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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행전에 나타난 전도 (행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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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사도행전 1:8은 사도행전의 열쇠를 형성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네 가지 부분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①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우리는 여기서 전도의 주체, 전도의 주권자 가 누구인신가를 보게 됩니다.
②권능을 받고-전도의 동력, 전도의 힘을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③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이것은 전도의 확산 범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④내 증인이 되리라-전도의 일꾼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고 있습니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 한 말씀을 저는 한 주간 동안 계속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가진 놀라운 능력 앞에 나 자신을 복종시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여기 전도의 주체는 성령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전도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전도는 사람이 빠져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전도의 주체는 인간이 아닙니다. 전도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의 소신이나 견해나 선교적인 입장을 전달하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1.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사도행전 2장을 보니 오순절에 드디어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2:4을 보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뜻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11을 보았더니 하나님의 큰일을 그들은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4:8을 보았더니 베드로가 다시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4:31 이하를 보았더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라고 성령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10을 보았더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라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7:55을 보니까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자기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 이 박해 속에서 자기의 목숨을 영광스럽게 하나님께 드리는 순교적 최후의 증언의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8:29 이하에 보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갑자기 성령은 빌립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저 마차를, 저 자동차를 접근하라 그리고 주의 복음을 증거하라 성령이 이렇게 빌립을 움직였습니다. 사도행전 9:31을 보니까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령의 위로가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0:19 이하에 보았더니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행 10:19-20)
낯선 두 사람이 올 테니 그들을 따라가라 그래서 따라가 보았더니 고넬료라는 사람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사도행전 10:44에 보니까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성령님이 강림했습니다.
사도행전 13:4에 보니까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두 사람, 바나바와 바울이 성령의 보내심을 따라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나는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성경은 말하기를 바나바와 바울을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그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3:48 이하를 보았더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방인들이 회심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핍박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사도행전 13:52에 보니까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많은 박해와 많은 핍박과 많은 전도의 곤란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마음 속은 성령의 주장하심으로 충만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6 이하에 보면 아시아로 바울이 전도하러 가는데 성령께서 바울의 발걸음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로 구라파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아무 데나 가서 전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중지하라고 말씀하면 중지했습니다. 방향을 바꾸어라 성령이 말씀하시면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전도할 것인가 어디 가서 전도할 것인가 이 모든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위탁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0:23을 보았더니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성령이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 성령은 앞길의 위험을 예고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루살렘 길로 올라갑니다.
사도행전 20:28을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아무나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그들을 교회의 감독자로 세웠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사도행전을 읽고 또 읽을 때마다 분명한 한 가지 결론 앞에 도달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라는 말을 빼버리면, 성령이라는 단어를 제거해 버리면 사도행전은 그 역사를 상실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성령이 역사 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는 성령이 역사 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성령의 삶이었습니다. 내 생각이 어떻고, 내 주장이 어떻고 그런 것 없어요.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이! 성령이! 성령이! …..... 이것이 사도행전의 메세지입니다.
그분이 주어이십니다. 성령 하나님, 그분이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교회를 주장하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시고, 성령이 역사 하는 성령의 책이 바로 사도행전의 책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1에서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계속 성령의 능력을 기다립니다. 그들에게 성령께서는 능력을 부어주시고 또 부어주십니다. 그들은 계속 성령 안에서 행하고 성령을 좇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성령은 우리 안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내 안에 계시려고 찾아오는 것 아닙니다. 정지된 인격처럼 내 마음 한 구석에 가만히 계시려고 오신 것 아닙니다.
그는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내 안에서 나를 장악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포착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송두리채 그분의 손아귀에 넣고 성령께서는 나를 부리시기를 원합니다. 성령은 나의 모든 인격과 감성과 의지와 사고와 내 모든 기능과 감성을 성령은 사로잡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때 성령께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역사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시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위탁해 버린 사람, 그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도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기 주관과 자기 고집과 자기 철학으로 꽁꽁 뭉쳐진 사람, 한 걸음도 자기 의견을 양보할 수 없는 사람, 깨어지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만들어지기를 원합니다. 내 생각도 내 의견도 내 주장도 내 철학도 내 인생도 당신의 것입니다. 나를 깨주십시오. 이 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내 영혼을 사로잡고 내 인격을 사로잡고 내 마음을 사로잡고 내 인격을 성령께서는 완전히 포로로 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들의 배에서는 성령의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칩니다.
