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갈멜산의 엘리야 (왕상 18:20-40)

첨부 1


수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온 나라가 난리가 나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책임전가를 하던 시기입니다.

갈멜산의 엘리야라 하면 얼핏 생각하기에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무한의 능력을 지닌 선지자로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 20절-25절을 잘 살피면,
엘리야가 처한 당시의 상황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수많은 백성들을 대상으로 해서
선지자직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무도 신앙적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세상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먼저 이해되어야 합니다.
선택이란 즉, 부르심이란 썩어져 가는 세상으로부터의 부르심입니다.
능력이란 단어에 매어 달리기 전에
이런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한 믿음의 준비가 더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은 분명한 기사와 이적이며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 사건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아주 정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확한 현실 파악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 까닭”을 찾아 나가는 것이
오늘 본문의 주요 내용입니다.
1) 20-24절
오랫동안 비가오지 않게 하는 재앙을 만나고도
그들은 회개하지않고, 오히려 그 재앙을 선포한 엘리야를 미워합니다.
모이게 한 사람은 아합왕입니다.
........ 아합의 목적은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자기(아합)의 책임이 아니며,
오히려 엘리야의 책임이라는 증명하려고.....
그러나 엘리야의 목적은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

대답없는 백성들입니다.(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 머뭇머뭇거리다:절둑거리다.(조심)
이 반쪽의 마음을 경계하십니다.

남은 숫자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같은 두 송아지를 갖고 나옵니다.
비로소 대답하는 백성들입니다.
(바알은 원래 태양의 신이기에...)

엘리야의 부르심이란 바로 이런 백성들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하고
여러분의 사역을 가장 잘 도와 줘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이
바로 이렇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질문) 여러분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멀리 있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문제의 핵심을 바로 알았습니다.
이 비가 오지 않는 재앙의 근본은
아합 왕도 아니요, 바알의 선지자도 아닌
바로 묵묵히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만 하는 머뭇거리는 백성들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어디서 많이 보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모습이며,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가장 가로막은 존재입니다.

나머지 25절-40절의 내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내용은 하나님의 불의 역사를 위한 준비라기 보다,
오히려 엘리야 주위에 있는 수많은 불신앙인들을 설득하고 달래는 내용입니다.
즉, 아무도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던 시절에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가부터 엘리야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외로움 속에서 자기의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는
엘리야의 심정을 헤아려 봅시다.

또 자기들 손으로 무너진 단을 수축하면서
서서히 신앙적인 기대가 높아 가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생각합시다.
이런 철저한 책임 의식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준비한 것이
갈멜산 사건의 주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스스로 하면서 회복하게 한 것들을 잘 살펴 봅시다.1) 백성들이 스스로 증인이 되어 단을 재건합니다.
저들의 신앙이 머뭇거렸다는 신앙의 증거를 들고 나옵니다.
(겸하여 섬기지 못합니다. 절대로)
19:10로 보아 바알 숭배 이후 급속히 허물어 뜨려진 단입니다.
어디에서 저들의 신앙이 떨여졌는가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어려워서가 못한 것이 아닙니다.

2) 12지파의 숫자를 강조합니다.
어느 경우도 흩어진 것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동안 흩어져 있었나요
모여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낙후된 증거는 바로 나뉘어 있고
그 이유가 참으로 여러가지입니다.

3) 도랑의 물을 붑니다.
종종 이방의 사이비들이 거짓으로 나무 밑에 장작을 감추어 놓았다가..
하나님의 역사가 아무 조건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대게 다 알면서도
종교란 다 그런거야
목사도() 교회도 다 드렇지 뭐.....
37절을 보겠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기어코
이스라엘인으로 하여금
저들이 무관심으로 쓰러진
제단을 다시 쌓게 하고
마음을 돌리려는 데 바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사역이 있습니다.

결과는 번제물만이 아니라,
나무와 돌과 흙과 물마저 다 태우고 불이 지나갑니다.
사람이 하는 공력이라는 것이 전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저들의 단이 멋있고 좋아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라도(예배)라도 드리는 것을 통해서
저들이 하나님이 바로 누구라는 것을
저들 스스로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빼먹으면,
하나님이 손해가 아니라,
여러분이 손해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하나님임을 잊는 것이 너무나 큰 불행입니다.
예) 40년 광야를 지나면서 남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닙니다.
대를 이어서라도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증명하는 것은
더 중요해서 입니다.

정리1) 책임의식
부르심이란 언제나 이런 모습입니다.
능력이라는 말을 구하기 전에 여러분 주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어느 말 보다 속상해 하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잘 보이시지요!
이 속상해 하는 책임감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자기 회개
여러분이 손으로 하나님께서 정성을 요구하시거나
어떤 무엇을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있지요.
그러나
그 모든 요구는 바로 여러분 자신의 신앙 확신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