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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행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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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위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아직 저희에게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고 했고, 수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신다. 그러나 실제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순절에 이르러서이다.
성령께서 공식적으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며 신자들에게 임하신 것이 하필 이면 오순절이었을까 오늘은 오순절의 의미와 그날에 성령강림의 의미를 살펴보자. 오순절은 성경에 의하면 ‘칠칠절’ 또는 ‘맥추절’이라고 한다. 칠칠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유월절부터 일곱 안식일을 지나기 때문이다. 맥추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가 보리 추수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는 달력에 의하면 정월이 우리의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이다. 이달을 아빕월이라고 한다. 유월절은 4월 첫주쯤이다. 그러므로 맥추절은 5월 말이 된다. 오순절이라는 것은 안식일에서 그 개념이 나온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출 34:22)”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하여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레 23:15,16)”
우리나라에서 “순”은 열흘의 개념이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실 성경은 오십일 보다는 칠칠절, 일곱 안식일. 안식일 자체가 7일이므로 그것을 일곱번 합하여 칠칠절, 이것에 훨씬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안식일을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날 수를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쉰다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레 되는 날 쉼으로써 앞의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서 온 천하만물을 만들었다는 신앙고백을 형식화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부부 중에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 되고, 아내는 신자의 상징이 된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이다. 구약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그 다음에 여자를 지으셨다는 순서상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성경의 질서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만든 창조주라는 신앙의 고백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럼으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



여기 안식일의 개념 속에는 우리를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 첨가되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너와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12-13)”
여기에서는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 말한다. ‘거룩’하다는 성경의 원뜻은 ‘구별한다’는 것이다. 이 구별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에서의 구별이다.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의 안식일의 개념이 여기서 나오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치 않아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안식에 관한 것은 사람이 조건을 갖추어 들어오는 것이기 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려고 하시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말하여 주는 말이다. 안식이 언제 이루어졌는가 하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이다. 바로 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태초에 이미 이루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안식일을 지킴으로 일상의 규칙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 뿐만이 아니라 거룩케 하는 하나님,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해낸 하나님인 것을 즐거워 하는 절기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일의 결과를 감사하며, 즐기며 돌아보는 절기로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얻는 절기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8-9)”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꺼내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 즉 가나안 땅을 안식하는 장소로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설명하셨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쟁이었다. 즉 이런 일들은 다 장래 일의 그림자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 지금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 안식에 들어간 셈이다. 그러나 그 구원을 얻고 완성된 안식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서야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안식을 누리기보다는 전쟁이 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자 전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과 결별하여 늘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우리도 늘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간 것에 있어서, 만약 지리적으로, 사건적으로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었다면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안식일을 계속 지킨 것을 보면 그곳이 목적한 땅이거나, 목적된 장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은 상징일 뿐이다. 애굽이 아닌 곳, 종 되었던 곳이 아니라 자유민이 되는 것으로의 어떤 상징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가 있는 정도이며, 그와 동행하며, 그가 내 안에 와 계신 정도이며, 약속된 나라를 소유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침을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나안에 들어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이야기는 없고 늘 싸우는 이야기 밖에 없다.
안식일을 지키라 명령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가
우리에게준 약속을 절기화 하며, 의식화 규칙화 하신다. 안식일을 지키게 함으로



써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죄와 악과 더러움과 부패함에서 꺼내어 안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 즉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이 더욱 강조된 것이 희년이다.
희년과 오순절의 개념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안식일을 확대한 것이 안식년이다. 안식년을 더 확대한 절기가 희년이다. 희년은 안식년을 일곱번 반복한 49년 다음 해인 50년째를 말한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되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레 25:8-12)”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을 사고 팔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제비를 뽑아 전부 땅을 나누어 주었다. 설혹 땅을 팔았다 하더라도 희년에는 반드시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다. 땅이 있다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뜻이다. 다시 기업이 생겼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외인이되고 타락해서 이방인이 되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 기업이 없고 소망없는 자인데 영원한 처소를 다시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땅을 판자가 다시 돌려 받는데 있어서 대가를 치루는 것이 아니라 희년에는 무조건 아무런 댓가없이 돌려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규례와 절기로 반드시 지키도록하셨다. 규례를 지킴은 이미 있었던 것을 추억하게 하는 의식이지 그 규례를 지킴으로 약속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도 규례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앞에서 한 것들이 아직 상징이었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적으로 실제로 죄와 사망의 종되었던 곳에서 꺼내어 하나님의 자녀삼을 일이 상징화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다.
노예로 부렸어도 희년에는 놓아 주어야 한다. 만일 그가 속하여 돈을 내려면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희년까지를 계산하여야 한다. 희년은 종이 풀리는 때이고 기업을 회복하는 때이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배반하고 죄 가운데 빠진 모두를 회복시키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그 표현을 ‘종되었던 것’과 ‘종에서 자유를 얻는 것’으로 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성령님이 오순절에 오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어떻게 친히 죄와 사망의 종에서 꺼내셨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하던 곳에서부터 꺼냄을 받았다는 것이 어떻게 증명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던 우리에게 성령님이 오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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