성령의 바람이 거센 세력으로 삶의 목표와 방향을 향해서 이 사람을 몰고 갑니다. 성령의 불길이 그 사람의 인격과 의식 속에 남아 있던 죄악의 모든 찌꺼기를 태워 버립니다. 그들에게 성령께서는 위대한 기름으로 기름을 부어 주시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전도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깨어지고 성령께 사로잡힌 사람들에 의해서 나타나는 사건이요 역사인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오직 이것이 전도의 사역인 것입니다.

2.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고’라고 성령은 말씀합니다. 이 권능이 바로 전도의 능력입니다. 이 권능이라는 희랍어 원어는 영어의 다이너마이트라는 단어입니다. 사도행전의 책장마다 능력이 폭발하고 있는 소리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33을 읽어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냥 권능을 얻은 것이 아니라 힘주어 말하기를 큰 권능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큰’이라는 단어는 희랍의 ‘메가스’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메가톤이라는 말입니다. 원자탄의 힘을 측정할 때 쓰여지는 단어가 바로 이 메가톤이라는 단어입니다. 1메가톤은 잘 아시는 대로 다이너마이트의 백만 톤의 파괴력과 동등한 세력을 갖고 있습니다. 히로시마 일본에 떨어진 원자탄은 2만 톤의 위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1메가톤은 다이너마이트의 백만 톤과 동등한 세력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윌리암 바클리라는 주석학자는 말하기를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놓고 읽어보십시오. “사도들이 1백만 톤의 파괴력과 맘먹는 동등한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더라” 이 백만 톤의 거대한 은혜를 얻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8을 보면 스데반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고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 8:13에 보면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38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증언하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그 성령과 능력 안에서 살다 가신 생애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능력으로 권능으로 역사한 교회와 개인들의 삶의 기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삶입니다. 저는 예수 믿기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짧은 신앙생활의 연륜이 더할수록 느껴지는 것은 신앙생활은 내 힘으로는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저는 더 주의 능력을 기다립니다. 더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이 없이는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삶, 불가능한 삶,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 안에서 소생하는 용기와 능력과 하나님의 주장하심을 경험하신 일이 있습니까 성령의 능력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성령이 나를 주장하시고 압도하시고 나를 포착하시고 나를 지배하시는 이 능력을 알지 못한다면 아직 당신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아직 철렁거리는 바닷가에 발목을 적시지도 못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 그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서 15:13은 말하기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이란 어떤 권능입니까 권능이라고 말했는데 이 권능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권능입니까 그것은 우주를 창조한 권능과 맘먹는 권능입니다.
