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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빚진 자 (롬 01:8-12)

첨부 1


당시에 있어서 로마란 신앙인에게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자칫 개인적인 명예욕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빚진 자”의 자리에서 이런 소망을 품었기에, 이 위험해 보이는 결단이 은혜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태도가 바로 이러하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지나친 열심으로 스스로 지치고, 다른 한 편으로 방관자적인 자리에 내려앉기도 하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우리의 삶에 크나큰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1) 빚진 자의 심정은 감사로 시작됩니다. 이 감사란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속깊은 감사의 생활이 바울의 빚진 자의 자세를 가능케 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십시오. 감사가 넘치게 되며, 바로 빚진 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진정한 봉사와 헌신의 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빚진 자의 심정은 기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 심정은 인간적인 결심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바울은 기도생활을 강조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인간적인 자랑이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이 로마에 있는 신앙인들을 가슴에 품고 쉬지 않고 기도했노라고 고백합니다.
2) 빚진 자의 심정은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는 마음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사와 지혜로만 살아가겠다는 심정이 바울로 하여금 빚진 자의 자세에 있게 합니다. 그가 이미 인간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 어떤 세상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롬 5:1

세상에는 중요하고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우리 신앙인 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런 많은 중요한 것들의 우선 순위는 사람마다, 또 신앙의 정도에 따라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로마서 5:1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참 신앙인들의 올바른 가치의 우선 순위를 잘 나타내 보입니다. 즉, “화평”의 가치를 제일로 친다는 것입니다. 이 것은 무기력한 자의 실패의 말도 아니며,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삶의 가장 큰 감격의 현장에서 바울이 느끼는 고귀한 선언이기에 더욱 귀중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눈이 이 소중한 “화평”을 제대로 바라보고 감사하는 정도가 되어지기 바랍니다.1) 이 심정은 자랑치 않는 마음입니다. 이런 류의 삶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기에 결코 자랑치 않습니다. 그러나, 많이 헌신하고, 많이 기도한 이들의 마음속에서 이런 화평의 마음을 앗아가기 위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드는 마귀는 그런 심령 속에 “감사치 않고, 자랑하는 마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참으로 형식적으로 지나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이 하셨다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모든 일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의 평안은 깨어집니다. 철저히, 정말 진실 되게 예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십시오.
이런 삶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막힌 것들을 정리해 나가는 것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전에 하나님과의 평안을 먼저 누리십시오.

환난 중에도 ..... 롬 5:3-4

오늘의 말씀은 “다만 이뿐 아니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 결코 이전의 삶과 계획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도는 당연한 감사로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도약과 비약과 발전을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기도의 시작을 잘 살피십시오. 감사인가 아니면 ............
“이 교훈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앞날은 이제 장미 빛입니다. 어떤 고통이나 고난도 당하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처럼 이단은 또 없을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도 분명히 고난과 환난이 있습니다. 아니, 신앙이 깊은 사람에게 더 깊숙이 찾아옵니다. (요 16:33, 마 13:21) 성도가 환난을 바라보는 자세는 단 한가지입니다. “환난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환난 때문에 즐거워하는 신앙”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 참 즐거움의 신앙을 바라보는 3단계를 말합니다. 첫째는, “인내”입니다. 곧, “정절”입니다. 곧, 주님을 바라봄 없이 살아왔던 삶을 돌이키게 합니다.(약 1:2-3) 둘째는, 연단의 단계입니다. 곧 성도의 성품을 바꿉니다. 세상의 고통은 사람을 거칠고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고통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갈5:22-24) 마지막으로, 성도에게 있어서 환난은 소망을 이루는 도구일 뿐입니다. 연단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고 감사하기 때문에,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신령한 유익으로 더 많이 배우시고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시 119:71: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영화롭게 하십니다. 롬 8:26-30

“이와 같이”라는 말속에 포함된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을 먼저 점검합니다. 무엇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철저히 낮아지심을 보여줍니다.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님의 인격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마7:24) 새롭게 시작하기를 누구나 원하지만, 동일한 실패를 하는 이유는 1) 낮아지지 못하고 주저하는 마음 2) 자기의 결심으로만 할뿐이며, 예수님의 도움에 의지하지 못하는 상태로 대별됩니다.
그에 대한 증거로 본문 27절에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십니다. 그 무엇도 예수님의 권위에 복종이 될 때는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그 어떤 좋은 환경과 사람도 자기 홀로 서려고 할 때는 무엇도 이루지 못한다는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을 바꾸셔서 기필코 합력 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고 기다리는데 우리의 믿음이 점차 커가야 할 것입니다. 이 기다림이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진정으로 허약해 보이지만, 믿음으로 기다리매 힘을 주시고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30절의 말씀은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어쨌든 예수 믿기 시작하면, 저절로 거룩해 지고, 영화로운 자리에 좌우간에 앉을 것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주는 깊은 은혜는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약속”입니다. 우리의 이미 있는 계획의 중대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룩한 것과 영화로운 자리를 준비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기필코 영화롭게 하신다는 그 분의 약속을 믿으면서, 언제나 거룩하고 경건한 삶의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
 롬8:31-39

