이용해서 세번이나 인생을 살게됩니다. 그의 나이칠십에 병들어 누워있을 때에 죽음의 사자가 처음으 로 찾아왔는데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소원을 이용해서 다시 백 년을 더 살게됩니다. 젊은이의 건강과 노인의 지혜로 일백년을 더 살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더 나아진게 없고 자신의 욕정을 만족시키는 데 세월을 보냅니다.한생을 더 살면,더 살 살것 같고 더 나은 생을 살것 같은데 여전히 똑 같더라는 것입니다.죽음의 신이 찾아왔을 때 역시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고해성사를 할 신부가 오지 않았으니 기다려 달라고 죽음의 사 자에게 부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우리는 인생을 몇 수십번 윤회를 거듭 한다 할지라도 죽음의 사자를 맞이 할 때는 여전히 완전하지 못하고 역시 두려울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한번 주어진 삶을 잘 살아야 한다는 가르 침인줄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발앞에 얻 드려져 하얗게 죽은 자 같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영광이 실로 엄청나고 놀라운 광경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른 제자들과는 특별한 관계를 가진 것을 보게 됩니다.요한은 야고보와 함께 세베데라는 사람의 아들로서 가장 주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갈릴리 어부였던 그는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고 그후 예수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함께 참석했던 인물이였습니다. 예수의 변화산상에 변모사건 때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드리실 때도 함께 동행했습니다.열두 제자중에 가장어린 자로서 평소에도 예수의 품에 안겨서 먹고 마시고 햇던 자입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의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요한아 보아라 네 어머니이시다.어머니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면서 숨을 거두실 때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할 만큼 그리스도와 요한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한이건만 그 영광 앞에서는 엎드려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살아 생전에 그렇게 사랑받고 주의 품에 안기어 먹으며,만만하게 지내고 하였지 만 엄청난 위엄 앞에서는 어쩔수 없이 죽은 자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사야의 경우에 이와같은 광경을 보게 됩니다.이사야 6장에 보면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땅에 충만하도다."면 서 스랍들이 찬양하는가운데 계신 여호와를 이사야가 보게 되었던 것입니 다.그는 주저없이 땅에 엎드려져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나는 입술 이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 었음이라."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합니다. 다니엘의 경우에도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고 전합니다.

신약의 바울의 경우에도 다메섹도상에서 살기등등하게 가다가 정오의 빛 보다 더 밝은 빛을 보고 그대로 엎드려진체 "사울아,사울아 "하는 음성을 듣 게됩니다.

이 성경말씀을 읽어면서 제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내가 만일 요 한과 같이 주님의 발앞에 엎드려 주님의 영광을 보게된다면 어떠한 자가 될 까 그렇게 사랑받던 요한도 죽은 자같이 되었는 데 요한의 발끝만도 못한 나는 어떻게 될까 차마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였습니다.

여러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자신이 있으십니까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가 주님의 발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엎드려 슬픈 탄식을 하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게 와 다았습니다.

그런데 영광의 밑바닥에는 늘 고난이 깔려있게 마련입니다.그리스도의 영 광 역시 이 땅의 고난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NO CROSS,NO CROWN." 이라는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음을 보아도 알수가 있습니다.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고난 역시 영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미우라 아야꼬의 말과 같이, 누구나 일생에 한번은 땅을 치면서 통곡할 일이 있고 "아,하나님!"하고 부를 수 밖에 없지만, 역시 하나님은 우리의 면류관을 생각하고 계십니다.고난을 넘어서 있는 영광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어떤 목사님은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다."고 말합니다.

돛을 바로 올리면 배는 바람을 타고 안전하게 빨리 항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돛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바람이 배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고난에 직면할 때에 고난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하지, 고난을 잘못 이용하게 되면 고난 속에 빠져서 한갗 고통으 로 그치고 맙니다.이 고난을 잘 이용하게 되면 영광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한갗 고통으로 끝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가슴에 한이 되고, 못이 박히 고, 두고두고 한숨이 새어나오는 고통스런 아픔으로만 남을수 밖에 없습니 다.고난에 직면할 때 고난을 승화시킬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 니다. 고난당할 때에 믿음으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더 전진하고, 더 큰 축복 을 받을 수 있지만,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잘못되면 고난이 우리를 원치않 는 방향으로 몰고갑니다.