욥기 26:13에 보면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성령님이 하늘을 단장하신 주인공이십니다. 이 우주의 질서를 생성시키시고 천체와 천체 사이에 인력을 만드시고 하늘의 별자리를 정하시고 태양들의 갈 길을 정하시고 만물을 붙들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의 권능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약속하시기를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주를 창조한 권능과 맘먹는 권능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도하는 성도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2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창조의 신, 창조할 때 이 우주를 만드신 성령의 거룩한 권능은 오늘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가 이 권능을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내가 내 생활 속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패배와 좌절과 실망과 불안과 그리고 우리의 말할 수 없는 불확실한 삶의 모든 모습들은 성령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우리는 메시야의 출생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기적,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가 있어요. 마리아에게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35에 보니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크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여인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 여인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동일한 능력이, 이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활 안에 활동할 수 있다는 이 여지를 아십니까
저는 요즘 성경을 공부하며 이 능력이라는 단어만 공부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능력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능력 안에 사로잡히지 못한 과거가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능력을 청구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능력을 주장합니다. 이 능력이 내 삶과 내 인격을 붙들고 주장하실 때 내 영혼 속에 빛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메시야의 확인, 그 영광스러운 장면에서 우리는 성령의 권능의 주연을 봅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누가복음 3:22에 보니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세주, 생명의 주, 이것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임재 하신 성령의 놀라운 확인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령이 여러분들을 확인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능력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하나님의 자녀임을 내 언어와 생활과 내 모든 삶을 통해서 성령이 나를 활동하며 나를 확인해주고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 땅에서 활동하고 있는 힘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힘은 죽음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힘처럼 거센 힘이 없습니다. 죽음에게 포로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죽음 앞에 거꾸러지고 맙니다. 죽음의 힘은 인류의 가장 강력한 힘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3:18 이하에 보니까 예수의 죽음을 말하면서 사도는 말하기를 그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성령에 의해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죽음을 이기는 힘은 얼마나 거대한 힘입니까 죽음을 정복하는 힘은 얼마나 거대한 힘이에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 능력이 바로 성령의 권능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던 무덤을 열고 포박을 끌러버리고 냄새를 없애버리고 싱싱한 푸른 생명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잉태하게 만들었고 그 생명을 가능케 했던 이 부활의 거룩한 능력이 바로 성령의 권능이라고 성경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49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제자들에게 가서 마음대로 전도하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실상 이와 같은 예수님 말씀은 전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능력을 입을 때까지는 전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내 생각, 내 의견, 아무 것도 아닌 천박한 내 식견만 늘어놓다가 한 사람의 영혼도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5을 보면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7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이 창조의 권능, 죽음을 이기는 이 놀라운 권능을 주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정복하는 전도의 거룩한 행렬과 행진을 향해서 나가라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에 있어서 성령은 어떻게 역사 하시고 있습니까 우리는 권능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외부적인 표적만 말하는 오류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귀신이 쫓겨남을 당하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는 능력의 외부적인 활동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내부적인 영적인 사역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냈더니 하나님의 능력을 주어 내보냈더니 그들이 전도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새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바꾸어진 것이 아니라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이 제일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선생님이여, 우리가 전도했더니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내 이름이 하나님 나라에 기록될 수 있었다는 사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하늘 나라의 소망을 얻었다는 사실, 이 믿음으로 인생을 살 수 있었다는 이 사실, 이 사실보다 더 위대한 권능이 어디 있어요. 그렇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전도할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성령께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죄를 깨우쳐 주십니다. 죄를 자각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요한복음 16:9 이하에 보면 보혜사가 오시면 죄에 대하여 사람들을 깨우쳐 주실 것인데 이 죄는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라고 말씀했습니다.
불신앙이 죄라는 것, 이것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로 깨닫지 못해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 것,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범죄라는 사실은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내 마음 속에 이 죄를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내 마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26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은 예수를 증거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달으며 이 죄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예수만이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은 내 입술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나를 따라 기도하게 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성령의 권능이 없이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고는 참으로 내 전도를 받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어 깊은 곳에서부터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이 고백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이 권능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도를 위해서, 우리의 삶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 그리고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 삶의 변화를 위해서 이 능력을 이 권능을 우리가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 다음 잘 보세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세 번째로 이 구절은 전도의 확산범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런데 사도행전 2장부터 7장까지 읽어보시면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만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어요.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만 있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모여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도행전 8장에 보니까 이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때 아닌 박해가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박해가 일어나니까 이 사람들은 비로소 흩어졌습니다. 그 박해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이루어진 박해, 이 전도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으니까 박해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흩어졌어요. 사도를 제외하고 다 흩어졌어요. 그런데 4절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사마리아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흩어진 사람들은 사도를 제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평신도들이 전도했습니다. 전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업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전도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전도를 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전도는 목사님이 하실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1세기 크리스챤들은 그들이 다 전도하는 일에 팔을 걷고 뛰어나가서 이 복음 전하는 일에 그들의 전체를 드렸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행전 18장에 오면 바울이 이제는 이방인에게 가겠다고 선포합니다. 드디어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장에 오면 16절에 바울이 드디어 로마에 들어갑니다. 그 당시에 세계의 중심부인 로마를 향해서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바울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영향력,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확산되는 복음의 불길을 그들은 세계 속에 그들은 붙여 놓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7:6 이하에 보면 바울의 전도하는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어요. 그랬더니 데살로니가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크리스챤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다”
여기 그리스도인들의 별명이 있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도착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한 지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떠들썩한 광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반사회적인 광신자가 아니라 그들은 거룩한 광신자였습니다. 이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창조적으로 복음의 물결을 가지고 그 당시 세계를 혁명시킨 하나님이 세우신 위대한 광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제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 문제가 일어나요. 크리스챤만 있으면 그 가정이, 그 학교가, 그 마을이, 그 직장이 떠들썩거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영향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찬양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수많은 비평과 조롱과 박해를 모면하기 위해서 혼자서 자기 스스로 경건한 신앙을 지키던 개인주의적 크리스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조용한 개인주의적 삶을 버리는 대신에 수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으며 여전히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이 전도의 거룩한 행진 속에 자신들의 모든 삶을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통해서 복음은 계속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떻게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의 행렬이 전진되고 있는가를.