우겨쌈을 당하는 신앙 환경에서도 우리가 낙심치 않아도 되는 이유는 바로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생자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서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이어지며, 급기야는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심”으로 지금도 지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에 있어서 조금의 실수나 착오의 구석도 없게 철저히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시는 이 사랑하심이야말로 성자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심을 확증하시는 구절입니다.(34절)
물론, 이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방해는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35절은 “누가... 끊으리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끊기 위해서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바로 악의 영들이라는 것입니다. 온갖 세상의 피조물들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하고 왜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바울은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확증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십시오. 세상은 지금도 권세와 신비와 능력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갈라 놓으려 하지만, 세상이 알 수도 줄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강과 사랑”만을 의지한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
 롬 10:9-15

우리의 신앙 자체는 당연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값없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게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부끄러움 말고 성도가 제 도리를 다 하지 못해서 생기는 부족함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부끄러움만은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힘으로 넘어야 할 첫 째 고비는,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 간단한 믿음의 도리를 무시하고 나서, “신앙도 별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일 뿐”이라는 사고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제자리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10-13절)
두 번째의 고비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클수록 우리의 역할은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결코 무엇이 모자라서가 아니요, 오직 우리의 신앙 향상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쓰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응답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도리는 모르고, 그저 인간적인 열심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경우에 빠진다면, 이 역시 부끄러운 신앙에 머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4절)
마지막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부끄럽지 않은 수준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무엇으로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발조차 축복을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로를 격려하고, 스스로에 감사해 가는 신앙의 훈련을 받자는 것입니다.

좀 넘치도록 하여도...
 롬 11:1-12

공동체라는 것이 항상 완벽한 사람들만의 모임은 결코 아니어서, 언제나 인간적인 과도한 열심과 헌신이 문제가 되고 어려움에 빠지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통해서도 기필코 우리의 공동체를 이끌어 가심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생겨나는 이런 류의 여러 가지 인간적인 노력들로 말미암은 결과들을 정말 신앙의 눈과 힘으로 잘 받아들이는 자세가 절대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때문에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마구 열심히 하면 뒷수습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성공을 이끄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이제는 바로 해야지”하는 다짐과 은혜로 접어들라는 권고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장 마지막 결론인 12절 말씀은 이 부분을 잘 묘사합니다.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즉,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자는 것은 어차피 하나님이 하신다는 방관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좀 지나쳐 보일 지라도 바른 신앙 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보려는 노력을 한다면... 어찌 더 큰 신령한 축복의 세계를 허락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빚
 롬13:8-14
빚진 자의 심정을 지닌 사람은 대상을 따지지 않는 데서부터 그 사랑을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역사는 작은 것을 통해서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은 최소한의 것밖에 못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께서 나머지 부분을 채워주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의 능력에 우리가 굴복을 하고만 있으면 굳이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이 믿음으로만 변화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남에게 악한 말만 하고 있지 않는 정도로만 우리의 보이는 활동을 하더라도..예수님의 사랑의 능력 자체로도 충분히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두 가지의 적용이 가능합니다.

1. 무엇을 하더라도 가장 작은 것을 했다는 다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할만큼 했으니 이제는 너의 책임이다가 아니어야 합니다. 삭개오의 회개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입니다. 부비가 더 들더라도 책임지겠다는 빚진 자의 이 심정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2. 실제로 사랑의 역사를 바라보려면(빚진 자의 심정이라면) 작은 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너무 눈에 보이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잘못을 우리는 너무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한 끼의 식사인 오병이어를 드리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질 때, 주님의 도우심과 사랑의 역사는 기적적으로 우리 삶 가운데 찾아올 것입니다.

