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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인침과 성령의 은사 (고전 1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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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과에서는 성령의 사역과 성령의 세례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 보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본질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에 초점을 두느냐에 달라진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증인의 사역을 감당케 하시는데 훨씬 많은 촛점이 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역을 감당케 된다. 성령의 인치심은 자기의 구원문제,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확인’ 쪽에 초점을 두고 사용한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4)”
근본적으로 성령세례와 다를 바가 없지만 ‘확인’쪽에 초점을 맞출 때는 ‘인침’이 된다. 인침이란 보증을 말하며 누구의 소유인가를 표시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안전보장’을 뜻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에게 약속된 성경의 약속들이 어떻게 확실한 자들인가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일,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어 있을 때 ‘성령의 인침’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글로 쓰고 말로 들어서가 아니라 그냥 알게 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신자가 자신이 구원을 받았음을 확인하는데 가장 놀라운 확신이 있다면 여러가지 중에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직접 확인시켜 주는 이 ‘성령의 인치심’일 것이다.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5-2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들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인침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지만 그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주관적이지만은 않다. 즉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옆에 있는 사람도 알 수 있을만큼 외적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성령의 인침’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은 ‘보증’과 ‘확인’을 위해서라고 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성령의 인침은 우리에게는 우리가 예전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그런 것들과 비교될 수 없는 훨씬 더 놀라운 직접적인 체험이다. 우리를 회심케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성령님의 사역을 성령의 간접적인 사역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인치심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인 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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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인치심이 보증이요 도장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역사 속에서 치밀하게 이루어 놓고 계신다. 성경 어디를 찾아 보아도 성령의 내주와 성령께서 직접 인치시고,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성령세례와는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도장이라는 것은 결국 당사자를 위해서라기 보다 제 3자를 위해서이다. 도장을 찍는 다는 것은 사실인 것을 더욱 확인하며, 객관성을 주며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있던 것이 더 확실해 지는 것이다. ‘성령세례’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내용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나아진 것도 없다. 다만 있던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우열의 개념은 없다. 성령세례는 ‘성화’와는 다르다. ‘성령세례’나 ‘성령의 인치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깊으신 뜻에 따라 주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적인 면에서 남보다 낫거나, 받을만한 수준이 있어서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자가 받은 사람보다 신앙적인 면에서 나을 수도 있다. 그것이 고린도서에 잘 나타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를 믿을 때 성령님이 이미 그들 안에 계셨다. 만약 성령님이 안계셨다면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부어주심의 성령세례는 못받았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써의 성령세례를 제자들이 최초로 받았다. 이제는 거꾸로 제자들이 성령을 소개한다. 그렇게 해서 성령이 사람들에게 소개된 후에는 그 소개한 사람, 즉 제자들이 아니라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인치는 것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줄 수도, 옮겨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주고 기다리는 것이지 내가 중개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인침으로 사도행전에서는 어떤 작용을 했는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임을 우리에게 깨우치실 때에 ‘이들도 내 백성이다’라는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도 ‘성령의 인침’이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을 사용하여 그 사람을 통하여 성령님이 임하게 하심으로 그 사람으로 ‘하나님이 보낸 자다’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확인시켜 주는 작용을 하였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안수함으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함을 보고 그들이 이 성령님이 인치심을 보고 하나님의 자녀가 이제 유대인 뿐만아니라 이방인도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열매를 맺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하나님을 높이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시며, 임하시며 부르고 계신다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써의 성령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령님이 베푸시는 세례가 있다고 했다. 그 세례는 구원받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로 보내 하나되게 하시는 사역이라고 하였다. 성령 세례나 성령의 인침을 받는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그가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는가를 아는 것이지 능력을 받는다는 차원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능력적인 것이다.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키 위한 능력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능력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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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
우리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우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약속과 소망이 어떻게 확실하며 대단한 것인가를 확인시켜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를 소망케 하시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무엇이 너희에게 유익하리요(고전 14:6)”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것보다 나으리라(고전 14:19)”
모든 초점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집중되고 있다.
지금 우리 주변을 보면 은사 일변도로 가는데 가장 큰 이유는 능력으로 자꾸만 초점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우월감을 위해서만 은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이라고 결론을 짓고 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4-40)”
우리가 받은 은사가 아무리 크고, 큰 능력을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내 이웃에게로 사랑을 쏟아내는 것으로 가지 않는다면 필요없는 것이다. 축복들이 정당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궁극적인 목표로부터 외면케 하고 그 자리로 가는 것을 방해하거든 버려야 한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내 이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가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갖고 내 이웃에게 상처를 주며, 방해하는 것이라면 버리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며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주님 발 앞에 꺼내 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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