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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족보 (마 01:1-16)

첨부 1


1.서론
1)인생은 누구라도 슬픈과거가 있다.
또 자신의 가문이나 족보에도 영욕의 희비가 엇갈린다 어떤 이에게는 영광스러운 사건이 또 어떤 이에게는 똑 같은 사건이라도 욕이될 수 있다.
2)오늘 본문에서 유념해서 살펴볼 사실은 약속된 메시야 왕국의 정통성 문제이다, 사도마태가 기록한 이 복음서에서 그 어떤 내용 보다 먼저 예수의 족보를 소개한 것은 그의 유대인 독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정통성을 확보하려는데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3)그리고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하여 비록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그 족보에 올라가 있음을 증명한다.
4)마태는 이 증명을 위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중에 들어 있는 이해할 수 없는() 4명의 여인을 등장시킨다.즉 그들이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그 족보에 올라간 사실을 끄집어내어 마리아의 합법적 아내됨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혈통적 교만을 지적하는 것이다.

2.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1절)

① 마태가 전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이 합법적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거룩한 씨(the holy seed)라는 것이요(창 12:1)
둘째,다윗에게 약속된 거룩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삼하 7:13; 시 9:7)
② 유대인 독자들은 누구보다도 이 약속을 알고 있었고 믿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약속은 메시아 약속입니다.
③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에 대한 대중적 칭호 였는데 실제로 예수를 진정으로 견한 사람들 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마 9:27에 보면 “ 두 소경이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을때그들의 눈이 밝아졌습 니다.)
④ 비록 예수께서 여인에게서 태어 나셨지만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결혼 함으로서 합법적으로 이 가문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그래서 오늘의 이본문은 요셉이 다윗의 가문 사람임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 그러나 누가복음(눅3:34-38)은 마리아의 족보도 요셉의 가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는-에게서’1)오늘 본문의 병행 구절은 “누구는 누구를 낳고”입니다.(-begot-)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입니다.이것은 족보를 기술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서 남자를 중심으로 이어가는 중요한 계보입니다.
2)그런데 이 병행구절안에 파란을 일으키는 또 다른 병행구절 다섯개를 마태는 소개합니다. 그 다섯개의 병행 구절은 ‘누구는 누구에게서 누구를 낳고“(-begot-by-)입니다. 이렇게 다른 다섯개의 병행 구절을 유심히 살펴봅시다.
-3절/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5절/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5절/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6절/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6절/-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3)위의 족보에 등장하는 네명의 여인과 마리아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이 비밀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이 마태의 의도입니다. 네 여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그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에 들어올 수 없었던 여인들입니다.
첫째,다말, 그녀는 시아버지와 통정한 여인이었습니다.
둘째,라합, 그녀는 여리고성의 호스테스 였습니다.
셋째,룻, 모압여인으로 일찌기 남편을 여위었다가 재혼한 여인이었습니다.
넷째,밧세바,남편 우리야를 배반하고 왕의 품에 안긴 여인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하였던 여인입니다.
4)그들이 예수의 족보에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를 한 가지로 요약한다면 무엇이겟습니까 믿음입니다.(히11:31)
5)그렇습니다.그들은 장차 올 메시아와 메시아 왕국의 백성이 되고자 했던 믿음의 여인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 입니다.

4. 결론과 요약1)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은 유대인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2)또한 우리도 인정 해야만하는 진실, 역사적 진실입니다.
3)우리 또한 이방인이지만 믿음의 여인들처럼, 믿음의 법으로 당당히 이 족보에 들어갈 수 있는자들 입니다.믿기만 하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 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2 수요기도회 말씀자료

요셉과 마리아 (마 1:17-25)

“요셉이 잠을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24절)
 설교 주안점1) 예수께서 성육신 하심에 있어서 충족되어야 할것이 몇 가지 있었다.
독생하신 아들이 여자의 후손으로 탄생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2) 또한 성령으로 잉태되셔야만 한다.
3)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몸을 빌어서 태어나실 것이냐는 것이다.
4)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들의 순종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언제나 이 세상의 역사,구속의 역사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창조된다.

