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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애굽에 가다 (창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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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강권하심 속에 가나안에 마침내 들어온 아브라함은 잠시 지내다가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간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것은 신앙의 타락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믿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이 출발지점에 있어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여러 정황들을 가지고 설명을 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없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애굽에 내려갔던 이 사건을, 만일 우리가 전제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이미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은 타락이 된다. 그러면 결론은 분명해 진다. “보라, 그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애굽에 내려가자 그가 거기서 어떤 수치를 당했는가!” 말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애굽으로 내려가 아내를 빼앗길 뻔했던 사건은 해석에 어려움이 뒤따른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떠밀어서 가나안까지 들여 보내놓고 그 시점에서 기근을 보내어 그를 애굽으로 몰아내시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추적해 보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애굽으로 내어 쫓으실까 하는 문제,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해 놓고 당한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첫째는 애굽에 내려간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의 꾸짖음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의 꾸짖음이 없다. 꾸중은 창세기 17장에서 처음 나온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창 17:1-2)”
하나님이 이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땅에 엎드린다.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어떤 의미로는 최초이자 마지막 듣는 꾸중이다. 왜 이것이 꾸중이 되는가 16:15 이하를 보자. 그가 86세 때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가 자기 뜻대로 시작해 놓은 역사를 하나님은 17장에서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라는 나이로부터 새롭게 출발시키신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시점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하는 것은 이것이다.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 15:1-4)”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참고 기다리지 못했다.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고 후사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거기에 대한 꾸중을 17장에서 이렇게 상징적으로 하신다. 그가 이스마엘을 얻은 나아가 팔십 육세인데 이걸 꾸짖으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 구세에 나타나신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유일하게 하나님만 믿고 떠나왔다. 그런데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13년을 침묵해 버리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꾸중이라는 것을 17장에서 여러가지로 나타난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왜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는 뜻이다. 그리고 드디어 명령하신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러나 이 앞에 오늘 우리가 읽은 12장 마지막에 있는 애굽에 내려간 사건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꾸짖음이 없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적 작품이다. 애굽을 다녀온 것으로 아브라함이 어떻게 변했는가 아브라함은 그 이후에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결단을 내린다. 하나는 롯과 헤어지는 것이고 둘째는 가나안 전쟁 속에 그가 감히 끼어드는 담대함이다.
롯과 헤어졌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 그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때는 혼자 나오지 못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나오면서 조카까지 끌고 나와야 했던 상황 배경을 설명했다. 자기 목숨을 자기 힘으로 밖에 지킬 수 없는 때였기 때문이다. 애굽에 내려가면서 사라를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말할만큼 살벌한 시대이다. 재물이 많고 쓸만한 물건이 많으면 언제, 누구에게 죽을지 모르는 때였다. 자기네와 혈연관계가 없고 안면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 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되는 시대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왕과 싸우니라(창 14:1-2)”
한쪽은 네 왕이 연합했고, 한쪽은 다섯이 연합하여 싸운다.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자기 목숨 하나도 버티고 있기가 바쁜 상황이다. 이 와중에 자기 조카 롯이 잡혀 가자 집에서 길러온 하인 318명을 데리고 가서 싸워 조카를 구출해 온다.그는 이제 과거의 그가 아닌 것이다. 이 배짱은 애굽에서 생긴 것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서 떠밀려 왔다. 이제는 그분 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기근이 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이 기근 속에서라도 나를 먹이실 수 있는 분이라는 그 수준까지 와 있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아주 자연스럽게 물이 있고, 자기 양떼를 먹일 수 있는 곳,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갔다. 가면서 생각하니까 아내가 걱정이었다. 너무 예쁘니까 아내를 빼앗고 자기를 죽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당신이 나의 누이동생이라고 하자’짜고 내려간다. 가서 아내를 빼앗겼는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육축을 얻어 부자가 되어 되돌아 왔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회개한 장면이 없다. 왜 이는 아브라함의 잘못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로가 회개하였다. 바로는 그 시대 전 세계문명의 최고 통치자였다. 그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하나를 빼앗은 것 때문에 밤새도록 혼이 나고 회개하였다. 바로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다 데리고 가라” 하면서 금은보화까지 얹어 주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이것은 우리를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의 열심이다. 믿음은 인격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설득이다.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이 심으시고, 키우시고, 열매 맺으셔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훈련을 받는다. 바로가 얻어 터짐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에 드디어 눈을 뜨게 된다. 그래서 롯과 헤어지는 결정을 내린다. 싸움터에도 나가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란생활과 애굽생활을 허락하신다. 가야 되지 않을 곳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틀림없이 간섭하고 계신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러나 그 수준에 이르지 않은 사람에게 심지도 않고 거두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희망에 많은 전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라. 이것이 겸손이다. 우리에게는 성장을 위해 차근차근 한계단씩 올라가는 지속성이 없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훈련을 시키고자 하는지, 어느 누구를 취하시려는지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경청하는 것이 없다. 의욕만 충만하다. 그러나 의욕만으로는 일이 되지 않는다. 균형이 무너진다. 의욕이 없으면 죽은 자이다. 그러나 그 의욕은 잘 다스려야 한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삭을 요구받지 않았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애 맨 마지막에 요구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다. 그래서 힘을 내야 한다. 우리가 혹시 애굽에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직접 경험시켜 주시기 보다는 옆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실지도 모른다. 말씀에 의지하여 참으로 힘차게 사는 바로 우리 옆의 믿음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도전을 주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을 믿지않고 도망갔다가 뼈가 부러져 온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다.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쉽게 넘겨버려서는 안된다. 그가 바로왕이다. 우리는 그 옆에 서 있는 아브라함이다. 무릇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가 살아계셔서 우리를 설득하고 계시며 완성하고 계신다. 이것 외에 아무 말도 필요치 않은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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