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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 19: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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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을 대할 때 대부분의 성도들은 종려주일에나 읽혀지고 또 설교 되어져야 할 말씀으로생각하기 쉬운 고정관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본문의 배경은 그럴른지 모르나 우리는 이 말씀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깊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보면 어느 때에라도 적용되어지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주일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입성하시는 주님의 곁에 옆에 뒤에 나타나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양탄자처럼 깔며 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 위에 펼치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하며 호산나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때 얼마나 찬송을 힘있게 크게 외치듯 불렀든지 마21:10절에는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전 39절에는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서서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엄중한 항의를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요 마땅히 찬송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주님도 이 되어진 일에 대하여 찬송해야 할 마땅한 일로 여기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이처럼 우리 주님은 만민에게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고찬송으로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몇가지 내용을 상고해 보면서 주님 주시는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기를 원하면서 지금 네 눈에는 감추었도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환호하고 있는 그 백성들을 보시고 우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눈에 숨겨진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 아야 합니다.
벱바게와 베다니 마을이 점점 등 뒤로 밀리는 가운데 예루살렘 가까이 오신 주님이 그토록 환호하는 인파에 파묻혀 찬송을 받으시면서도 흐뭇해 하시지 않으시고 왜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수다한 무리가 그를 따르고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환호를 하며 또 다윗의 자손 호산나를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돌리고 있는데도 주님이 우셨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어떤 분들은 해석하기를 지금 주님이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죽으시기 위해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고 계시기 때문에 찬송과 환호와는 달리 죽음을 생각하며 우실 수 밖에 없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틀려도 한참 틀린 해석에 불과 합니다.
여기 주님이 우셨다는 기록은 그냥 눈물을 흘리시는 상태의 울음을 표현하는 그런 낱말이 아니라 엉엉 소리내어 큰 소리로 우셨다는 낱말로서 헬라어 성경은 "에클라우센"이란 낱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11:35절에 기록된 "에다크루센"이라는 동사와 의미가 전혀 다른 낱말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낱말은 "에클라우센"으로 [소리내어 엉엉 울 때] 쓰는 낱말이고 요한복음 11장의 "에다크루센"이란 낱말은 [그냥 소리없이 눈물만을 흘렸다]는 뜻을 지닌 낱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울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더욱 궁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유의깊게 이 말씀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주님이 하신 말씀 속에서 우신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우리 다같이 42에서 4절까지를 다시 한 번 봅시다. 어떤 내용입니까 얼마 후에 누군가가 예루살렘성을 공격해 들어옴으로 인하여 성안에는 아비규환이 일어나게 되는데 자식들을 땅에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는 무서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있을 것을 아신 주님이 그것때문에 엉엉 우신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린다면 예루살렘이란 말 그대로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을지니고 있으며 또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이라고 성이름을 지었는데 그 진정한 평화는 모르는체 그리고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진의도 모르는체 열광하며 평화를 노래하며 또 정치적인왕으로서 입성하여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까닭이었던것입니다.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는 멀기만 하고 앞으로 되어질 일은 지금 그들의 눈에 숨기워져 있으니 영혼을긍휼히 여기고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이 어찌 엉엉 우시지 않겠는가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자하시고 온화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시며 진리의 도전 앞에는 단호하게 꾸짖으시던 주님이 갑자기 성에 가까이 오시면서 우셨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환영하는 인파에 둘러싸인 가운데서 말입니다. 환하게 웃으시고 한없이 기뻐하셔야 할 영접인데도 주님은 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환영하는 인파를 보시고 우신 것이 아니라 성을 보시고서 우셨다고 본문은 기록하고있습니다. 여기서 보시고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이돈"이라는 단어인데 이 낱말의 뜻은 그냥 스쳐지나듯이 보셨다는 말이 아니라 사물을 꿰뚫어 보셨다는 직관적인 통찰력을 나타낼 때 쓰이는 낱말입니다.
바라다 보이는 예루살렘은 외관상으로는 평안하였고 역사적으로는 면면히 흘러내려 오는 유서가 깊은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40년 앞으로 가면 이미 정해져 버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멸망당할 모습이 선하게 떠올라 목놓아 독백하듯이 우시고 만 것입니다.