1.서론1)이 세상에는 의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요셉도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19절) 2)그러나 때때로 사람의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그르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의로운 사람이란 말은 영어로(just man)입니다. 그 뜻은 약삭빠르단 말입니다.
-그는 상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앞뒤를 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떠벌리지 않고 조용히 덮어 두기로했던것입니다. 드러내면 마리아는 공중 앞에서 돌에 맞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마음을 돌이켜 정말 마리아와의 결혼을 파기했더라면 이 세상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이어진 오늘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4)그렇습니다. 때로는 사람의 판단이 하나님의 생각과 행동을 그르칠 수 도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생각에 사람의 생각은 정면으로 대치된다고 해야 옳겠지요.

2. 요셉의 회개1)요셉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그 아내를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끔찍한일 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아직도 메시아의 초림을 기다리고 있어야할것 입니다.
2)요셉이 그의 인간적 의로움을 버리고 아내를 영접하였을 때 그는 진정 회개한 것 입니다. 참된 회개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길을 가다가 다시 ‘되돌아선다’ 라는 뜻입니다.

3. 요셉의 예수 영접
1 요셉은 아내 마리아를 영접하였습니다.(24절)
그러나 마리아뿐 아니라 마리아의 태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의까지도 영접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에 기록된 대로, ‘믿는자 곧 영접하는자’가 된 것입니다. 즉 영접하는 그 순간에 영생을 얻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2 요셉이 예수를 믿고 영접하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하였습니다.(24)
계시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입니다.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시는 것이 계시입니다.
요셉의 회개와 믿음은 천사의 계시 때문입니다.
3 그러나 계시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믿고 따르는 문제는 개인의 결정에 달린 문제입니다.(24절)
바로 이 문제에 있어서 인간은 공통적입니다.
계시를 받고 오늘날에는 전도입니다(고전 1:21-24)믿으며 따를 것이냐는 내 개인의 결정 문제 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도 당신들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며 영접할 것인가 아니면 그 계시를 싹 무시해 버릴 것인가 그것은 개개인의 자유입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면 곧 바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4. 결론적으로
1 예수님이 세상에 왔을 때 영접한 사람과 배척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 아담의 혈통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요, 시민으로 새로 태어납니다.(요1:10-12)
2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 세상과 원수 되는 것입니다.
즉각적으로 원수 되어 세상으로 부터는 배척을 당하게 되고 고난이 따릅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예수를 영접하기로 하고 얻게 된 고난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낳기까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오, 주님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찾아 오셔서 죄의 해결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모셔들입니다. 주님만이 구원자이심을 인정합니다. 내속에 오셔서 나를 다스려 주시고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아멘

마태복음 강해3 수요기도회 말씀자료
예수께 경배하자 (마2:1-12)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11절)
설교 주안점

1. 성경은 예수께서 화해의 대사로 오셨다고 소개하고 있다/

2. 즉 우리의 죄로 하나님과 원수된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저주를 내릴 수 밖에 없게 되었는데 예수를 화목케 하는 대사로 보내셔서 우리에게 예수를 따르도록 하셨다.

3.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면 언제나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1. 예수를 배척하여 죽이려는 무리
1 헤롯왕은 자신의 불법성 때문에 의의 왕이신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 (4절)
헤롯왕은 로마 정부에 뇌물을 주고 분봉왕으로 책봉되는데, 그는 불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자였다. 로마는 식민지 정책에 있어 지방 자치제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국민들의 정치적 소요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의 왕위는 다윗가문이 이어야 함이 마땅한데도 불법과 술수로 차지한 것이다. 그는 이 문제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성전을 재건하여 종교심을 유발시켰다.
2 대 제사장은 1년에 한명만이 제비뽑기로 선출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인데 그들은 두명씩 뽑아서 이권을 나누어 가졌다. 그들 역시 메시야의 출현은 반가운 것이 아니라 이 권이 없어지는 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5,6절)
3 서기관들은 말씀을 간직하고 지켜야 할 책무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그들이 내는 십일조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들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의 보다는 사람의 의를 더 중히 여기는 우를 범했다. (5,6절)
4 백성들은 또 백성들대로 소동하기만 했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일에는 둔하였다.(3절)