사도행전 2:41을 보면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하루에 삼천이 더해졌습니다. 사도행전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5:·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사도행전 6:1 사람마다 사람마다 예수를 믿게 되어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6:7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 ” 사도행전 9:31을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17:12을 보면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사도행전 18:8에 보면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10절에 보면 두려워하고 있던 바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아무도 너를 대적할 수 없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라고 주님께서 선포하십니다.
오늘날 대교회를 비판하는 소리들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소교회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질적인 부흥은 양적인 부흥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가 많아지지 않은 교회는 죽어버린 교회입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구원받는 영혼의 숫자가 더해지지 않고 삶이 변하는 사람들의 고백이 없이는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교회는 이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영혼들로 말미암아 붐비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10에 보면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두해 동안 사역하는 동안에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고 했습니다.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전 아시아가 이 바울의 전도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왔던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1:20에 보면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인 스펄젼에게 젊은 신학도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신학도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내가 아무리 설교해도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때 스펄젼 목사님이 묻기를 “청년이여, 젊은이여, 당신은 설교할 때마다 당신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마다 다 구원받기를 설마 기도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말을 들은 젊은이는 “그렇지요.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 스펄젼 목사님이 말하기를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한 사람의 영혼도 제대로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요. 나는 날마다 기도할 때마다 이 런던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영국의 모든 영혼들이 다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것이 나의 사역의 비밀입니다.”라고 스펄젼 목사는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비젼은 다음 주일이 총동원주일입니다마는 1000명이 우리의 비젼이 아닙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1000만 인구가 우리의 전도의 대상이 아닙니다. 전 한국이, 아시아가, 유럽이 우리의 영향력 아래 올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전 세계가 우리의 선교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이 세상에 대한 비젼, 이 지구를 위한 환상, 그 이하로 우리의 비젼을 낮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전도의 대상은 전 세계며 이 지구를 향한 복음의 전도의 선포를 우리는 내걸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4.내 증인이 되리라
이제 마지막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 전도자들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내 증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은 명령이며 또 그렇게 되고 말도록 그 사람 속에 역사 하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내 증인,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했습니다. 저는 여러 교파 중에 제가 속해 있는 교파를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성경적인 교파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에 가장 합당하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교파의 증인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영원히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서울침례교회를 사랑합니다. 지상에서 어느 교회보다도 자랑스럽게,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서울교회를 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그리스도만을 전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증인이 되라. 주님께서는 내 증인이 되라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는 이 약속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증인이 되리라.
이 증인은 두 가지의 말로 분석할 수가 있어요. 하나는 증인은 보고 듣고 만진 사실에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증인은 자기의 이야기를 조작하는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본대로 느낀 대로 그가 발견한 현장을 그대로 보고해야만 이것이 증인의 소임을 다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엇을 보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엇을 들었습니까 오늘 아침 예수가 어떻게 말씀했어요 어제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어떻게 역사 했어요 살아 계신 주님의 역사가 있어야 이 역사를 전할 수가 있지요. 증인은 체험에 입각해서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1에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처음 제자들은 그들에게는 전할 수밖에 없었던 생생한 현실이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닥치는 대로 친구를 만날 때마다 외치기를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소리쳤습니다.