그 성은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상실한 도성으로 평화를 원하고 있었지만 무엇이 평화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날이 이르면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둘러 사면으로 외워싸 예루살렘 거민을 가두어 두고 자녀들을 땅에 메워치며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는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정확히 40년 후에 임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기 바로 직전은 유월절이어서 행사를 치루기 위하여 백여만명의 유대인들이 이 성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때 로마의 티토장군이 이끄는 정예부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식량을 공급할 수 없도록 외부의 모든 공급을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이 때가 주후 70년의 일인데 6월 24일에는 안토니오 요새가 점령당하고 7월 6일에는 날마다 드리던 성전의 희생제사가 끊기워지고 8월 27일에는 그토록 웅장하고 장엄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성전이 불에 타 버리고 9월 24일에는 예루살렘 전역이 티토 장군의 휘하에 놓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심지어는 어린 아이를 삶아 먹는 참사까지 발생했다고 유대 역사가들은 진술하고 있는데 이 날은 예루살렘 최후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살아갈 앞 날도 아직 우리 눈에 감추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이 어떤 날이 될른지도 모른체 하루하루를 퍽이나 다행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된 주님의 종말 예고를 늘 기억하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사건은 한 시대 유대의 사건으로만 국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들 입술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메어달려 있었고, 그 성전에서는 희생제사가 끊이지 않았으며, 그 성은 종교적인 심성으로가득차 있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 마음은 멀기만 한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42절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는 숨기웠도다라는 말씀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너희들이 평화를 원하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담이 될 수 밖에 없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것을 알았더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예루살렘 성전이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일마저 지금 그 눈에 숨기워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을 가르 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이 눈을 뜬 소경으로서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본문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의 "숨기웠다"는 말은 "에크뤼베"라는 수동태형 단어인데 누군가 보지 못하도록 숨기워 버리므로 볼 수가 없다는 뜻을 포함한 말입니다.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져 버려 진리와는 상관없이 영적으로 잠든 상태에서 희생제사가 진행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도 이와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내 개인의 탐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복적인 상태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세상에서 이방신상 앞에서 하던 행위와 하등에 다를바가 없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고 하면 진정한 예배의 부름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복을 비는 대상만 달라진 것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영적 무지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자초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자들이나 이 성안에 거하여 살고 있는 자들은 빼놓고 환호하는 너희들만이라도 하나님의 평화를 알았으면 좋으련만 너희들도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고통스러운 생각에서 그만 울고마신 것입니다.
울고 나신 후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보셨습니다. 희생제사를 드리는 인파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희생제물을 파는 자들은 성전 안까지 점거하여 자리를 차지하고 잇습니다. 이 일 또한 갑자기 시작된 돌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처소로부터 희생의 제물될 짐승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온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서 자연발생적으로 자연스럽게생겨난 장사수단의 한 방법일 뿐이었습니다.
어떤 주석학자들은 이 장사행위가 처음에는 동네 어귀에서 진행되다가 그리고 성전문까지 왔다가 마침내는 성전 안으로 밀려들지 아니하면 않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까운 동네에서 구입하던 것이 이제는 아예 성전에서 구입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드릴 성전세가 성전에서 바꾸게 된 이유는 지배국의 돈은 그리고 이방국가의 돈은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세겔이라는 히브리 돈은 흠이 없을 만큼 정결하다는 사상에서 생겨진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좋은 정신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마치 오늘날도 성도들이 빳빳한 지폐를 바꾸거나 모아두었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이치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지를 못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예배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4:22-23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실 때에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신령)과 진정(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가 될만한 요소가 없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이렇게 신앙인이 영적인 문제가 자신에게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섬기는 상태는 반드시 영적인 잠을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서운 것은 세상의 유혹도 무섭고 핍박도 무섭고 사탄의 시험도 무섭지만 자기의 영적 상태를 모르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은 사탄의 시험 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한 믿음을 자랑했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믿음이 나약하다는 것을자신이 잘알고 있지 못한 착각인 상태에 있으므로 시험에 빠져버린 경우들도 허다합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그들 눈에는 숨기워져 있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오랜 전통을 지닐만큼 신앙년조가 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느낄 때 이미 그는 영적 무지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규칙적으로 말씀을 보고 있고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책망받을 만한 일이 벌어지지않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무리 뜨겁게 섬기고 또 섬길지라도 한없이 부족한 인생들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주님 섬길 일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없는 무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믿음으로 의인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이 되어서 우리를 의롭다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 뿐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칭의(칭의)라고 합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의 문제는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절망스럽게도 하나님의 시각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자신의 입장과 인간편에 서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과 하나님의 섭리를 평가하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완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일들과 자기 앞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지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엉터리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의 하시는 행동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분명희생제물을 파는 자와 돈 바꾸는 자들만을 내어 쫓으셨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잘못 때문에 그들을 내어 쫓았다고 못박아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결국 주님의 분노는 매해마다 아무 뜻없이 어떤 깊은 영적 은혜도 없이 희생제사를 드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문제가 있다고 보셨기 때문에 제사행위가 멈춰지도록 그들을 내어 쫓아버리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라도 드려지는 제사가 하나님에게 열납되고 있는 제사였다고 판단하셨다면 주님은 결코채찍을 만들거나 책상을 뒤엎으시면서 강도의 굴혈을 만든다고 고함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마21: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진정으로 예배때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하면서 가슴 뜨거운 예배를 자신이 드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예배드리고 있다고 믿어지십니까 다시한번 심각하게 자신을 향하여 해봐야 할 질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헌금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주일 성수를 하셨습니다. 