2. 예수를 영접하고 경배하지 못한 이유
1 우리는 위의 사람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게 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자신의 불법성이 드러날까 함이요. 권세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요3:19)-헤롯왕처럼 자신의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에 진실을 왜곡하기 위해 (교만의 문제)
둘째, 이권이 사라지고 명예를 빼앗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마8:34)-대제사장이라는 명예와 이권이 그들을 파멸케 한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과 그 권위보다 사람의 상식에 더 권위를 두기 때문이다.(눅4:28-29)-하나님의 복음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인 줄 모르고 사람의 상식을 더 우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넷째, 눈이 가리워 졌기 때문이다. (막6:3)-예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좀더 깊이 이해해 보지 못하고 누에 드러나고 본 것만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카테고리가 된 일반적 상식을 뛰어넘지 못한 이유이다.
2 그들은 성경 속에서 예수께서 어디서 태어나실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5,6절)
3 그러나 그들중 아무도 베들레험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가지 않았다.
바울사도가 이러한 인간의 무지를 시편 14편을 인용하여 로마서에 기록해 놓았다. (롬 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고 다 지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 예수를 영접하고 경배하는 무리
1 도대체 그들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1절)
2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서 최종적으로 예수의 약속을 발견하는가 (4-6)
그들이 일반적 계시인 별을 이상히 여겨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것은 고대인들의 사고가 그렇듯이 새로운 별은 귀인이 탄생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중 아무도 그별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것에 비하면 대단한 수고였다. 그 별이 인도할 수 있었던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이었다.(6절)
3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진정한 권위는 기록된 말씀이다. (6절)
귀인이라면 예루살렘에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약속의 책인 성경을 펼쳤을 때 메시야의 약속을 알 수 있었다.
4 그들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기뻐하였다. (10절)
5 그리고 경배하였다. (11절)
6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은혜를 체험했다. (12절)

4. 결론적으로
1 예수를 영접하고 경배할 준비가 늘 되어 있는가
2 예수를 믿고 따르게 하지 못하는 내속의 문제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강해4 수요기도회 말씀자료

예수의 예고된 고난 (마 2:13-23)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14,15절)
설교 주안점

1. 예수의 고난은 탄생때 부터 시작되었다.

2. 그분은 이 세상의 역사와 운명을 전 우주적으로 바꾸어 놓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의당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의 대적이 있을 수 밖에 없다.

4.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사탄의 궤계를 능가하는 것이다.

5. 이때 하나님이 이기시기 위하여는 믿음 있는 순종의 사람이 필요하다.

1. 서론
1 왜 예수는 탄생 시부터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모세를 사용하시기로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을 시기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사단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모세의 탄생을 발해키로 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 세상 임금 노릇을 하고 있는 사단이 그의 범죄를 정당시 할 목적으로 세사의 구원을 방해하려는 공작이다.
3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사단의 궤계보다 항상 한수 위이시다. 결코 그분은 약속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다.

