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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 (행 0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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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특히 요즈음에 와서 죽고 싶다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는 망상을 버리라고 조언을 합니다 죽고 싶다고 원치 않아도 언젠가는 죽게 될 터인데 미리 서두를 필요가 있습니까 또한 죽음은 결정적인 책임을 지는 순간인데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죽음이 모든 문제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만큼 큰 착각은 없습니다 지식은 있으나 용기가 없습니다 기술은 있으나 지혜가 없습니다 수평적인 지식은 있으나 높고 깊은 수직적인 지식이 없습니다 적어도 지성인은 누구 때문이라고 타인을 원망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 좌절 등으로 자기 존재에 회의를 느낍니다 자신이 싫어지고 밉고 부끄러워서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허탈감으로부터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대단히 용기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의롭거나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는 실수까지 저지른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온갖 협박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죽음까지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 엄청난 용기는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옛날 로마 시대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도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아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순교사에서 전해오는 한편의 이야기를 소개하지요 어느 재판장이 많은 성도들을 붙잡아다 놓고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해 잔뜩 위엄을 뽐내며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끌려온 성도들은 겁에 질리기는커녕 싱글싱글 웃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재판장은 몹시 부아가 나서 “저들을 매우 쳐라 !”하고 호령을 했습니다 이 때 옆에서 일을 돕던 사람이 충고하기를 성도들은 매맞으면 주님의 이름으로 맞는 것이기에 오히려 좋아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죽이라고 재판장이 명령하자 죽이면 천당간다고 더더욱 좋아하고 귀향을 보내면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어 기뻐하니 이런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러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성도들은 죄짓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니 돈을 많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죄를 짓도록 유도하자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음을 믿음의 조상들에게서 얼마든지 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1절에서부터 아브라함을 위시하여 믿음의 조상들을 죽 나열하고 그들의 생애와 믿음의 위대함을 기록하면서 38절에 가서 결론 맺기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용기란 어떤 때에 생기는 것입니까
첫째 무지할 때에 용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 용기는 만용일 수가 있습니다만 아무튼 지식층보다는 무식한 사람들에게 용기가 있습니다 둘째 본성에서 오는 용기가 있습니다 성격적으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세째는 지식에서 오는 용기입니다 그러나 이 용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식이란 완전하지 않으므로 구멍나지 않는 이론이 없고 반론 없는 이론이 없기에 오늘 잠깐 이 이론에 동의했다가 내일이면 다시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식에 근거한 용기는 오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네째는 믿음에 근거한 용기입니다 이 용기는 절대적인 용기로 변함이 없는 참 용기입니다 물론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먼저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베드로와 요한의 그 놀라운 용기가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들의 용기의 근거는 오직 믿음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돈의 위력 때문에 돈을 의지하려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돈과 함께 망하리라’하고 돈을 믿는 사람들이 돈과 함께 망하는 모습을 일찌기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명예와 권세는 믿을 만한 것입니까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아서 근본적으로 믿을 것이 못됩니다 내일이면 어느 결혼할 신부가 어떤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결혼에 대한 회의를 털어놓습니다 도대체 결혼할 상대자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가지 않는 남자에게 일생을 건다는 것이 불안해서 결혼 전널 밤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처음부터 남자를 믿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이 그를 내게 짝지어 주셨다는 믿음으로 시작하라는 조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그들의 용기는 오직 절대적인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신앙으로는 그와 같은 용기가 어림도 없습니다 예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의롭다 하신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안에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을 확증받고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죽음도 두렵지 않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용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초월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사람들의 평판에 지나치게 예민한 편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내가 못살아서 고민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비해 못산다는 상대적 빈곤감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의 말에 평가에 초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고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신경을 썼습니다 어느 면으로는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여성들은 병원에 입원해서도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픈 것보다는 얼굴이 상할까봐 더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시간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될까 하는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다니 놀랍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면 누가 정죄하리요‘ 바울의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콘스탄티 대왕은 로마에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한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보니 그의 신하인 문무 백관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기독교인이었기에 부하들에게 관직과 기독교 중 하나만 선택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기독교를 따르면 관직을 포기하고 관직에 있으려면 기독교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때에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왕께는 죄송했지만 관직보다는 예수님을 택했습니다 물러서는 그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고 편안했지만 왕은 대단히 괴로웠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그 중에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등지고 관직을 택했던 것입니다 왕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남아 있는 변절자들을 다 내어 보내고 오히려 스스로 물러선 기독교인들을 다시 불러 선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는 버릴 것은 용감하게 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잘 아는 성도가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한번 문병을 갔더니 환자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왜 그렇게 괴로워하시느냐 편안한 마음으로 푹 쉬라고 했습니다 그는 ‘물론 허리야 아무 때에나 부러질 수 있지요 문제는 무엇을 하다가 부러졌느냐가 중요합니다’하고 대답하며 주일날 예배보지 않고 놀러가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사람들의 평가에 관계없이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네째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지고 내 편에 계시어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므로 내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용기가 넘쳐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소를 향해 갈 때의 일입니다 이 재판은 생사를 가늠하는 무서운 재판이라 루터의 친구들이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말했습니다 ‘재판정 기왓장 만큼이나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재판정에 서리라’ 그리고 재판정에 서서는 ‘오 하나님이여 ! 나 여기 서 있습니다’라는 외마디 기도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기에 나의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깨끗이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놀라운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같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들으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랴’하는 용기 있는 결단이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난해도 떳떳하게 가난해야 합니다 실패해도 비겁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비난을 받아도 신앙적으로 담대하게 견디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자랑스럽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스데반처럼 여유를 가지고 신령한 감격과 거룩한 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고 비판할 수 없는 용기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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