빌립은 소리치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성령님을 만났습니까 내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 사실을 전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면, 우주를 창조하시고 이 만물을 지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났다면 이 하나님을 전하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가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말했습니다. 우물가에 나왔다가 예수를 만나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소리쳤습니다. 나에게 이 모든 사실을 전해준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냐 와 보라! 라고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증인은 이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들었습니까
구원받을 때 만난 예수 말고 어제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오늘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예수는 어떻게 역사 하셨습니까 증인은 듣고 본 사실에 입각해서만 증인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둘째 이 증인에 포함되는 가장 중요한 뜻이 하나 있습니다. 이 증인이라는 뜻은 순교적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냥 사실 그대로 말만 되풀이하고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 순교적 증인입니다. 목숨을 걸고 증거 하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목격한 사실을, 자기가 체험한 것을, 자기가 본 것을 목숨을 걸고 증거 하는 내 증인이 되라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 전도는 여가활용이 아닙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많은 생활 가운데 일부분이 아닙니다. 전도는 우리가 일년에 한 두번씩 하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전도는 모든 걸고 대들어야 할 필생의 사업인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전도는 할만한 가장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3에 보면 전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조롱이 있었습니다. 4:2에 보면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도를 전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4:17에 보면 위협했습니다. 5장에 보니까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5:33에 보았더니 크게 분노했습니다. 5:40에 보았더니 채찍질을 했습니다. 5:41에 보았더니 사도들은 그 일을 인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습니다.
이 능욕을 이 채찍을 전도하다 받는 수모를 기뻐했습니다. 6:13에 보니까 거짓 증인으로 모함을 당했습니다. 7장에 보니까 스데반은 목숨을 바칩니다. 돌팔매가 날라오는데 그 속에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스데반의 영혼을 앉아서 받을 수 없는 황송하신 우리의 주님은 일어서서 전도하며 바친 스데반의 영혼을 받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9:23을 보면 사울을 죽이기로 사람들이 공모를 합니다. 12:1에 보면 야고보가 칼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5에 보면 돌로 치려고 사람들이 달려들었습니다. 14:22에 보면 그러나 제자들은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 서로 권하며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위로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투옥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밤중에 일어나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다시 바울은 재판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20:23에 보면 성령의 경고가 바울에게 찾아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결박과 환란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어떻게 응답합니까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바울은 바다에서 파선을 당합니다. 28장은 보면 바울 사도는 다시 독사에게 손을 물리는 비참한 아픔을 당합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28장 바울은 드디어 로마에 도착합니다. 불신앙의 왕국인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 바울은 드디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터뜨린 이 복음의 권능과 성령의 다이너마이트는 마침내 로마의 제국을 폭발시켜 기독교 세계의 위대한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을 성경에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편지를 보십시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인데 그는 최후의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아들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디모데후서 4:2에 말하기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이것이 바울의 최후의 유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를 향해서 남기고 싶은 가장 간절한 부탁이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 1:14을 보면 전도하기 위해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5에 보면 재산과 소유를 팔아 버렸습니다. 사도행전 2:46에 보면 그들은 집에 떡을 떼며 사람들을 초청해다가 교제하며 그들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집에서 남의 돈이 아니라 교회의 돈이 아니라 자기 돈을 사용해가며 복음을 전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4:34에 보면 밭과 집을 다 팔아다 복음전파의 위대한 사역을 위해서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자기의 전 재산을 위탁했습니다. 사도행전 5:42에 보면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8:26에 보면 빌립에게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광야로 가라 한번도 가보지 않은 광야지만 성령이 말씀할 때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디든지 갈 수가 있습니다. 