정말 내가 드린 물질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큰 역사를 이룰 것이라는 믿음의 기대감과 내가 드린 기도가 몸된 교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이루는 밑거름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확신 가운데 드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에 대하여 자신있게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유월절 행사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와있는 그들과 우리는 하등에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이 당도하시기 전 바로 그날 아침까지도 헌금 드리는 일과 제사드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여기에 제동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달리 주님은 들어오시자 마자 분노를 하셨습니다.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은 이런 시각을 가진 성도들을 원하고 계십니다.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지 않는한 진정으로 가슴저미는 교회 사랑을 할 수없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예배 때마다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하는 생각보다 영적인 각성을 통해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한 가운데서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하는 일들이 열매를 맺으며 온전한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상을 뛰어넘는 진노 끝에 주시는 말씀은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환영하며 환호하는 엄청난 무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순간적 충동으로 헌신을 결심한 철새같은 무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시대를 분변하고 장차 다가올 세대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겠는가를 말씀 안에서 깨닫고 또우리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무엇을 보고 가슴 아파하시가를 알고 따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구하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 눈에 감추어지고 있는 것들은 기도하는 자들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주님은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내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46)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활동했던 구약의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700여년이 넘도록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 버린 암흑기의 중간사가 있긴 하지만) 기도하는 일 없이 제사의식은 행해져 왔고 기도가 없는 제사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무미건조한 의식으로 끝을 맺고 마는 결과를 나타냈음을 주님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장사꾼들로 인하여 성전이 불결해졌기 때문에 취해진 일련의 조치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 교회를 향해서도 은혜를 주시는 수단은 여러가지 이지만 특히 교회를 향해 주시는특별한 은혜와 큰 은혜는 기도하는 일들을 통하여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집이 되는 길은 기도하는 백성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백성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건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라는 소문이 나야 은혜로운 교회가 되는 것이요 기도하는 교회라야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요 기도하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교회 계시는 것입니까 예배로 영광을 받으시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그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성전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하나님이 성전에 계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섬겨 드리는 방법 가운데 참으로 놀라운 방법이며 예배 다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거룩한 수단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내 집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해석한다면 기도하는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아무런 뜻과 의미도 없이 행해지는 제사는 있어도 기도가 없는 교회, 그곳에서행해지는 돈 바꾸는 일과 제물을 매매하는 일은 기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배만 드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시간을 갖지않고 주님을 섬기는 것도 결코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전을 가장 거룩한 건물로 구분할 줄 알고 가장 경건하게 들어가야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유대인 장사꾼들이 기도하고 있는 그 거룩한 참백성들의 기도를 방해할만큼 소란을 피우면서장사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방해하고 있는 것 때문에 그들이 쫓김받은 것이 아니라하나님이 거하실 수도 없을만큼 기도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교회로 전락하고 있는데다가 그들마저도 성전에서 장사를 하므로 주님은 제사를 드리고 있는 백성을 향하여 진노하시거나 쫓아내시지 않고 장사치들만을 쫓아낸 것입니다.
한번 예를 들어 볼까요 금식기도원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금식기도가 끝난 사람들을 위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자연스럽게 음식을 파는 가게가 하나둘씩 생겨났습니다. 그 음식점 때문에 편리함도 있지만 금식기도하기 위해 올라온 성도들이 받는 유혹은 더 많아졌을 것입니다. 여의도에 있는 큰 교회를 가 보십시오.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자연발생적으로 교회로 들어가는 길양쪽 입구에 많은 장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단속만 하지 않는다면 성전에까지 들어갈만큼 즐비하게 서로 밀치듯이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 현상이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해도 시원함이 없습니까 기도해도 더 깊은 영적 세계로 나아가지 못합니까 기도가 능력없는 허공치는 기도가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돈바꾸는 상을 둘러 엎으십시오. 매매하는 자들을 여러분의 심령 안에서 채찍으로 휘둘러 몰아 내십시오. 그것은 곧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탐심과탐욕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더러운 탐욕과 탐심을 몰아내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는 한 우리의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그런 기도는 주님이 받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기도는 온 교회의 중심기능이어야 하며 한 성도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삶의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란 문제 있을 때나 하고 어떤 큰일을 앞두고 있을 때나 하는 그리고 성도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만 생각하는 그릇된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치만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은 따져보면 영적 전쟁입니다.
기도는 영적 전쟁에서 가장 큰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을 하는 자가 절대로아닙니다. 악한 영들에 대하여 싸우는 자인 것입니다. 악한 영들과의 싸움은 기도하는 자에게 승리가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의 기능을 살려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게 하여야 하며 한 성도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여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주님 앞에 우뚝 서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우리눈에 지금 감추어진 진리를 우리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밝혀진 진리를 따라 교회와 주의 종과 주님을 섬겨 나가는 우리 앞길에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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