고난은 나쁜 것이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금을 만들 기 위해서 연단하는 것과 같습니다.그래서 까를로 까레또라는 칠십평생을 수도사로 살아온 노 수도자는 "여러분은 고통을 없애기 보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을 아주 좋 아합니다.그래서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고난 이라는 잔인한 사실을 사랑에 이르는 참된 성장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그 는 말하기를 "만일 그분께서 우리들을 고통받게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들은 일생동안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실책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없다 면 우리는 사물의 가치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어떻게 피로가 없이 휴식 을,슬픔이 없이 기쁨을,어둠이 없이 빛을,미움이 없이 용서를,오류가 없이 진 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좋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고통은 우리에게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피로하지도 않은 휴식을 취한다면 그기에 무슨 의미 가 있겠습니까 정말 피로할 때의 휴식은 새 힘이 되고 어떤 의미가 있지 만,피로 하지도 않은 휴식은 지루함이거나 게으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까를로 까레또가 아주 마음 든든해 하는 사실은 "만일 이세상에 고통 이 있다면 그분은 고통이 있는 것을 알고 계시고,그 고통을 어데게 빛과 자 유와 더 없는 행복으로 변형시킬 것인지를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나는 경험 으로 압니다."하는 이 사실이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안 이래로 진실하신 그리 스도가 한번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고, 속인적이 없기 때문에 칠십평생 의 경험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데에 마음 든든해 한다는 것입니다.고 통이 더 없는 행복 곧 영광으로 바뀔 때 굉장한 일로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 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골적으로 조롱하지 않습니다.우리를 조롱하시기 위해 서 굉장한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죽은 자 같이 엎드려 지고 ,새 파랗게 질리고, 뻣뻣하게 굳거나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시기 위해서 그 엄청난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태양을 우리는 육안으 로 볼수가 없습니다.우리가 볼 수 없도록 하기위해서 태양이 그렇게 밝은 것이 아니라 그 만큼 빛이나고 열이 나야만 이 사람이 체온을 유지하고 곡 식이 자라고 풀이 자라고 삼라만상이 생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 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큰 것은 우리의 고통을 더 없는 행복으로 바꾸어 주 고 영생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현실 문제 가운데서 고난의 문제만큼 불가사의 한 문제가 없습니다.여기에 대한 신비는 도무지 풀길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 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예레미야 12장 1절에서 이렇게 답답해서 묻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욥기4장에서는 고난당하고 있는 욥에 게 의 친구 엘리바스의 말을 보면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 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발갈고 독을 뿌 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이러한 인과응보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9장에 보면 고통은 죄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를 보고 측은하게 생각한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 습니다."이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죄로 인함이오니이까자기 죄 입니 까부모의 죄 입니까"주님께서 "부모의 죄 값도 아니요 자기의 죄 값도 아 니요 오직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죄 와 상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힌두교에서는 [갈마리]라고 하는 교리에 따라서 "전생의 죄값대로 이세 상에서 고난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적 교리를 따릅니다.불교에서는 [열반]의 교리를 가르칩니다."촛불을 끄듯이 꺼진다."는 뜻으로 욕망을 종식시키면 인 간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봅니다.이슬람교에서는 고난은 알라신이 정해준 철 저한 운명론으로 가르칩니다."한번 네가 고난을 당하면 빠져나오지 못하므 로굴복하는 것만이 너의 의무이다. 신이 너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으니 불평 하지 말고 그대로 받으라."고 숙명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교훈은 ,"고난의 수수께 끼는 고난의 정체를 규명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난을 통해서 섭 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즉 고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고난 이란 당하는 당사자외 에는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철저한 실존론적입니 다.잠언 14:10에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 치 못하느니라."했습니다.나에게 주어진 이 고난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습니 다. 나에게 주어진 이고난을 하나님은 선용하십니다. 시편 119:67에 "고난 당하시 전에는 내가 그릇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은지키나이다." 71절 에도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 게 되었나이다." 한마디로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돌아오지 않는 자는 돌아오게 하고 ,죄를 범하는 자녀를 회개케 하고,적으로 잠자는 자를 깨어 일어나게 하십니다.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변화받게 됩니다.

파스칼은 "당신을 섬기라고 내게 건강을 주셨건만 나는 세상을 위해서 전 부 다 써버렸습니다.이제 나를 일깨워 주시려고 내게 병을 주셨습니다." 닥 치는 질병을 이렇게 말하고 있씁니다. C.S.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 서 "사람에 따라서 무서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들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고통이란것은 귀머거리에게 알아듣도 록 하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요한은 자신자르 소개하면서 환난과 나라와 인내에 동참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에 대처하는 바른 자세는,고난 당할 때 형성된다기 보다는 그 이전 평안할 때에 무의식적으로 형성된다고 봅니다.그러므로 고난이 별로 없다고 생각 되는 지금 고난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거기에 대비한는 것이 지혜입니다. 잘 아시는 말로서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합니다.저축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노후의 보장은 노후에 하는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해야 합 니다.죽음이란는 것도 살았을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난도 평 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해야 합니다.고난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광도 사실 은 지금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13에 "나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또 이미 완전해 졌다는 것도 아닙니다.다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 뿐입 니다."14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 향하여 부르신 부름의 상 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상이 아니라 달려가는 데 있습니다.선수의 할일은 상받는게 아 니라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달려 가는데 있습니다.

20절에서는 아주 감격스러운 말을하고 있습니다."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 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과 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시리라."우리의 낮고 불완전한 몸이 그리스도 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된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 죽은 자 같이 엎드려지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받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