누구라도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전도를 위해서라면 내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전도를 위해서는 내 모든 재산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1세기의 크리스챤들이라면 오늘 여러분과 나의 모습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오늘 현대교회가 능력을 상실한 원인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헌신과 이런 희생과 이런 복음에 대한 피묻은 헌신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다시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이런 희생의 피어린 강물을 통해서 복음은 어느 날 마침내 나에게도 찾아온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크리스챤의 이 눈물과 이 기도와 이 헌신을 통해서 이 복음은 어느 날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찾아온 것입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을 계속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를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페이지를 읽으면서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폭발하는 그 능력을 보면서 내게 능력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구하고 부흥을 위하여 다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를 들췄습니다. 18세기에 보았더니 1735년 뉴 잉글랜드에 놀스 햄프톤이라는 도시에서 저 유명한 요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을 중심으로 해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날마다 날마다 교회에 모였습니다. 술집들은 텅텅 비었다고 역사는 전해줍니다. 사람들은 낮에도 밤에도 거리에서 공장에서 회사에서 만나기만 하면 주님의 사랑을 전해주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19세기에 보면 챨스 피니가 하나님 앞에 한 그 기도를 통해서 부흥과 전도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챨스 피니가 사역하는 곳에서 훨씬 떨어진 목사도 없던 조그마한 교회 이 모임에 참석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던 한 사람이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함으로 말미암아 목사도 없는 시골교회에 5000명 이상이 모여들어 구원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9세기가 끝나기 전에 하나님은 웨일즈라는 조그만 도시를 뒤집어 엎었습니다. 이 도시에 나타난 부흥은 자아스라는 한 늙은 여성도의 기도로부터 사작되었습니다. 미세스 자아스라는 이 여성도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웨일즈에 부흥을 주옵소서. 옥스포드의 누군가를 보내어 자랑스런 설교를 제발 하지 말게 하옵소서! 캠브리지의 누군가를 보내어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를 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이여, 이 광산촌에 이름 없는 한 어린 아이를 일으켜 주옵소서! 그래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능력을 우리 도시에 보여 주시옵소서! 이 노성도의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했습니다. 에반 로버츠라는 열 세살 먹은 어린 아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주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로버츠의 전도를 통해서 웨일스라는 도시에 전도시가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폭발과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1970년 가장 가까운 미국의 근세사 속에는 얼마 전에 일어난 위대한 부흥의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캔터기 주에 웰머라는 대학가에 가면 그곳에 웰머 메모리얼 뱁티스트 처치가 있습니다. 이 교회 목사님을 저는 잘 압니다. 이 침례교 목사님이 저에게 보내주신 편지를 통해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은 한동안 제 마음을 숙연한 감동으로 흔들어 놓았습니다.
하루 저녁에 온 교인들이 그들의 교회에서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다 팽개쳐 놔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마음을 다 열고 나오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무처리 다 관둬 버리고 필요 없는 인간적인 생각 다 관둬버리고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흥을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기를 위해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한 시간의 예배 속에서 성령님의 임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숨도 쉴 수 없게 성령님이 주장하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가 사람들을 굴복시키시고 있었습니다.
이 한 시간의 예배는 180시간의 계속적인 예배로 이어졌습니다. 180시간 그들은 계속 기도하며 말씀을 읽으며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며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 사람이 달라지는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캔터기의 가장 위대한 교회로 이 교회는 지금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이 사도행전의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 교회에 이런 부흥을 주시옵소서.” 교회역사의 페이지를 들추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이런 부흥의 불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사도행전의 28장은 우리 교회가 써야 합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 최후의 계속되는 장을 우리가 써야만 하겠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권능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말씀하시는 이 말씀 앞에 응답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하나님이 살아 계신 주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모든 죄를 자백하십시오. 깨버리십시오. 더럽고 추한 모습을 노출시키십시오. 그리고 성경 앞에 엎드리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위대한 권능을 목마르게 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말씀을 사모합니다. 이 말씀에 보여주신 그 능력을 부흥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 타는 그 불을 끄지 말아 주시옵소서. 성령의 능력이 계속 우리들을 주장하시고 우리를 통해 이 세계를 지구를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가 목격하기를 원합니다. 원하시면 할 수 있사오니 나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원하시면 할 수가 있사오니 우리의 교회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 한번 웨일즈에 떨어진 불을 이 서울에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시여,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아버지께 드리며 이 아침에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우리 믿음의 가족들에게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감사하며 이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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