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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 할례 (창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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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과는 달리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이 어떤 상징이다. 야곱에게는 사닥다리로 위에 계신 분으로, 모세에게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로, 또 엘리야에게는 세미한 음성으로, 욥에게는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다. 나타나시는 모습 하나 하나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상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본문은 좀 다르다. 하나님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굳이 밝히시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난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렸다.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요 네 방패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되리라”하셨다. 그런데 16장 15절을 보면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라함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17장은 ‘아브라함의 구십 구세 때에’라고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이 좋지 않게 여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에는 하나님의 책망이 없다. 그러나 15장을 통과하고 난 이후에는 그의 잘못을 꾸짖으신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 말씀 하나만으로도 아브라함은 할말이 없다. “지금까지 경험을 통하여 깨닫게 한 나의 능력을 알고도 기다리지 못했느냐” 그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린다. 16장에서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17장에서 99세에 다시 나타나시기까지 하나님은 13년간 침묵하셨다. 대단한 책망이 아닐 수 없다. 그 뒤에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않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17:5)”
하나님은 이름을 바꿔 주셨다. 이 이름을 달고 다니면서 아브라함은 이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옛 상처가 쑤셔 올 것이다. 자신은 결코 이 이름으로 불릴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사실로도 그렇고 또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이 없는데 열국의 아비이다. 후에 하나님은 아들 하나 밖에 주시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열국의 아비’이다. 얼마나 이 이름이 갖는 상징이 놀라운가
우리는 죽어 마땅한 자들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야할 십자가가 아니고 우리가 달려야할 십자가 앞에 부름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에 내가 달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달리시고 우리는 내 잘못을 인하여 잘못을 지적받는 자리에 은혜가 있다. 아브라함이라고 지적을 받는 이 꾸짖음과 가장 상처 많은 사건 속에서도 떨어진 축복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가장 좌절된 실패와 수치로 범벅이 된 상황야말로 축복의 創始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잘못한, 도저히 그분을 뵐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자리에서 그의 꾸짖음이 우리에게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 믿는 자에게 은혜로운 것은 더 없다.
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명령하신다.
할례받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15장을 살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가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이렇게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그때에 하나님은 “너는 이러한 제물들을 갔다 놓고 반을 쪼개 놓아라”하셨다. 그래서 새만 제외한 나머지 제물들을 쪼개어 마주 대해 놓고 그는 기다렸다. 해질 때에 연기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다. 두 제물을 가져다 놓고 반을 쪼개서 마주 보게 해놓고 계약 당사자들이 그 사이로 지나간다. 지나간다는 것은 쪼개진 틈이 한오라기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완전히 쪼개진 것이다. 두 계약 당사자가 다 지나가게 되어어 있다. 이 예식은 약속은 어긴은 자는 ‘이와 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한군 데도 붙어 있지 않고 완벽하게 쪼개져 마땅하다는 저주의 약속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같이 지나가자’가 아니라 ‘하나님만 지나가신다’ 아브라함을 아브라함되게 하고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는 일은 아브라함의 어떤 조건이나 원인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완성하실 하나님만의 일이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표로써 그가 홀로 지나가신다. 이 예식을 보아놓고도 16장에서 아브라함이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그를 꾸짖는다. 이제는 언약이 깨졌다 말씀하지 않으셨다. “약속한 것을 내가 이루고야 말겠다. 너는 그것을 인식해야할 내 자녀이다. 그런데 너는 나를 믿지 않고 다른 길로 갔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네게 새롭게 명하노니 너는 네 집안 식구 모두와 함께 할례를 받으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잔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0-14)
왜 할례를 받도록 하셨는가
“너희가 그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23-25)”
여기에서 할례는 거룩함으로 연결되고 있다. 골로새서 2장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할례받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너희가 무할례로 죽은 자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할례를 원문에서 찾아 보면 그 의미가 “잘라 버린다”이다. 그것은 지체의 일부를 끊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할례는 생식기를 잘라낸다는 뜻이다. 더 이상 육체적인 종족보존 능력을 갖지 못한 자라는 뜻이다. 할례는 우리가 육체적 종족이 아니라 다른 힘으로 태어난 별개의 인종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의 몸에서 날 자’에 대한 인간적인 회의를 극복시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깊이 확인시키려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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