2. 헤롯의 악행
1 헤롯의 범죄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의를 더 내세우는 것이었다.
피조물된 자리를 망각하고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계획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13절 상)
2 그러한 악한 마음은 마음먹는데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대항하는 악행을 저지르데 까지 나아간다. (16절)
3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그 왕께,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심판을 면치 못한다.
그의 사후에 그가 다스리던 땅은 세곳으로 분할통치 되었고 그의 자녀들은 목매어 죽거나 (눅 13:31,23:

7.11)충이 먹어 죽는 비참함을 면치 못했다. (행12:

1.20)

3. 찬양하리로다. 하나님의 지혜여!
1 하나님은 택한자를 지키신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2 하나님은 택한자를 인도하신다. (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3 백성들을 보호하신다. (시57:1)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4 꿈이나 환경,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계시해 주신다.
(13절,19절,22절)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부모들은 보호하시기 위하여 세번이나 꿈으로 지시하셨다. 진실한 성도는 꿈을 통하여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
5 하나님의 구원 사업은 항상 믿음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전개되어 간다. (고전10:13)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은 늘 피할 길을 얻을 수 있었다.)

4. 결론적으로
1 말세가 되면 될수록 사탄의 공격과 궤계는 포악해 질 것이다.
사탄은 몇 사람의 죽음이나 몇 나라의 파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악행을 자행할 수 있다.
범죄자가 형사나 경찰들의 존위망이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더 날 뛰듯이 사탄도 더욱 우리를 인질로 삼고 온갖 술수로 하나님을 대적 할 것이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경건한자. 믿음 있는자는 지키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에 있는자 보다 뛰어 나시기 때문이다.
(벧전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라.”
(벧후 2: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거지시고.......”

본문:눅19:1-10
제목:삭게오야 내려오너라!
주제:헌금
설교목표:잃어버린 상태에서 주님을 만난사람은 주는삶을 갚는삶을 살아야한다.
중심내용:삭게오는 주님을 영접하고 주는자가 되었다
내용요약:삭개오가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실때에 예수님을 보고자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다 그때 예수님이 삭게오야 내려오너라고 하시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즐거워하여 토색한것을 갚되 4배나 갚았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서론.

동물들의 귀소본능

진도개
철새(때가되면 왔던곳으로 되돌아간다.나침판도 레이다도 없이...)
물고기 연어까지도 자기가 태어난곳으로 되돌아옵니다.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컬는 인간은 자기가 왔던곳 그곳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이엄연한 사실을 잊고살아갑니다. 인간타락이란 다른말로하면 잃어버린바 된 상태라고 말할수있겠습니다

잃어버린바된 인간의 상태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린것일까요(롬1:18-32)

1. 내가 왔던곳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귀소본능! 이 귀중한 사실 이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아니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1:2-4)을 통해서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고발하고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못하였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였도다....

2. 내가 누구인가 하는 자기정체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것입니다. 내가 어디서왔고 왜살고있으며, 죽으면다시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간근본문제를 잊고사는것이 바로 잃어버린바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또하나는