깨어있는 삶
 롬13:11-14
11절에서 중요한 말은 ‘벌써’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길은 항상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고 우리는 뒤쫓아가는 것입니다. 잘 믿노라하면서 하나님 보다 먼저 가는 경우가 생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 긴장감이 우리로 하여금 무의식 중에라도 주님을 부르고 만나는 자리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삶의 표식은 무엇보다 정결함입니다. 구체적인 행동강령이 뒤 구절에 나옵니다. 술취하지 않는 자기 충실의 삶, 가정을 바로 지키는 가운데 음란한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새로운 성품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우리가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이지, 결코 공상과 다짐으론 삶이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빛의 갑옷”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스스로 깨끗하다는 것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타인보다 내가 좀더 깨끗하다는 이유로 떳떳하고 자신감 있게 살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정결함 자체가 남들과 신앙의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아집과 오해의 시작이었는지를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이 정결함이 믿음의 세계로 승화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정결하십시오. 그리고 정결한 만큼 겸손히 주님의 도우심을 앙망하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주시는 변화되는 삶을 체험할 것입니다.

주님의 소유
 롬14:7-8

성숙되어 가는 성도들은 항상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같이 신앙 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연약한 이들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1) 자기 중심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갈 2:20)
성도의 신앙에 있어서 사탄이 파고드는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나” 중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이타적인 신앙, 곧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있다면 다 화합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2) 일사각오의 신앙입니다.
대부분의 세상의 일사각오는 내가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 작은 문제도 다 내 식대로 하자고 나옵니다만, 오늘의 믿음의 세계의 일사각오의 신앙은 오히려 남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바울은 이 성경을 쓰면서 자기의 회심의 순간 즉 다메섹 사건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이들을 죽이려고 일생을 걸었고 그들을 미워했으나, 이제 주님을 만나고 나니 누구도 용납하는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칭찬받는 성도
 롬14:17-20

우리가 칭찬 자체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역시 이 정도밖에 안되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우리의 신앙은 (결과적으로가 아니라) 칭찬받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이 작은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겠습니까 반드시 신광공동체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칭찬받고 칭찬하는 자리로 서시기 바랍니다.1)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는 나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부족한 여인들의 명단을 포함시키신 것처럼, 연약한 이들을 포용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눅 19:1-10에서 삭개오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예수님의 의외의 초청 즉, 죄인을 받아들이는 자세였습니다.
2) 선한 일에 힘씁니다.
화평을 이룰 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마음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마 5:9) 아무 일을 하지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인 삶입니다. 화평을 이루는 일을 적극적으로 이루고 계획하고 헌신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3) 거리낌없이 삽니다.(본이 되는 생활)
진정으로 은혜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받은 은혜를 반드시 자기에게만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정결함이 오히려 남을 용납하는 자리까지 가게 합니다. 이 것이야 말로 성도의 힘입니다. 마 5:38-42에 따르면 이 거리낌없는 믿음의 세계는 끝까지 남을 돕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참된 신앙
 롬15:5--7

한 마디로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입니다. 이 인생의 목적은 살다보면 생겨나는 자연스런 결과로 얻어질 수 없고, 더군다나 무엇이든지 결과만 좋으면 다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작을 갖습니다. 역시 이 정도밖에 안되지만....

하나님께게서도 약한 믿음의 사람들과 지내기 위해서는 “인내와 안위”의 모습이었는데 우리는 신앙이 약한 이들을 보면서, 쉽게 화내고 쉽게 분을 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란, 바로 이 약한 신앙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인내와 안위”를 나누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 다음의 자세는 “본받는 삶”이 바로 영광돌리는 삶, 참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더도 덜도 않고 주님을 매일의 삶 속에서 좇아가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세 번째는 뜻을 같이 하는 신앙입니다. 언제나 자기의 뜻을 굽힐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보이는 부분들을 실제로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진심으로 인생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자세입니다. 마음 속 깊이 이 문제를 언제나 제일의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내가 하는 일의 결과와 방식을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그 다음은 입으로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막연한 영광이 아니라, 지금 입술을 벌려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들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개개인의 모임 가운데 깊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남의 터 위에는
 롬15:20-21

각 가정마다 또는 공동체마다의 나름대로의 원칙들이 있습니다. 마치 각 가정마다 독특한 예법이 있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게도 좋은 선교의 원칙이 있었는데 바로 “남의 터 위에는”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누구의 도움 받지 않겠다거나 하는 세상 적인 고집이 아니라, 바울만의 깊은 신앙의 전제를 담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말씀으로 잘 알 수 있었습니다.역시 이 정도밖에 안되지만....

이 작은 신앙 사역의 원칙들이 좋은 선교사의 좋은 사역을 빛내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 것은 먼저, 바른 사명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자기를 부르시고 사용하고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굳이 다른 사람의 수고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아도 넉넉히 이룰 줄을 믿는 믿음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복음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어떤 방도로 전해지더라도 감사하겠다.”는 자세가 바울의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사람을 넘어선 복음에로의 순종이 참 경건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삶의 목표가 바로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신령한 유익들이 무슨 다른 일보다 우선 순위에 대해서 더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좋은 표어나 신앙과 기도의 제목들을 지닌 공동체일수록 실제로도 풍성한 삶이 넘치는 가운데 지냅니다.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에도 이런 일들이 이루어 지기를 소원합니다.