제목:믿음의 선한 싸움을 당한 성도
성경:딤전6:11-16

1.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후 지구상엔 전쟁과 싸움이 그친 적이 없었습니다. 적게는 가정불화로부터 크게는 나라와 나라사이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는 항상 싸움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전쟁이나 싸움은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하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폭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켜서 자기 뜻대로 만드는 것이 전쟁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전쟁이나 싸움은 그것 자체가 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얻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을 짓밟고 그것을 얻게된다면 결코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시켜 주지 못하는 법입니다. 실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폭력으로 제압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 중엔 우리를 향해 싸우라는 「싸움」이 있습니다. 싸움 자체가 지니는 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 싸움은 오히려 선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요구하고 있는 "선한 싸움"입니다. 이 세상의 싸움과 믿음의 선한 싸움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 다. 그 중 네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세상의 싸움과 선한 싸움의 다른 점은 싸움의 대상입니다. 세상의 싸움은 그 대상이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부모와 자식까지도 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어 비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싸움의 대상은 우리들 자신이라는 「육신」과 세상의 풍조와 공중권세 잡은 자인 "사단"을 싸움의 대상으로 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싸우고 씨름한 것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계속 사기꾼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굴복한 자로서 살 것인가의 싸움이었습니다. 둘째, 싸움의 목표입니다. 세상싸움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행위입니다. 세상싸움은 명예 물질 또는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죽기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싸움의 목표는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죽이고 쳐서 복종케 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는 세상싸움을 하거나 선한 싸움을 해야 한 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싸워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즉 혈과 육을 위해 싸우든지 혈과 육을 죽이기 위해 싸우든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셋째, 싸움 도구의 차이점입니다. 세상의 싸움은 권모와 술수와 중상 모략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선한 싸움은 믿음이 싸움의 도구입니다. 기도가 도구이며 말씀이 도구입니다. 아무리 권력이 많고 힘이 센 사람도 선한 싸움을 위해서는 겸손히 무릎꿇고 엎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세상의 싸움은 결국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집니다. 싸움에 진 사람은 패배자가 되어 굴욕을 당하고 낙오자가 됩니다. 승리한 자 역시 승리의 기쁨은 잠시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승리자 뒤에는 패배로 인해 울고있는 쓰라림과 비참함이 있고 아무리 화려한 승리라고 해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남의 실패와 패배를 딛고 올라선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싸움에서의 승리는 다릅니다. 거기에는 나 자신만의 승리가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승리가 있고 하나님을 위한 승리가 있습니다. 선한 싸움은 혈과 육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혈과 육을 대적하고 죽이기 위한 싸움입니다. 우리는 어떤 싸움을 할 것인가요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기왕 싸울 바에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원 한승리자가 돼야합니다.

2. 선한 싸움의 목표
싸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 12절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했고 에베소서 6:13에서는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왜 싸워야 합니까 그것은 싸워서 이기고 서기 위해서입니다. 지는 자는 무릎 꿇고 땅에 엎드려야 하지만 이기는 자는 꼿꼿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싸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영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싸우고 이긴 사람은 반드시 전리품을 취하기 마련입니다. 한때 해지는 곳이 없다던 영국이 세계 도처의 영토를 점령하고 식민통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전쟁에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일본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36년 동안 온갖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영적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영생이라는 전리품을 얻게 되지만 이 싸움에서 지면 생명도 빼앗기고 행복도 빼앗기고 노예가 되고 맙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생을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4:24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미루어 마귀가 얼마나 영생을 방해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택하신 자를 미혹한다는 것은 이미 택함 받고 영생 얻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후 발악을 해서 미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생의 방해꾼과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방해하고 교회를 파괴하려는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적진 깊숙이 공을 몰고 들어가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상대편 선수들의 방해를 차단하고 아군을 도와 주는 선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이며 그 영생을 방해하는 원수를 막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군 분투만으로는 안됩니다. 신앙의 전투는 함께 싸워야 합니다. 개인기가 제아무리 뛰어난 선수라고 하더라도 팀워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게임에서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신앙이 제아무리 훌륭하고 강하다고 해도 함께 싸울 줄 모르면 그것은 독불 장군에 불과합니다. 함께 숨쉬고 함께 손잡고 함께 싸우는 협력과 협동이 중요합니다.

3.어떻게 싸워야 합니가
본문 11절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했고 에베소서 6:11에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4-17절을 보면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믿음의 방패를 가지고……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어떤 전략 연구 전문가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병사들의 정신력(사기)과 화력 즉 병기라고 했습니다. 제아무리 최신예 병기와 화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정신 무장이 되어 있지 않으면 이길 수 없고 제아무리 정신 무장이 철저하다고 하더라도 맨주먹으로 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크메르나 월남이 공산화 된 것은 무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정신이 무너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바울이 본문 11절과 에베소서 6:11 이하에서 밝힌 싸움의 방법은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의롭고 경건한 생활을 할 것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서 그 힘으로 싸워 이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와의 싸움에서 지면 나는 다른 사람과 싸울 수 없고 마귀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나자신 입니다. 나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내가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고린도전서 9:27에서 말한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남을 꺾는 것보다 내 고집 꺾기가 더 어렵고 내 버릇 고치기가 더 힘들고 내 마음 다스리기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평천하(平天下)는 수신(修身)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옛말은 옳은 말입니다.

4.그러면 어떻게 나를 이기고 적을 이길 수가 있습니까
싸움의 방법(11절)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의 대상은 마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싸우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을 죄악으로 넘어뜨립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6:11에서 그것을 "마귀의 궤계"라고 했고 6:12을 보면 "혈과 육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싸움의 대상이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중요성은 바울 사도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이 싸움의 구체적인 방법과 승리의 방법들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피할 것과 좇을 것입니다. 내 욕심과 내 정욕과 내 혈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탄의 정체 역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강하게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주경가 베이커는 "사탄은 바로 우리 집안에 우리 자신 곁에 가까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사탄을 지지하는 강한 세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나는 내 힘으로 나를 이길 수 없고 사탄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신 갑주로 무장하라"고 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취하고 승리의 찬송을 부르려면 내가 지금까지 무기로 생각했던 것을, 이것만 있으면 만사가 다 성공이고 형통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일단 벗어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낡고 힘없는 무기는 내려놓고 최신예 무기로 무장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그 능력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귀신 들려 발작하는 젊은이를 장정 여덟 사람이 달려들어 말렸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장로님 한 분이 성경을 손에 들고 그 옆으로 다가가자 귀신 들린 청년은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바로 그 힘으로 우리가 무장해야 선한 싸움에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힘은 곧 하나님의 힘이며 믿음으로 받는 힘인 것입니다. 주여, 나에게 그 힘을 주시옵소서. 싸움에는 대상이 있고, 싸워야 할 이유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싸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 12절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했고 에베소서 6:13에서는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왜 싸워야 합니까 그것은 싸워서 이기고 서기 위해서입니다. 지는 자는 무릎 꿇고 땅에 엎드려야 하지만 이기는 자는 꼿꼿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싸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영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싸우고 이긴 사람은 반드시 전리품을 취하기 마련입니다. 한때 해지는 곳이 없다던 영국이 세계 도처의 영토를 점령하고 식민통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전쟁에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일본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36년 동안 온갖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영적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싸움에서이기면 영생이라는 전리품을 얻게 되지만 이 싸움에서 지면 생명도 빼앗기고 행복도 빼앗기고 노예가 되고 맙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생을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4:24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미루어 마귀가 얼마나 영생을 방해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택하신 자를 미혹한다는 것은 이미 택함 받고 영생 얻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후 발악을 해서 미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생의 방해꾼과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방해하고 교회를 파괴하려는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이며 그 영생을 방해하는 원수를 막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군분투 만으로는 안됩니다. 신앙의 전투는 함께 싸워야 합니다. 개인기가 제아무리 뛰어난 선수라고 하더라도 팀워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게임에서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신앙이 제아무리 훌륭하고 강하다고 해도 함께 싸울 줄 모르면 그것은 독불장군에 불과합니다. 함께 숨쉬고 함께 손잡고 함께 싸우는 협력과 협동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전투는 전 교회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5.믿음의 선한 싸움은 영생을 누릴 때까지입니다.
취해야 할 이것이 바로 영생인데 이 땅에서 실컷 수고해놓고 영생을 얻지 못하면 정말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론 이것은 우리가 이미 얻은 영생이 취소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이미 얻었다고 여기지 말고 더욱 푯대를 향하여 전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취하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얻거나 소유한다는 의미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영생을 견고하게 붙잡고 누리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싸워서 얻고 그 얻은 영생을 누리고 즐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이 명령을 지켜야한다"고 1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신앙적 열심과 순수성이 한 순간에 그쳐서는 안되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즉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로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열심과 순수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삶에 대한 판단은 마지막 날에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당하여 피할 것은 피하고 좇을 것은 좇으면서 최후 승리를 맞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특권적 신분을 각 성시키고 거룩한 사명을 일깨워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한 증거를 설파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마음의 귀를 기울여 이 부르심을 들으며 항상 새로워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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