축복의 마음
 롬15:22-29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가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가지 못했던 일을 신앙으로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즉, 신앙이 성숙되어졌다는 증거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나 더 잘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하는 모든 선한 계획이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해도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지금 편지를 받고 있는 로마 교인들에게 아주 자세히 밝혀줍니다. 자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이런 사실들을 나눌 수 있는 그의 확신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두려워하며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제 바울은 자기 사역의 대상을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바꾸고 있는 것을 살피게 됩니다. 자기를 포함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일하심의 철저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성도를 향한 끝없는 축복의 마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을 행하는 사역자들의 마음이 끝까지 축복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때까지 기다리되, 기쁨과 강한 기대를 지니고 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루매 거두리라”

온전한 감사
 롬16:3-4

바울에게는 여러 명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훌륭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즉, 헬라인 유대인 종 귀부인 부부 과부 권세자 등의 여러 구성원들이 두루 어울려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참조:딤후 2장의 그릇의 비유, 마1장의 예수님의 족보)
그리고 그들에게 바울은 아낌없는 감사를 아래와 같이 보냅니다.1) 남을 자랑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인 브리스가를 인정하면서, 남편인 아굴라의 공적을 같이 기억해서 이름을 붙이는 바울입니다. 앞서 있는 브리스길라 만이 아니라, 뒤에서 돕고 있는 아굴라도 기억하는 넉넉한 감사입니다.
2) 입바른 칭찬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을 기억합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바울의 복음 사역을 조력(助力)함에 있어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헌신이 어느 정도인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로 '사형 집행자의 도끼 밑에 자기 목을 내어놓다'라고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공개적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도 훈련입니다. 바로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이 감사를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에게 이런 동역자들이 많은 이유는 아래 성경 구절과 같은 겸손한 마음에서 였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평강의 하나님
 롬16:17-20

로마서의 대미를 장식하는 구절들의 놀라움이란, 무엇보다 그 평범함에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일들을 행했던 바울의 논리의 결론이 아주 일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17절은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 항상 좋은 일이나 협력하는 이들만이 주위에 있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의 일꾼들은 항상 너그러운 마음과 넉넉한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대사도 바울이 발견한 하나님은 능력과 신비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평강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일들을 하고도 바로 평강의 하나님의 인도를 바로 찾아가는 신앙이 바로 바른 신앙입니다. 바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주님의 경계를 삶 가운데 낱낱이 실천하는 바울입니다.
첫째, 바울은 위로부터 내리는 지혜의 삶을 살 것을 권합니다. 야고보서 1장과 같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자세로 그는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했습니다.
둘째, 악한데 미련한 바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얻어지는 인간의 썩어져 가는 습관을 제어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셋째, 무엇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기에 성령으로 무장하면서도 온유함을 잃지 않습니다.

바울의 복음
 롬 16:25-27

얼핏 본문을 보면 “나의 복음”이라는 말이 상당히 교만해 보이나, 이 말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라는 말도 되지만, 자기를 변화시킨 복음이라는 뜻으로 봅니다. 어쨌든 바울이 대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느낀 것들은 아주 평범한 신앙의 법칙들입니다. 이 평범함이 오히려 대 사도의 능력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감취어져 있다가 나타났다”는 말을 묵상합시다. 아무리 사도일지라도 전해야 하는 자가 은혜 생활에 멀어지면, 복음 자체가 감추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뼈아픈 고백입니다. 이 당연한 진리를 솔직히 그는 누구에게나 전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들에 헌신을 했을지라도 “나도 기도와 말씀과 교제와 전도”에서 멀어지면, 복음은 감추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일에 머리를 쓰느라고, 또는 그 동안 아주 많은 은혜를 체험했다는 이유로 인해서 우리의 신앙의 현 주소가 보장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언제나 먼저 시작하시고 먼저 찾아오시는 그 분으로 인해서 바울은 굉장한 부끄러움과 감사를 느꼈습니다.
이 바울의 복음이 이제 여러분의 복음으로 자리를 잡기를 바랍니다. “나만은 이 법칙에서 예외이어서, 기도와 말씀을 통하지 않고도 신령한 일들에 깊이 관계함으로 축복을 받을 만하다”고 여긴 적은 없는지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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