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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십자가 (롬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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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는 죄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사랑과 복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장 많이 언급하고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죄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자체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에 맨 처음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했던 것이 죄의 문제였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히브리서 9:22에서는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도 그 용서가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언급되지 않고 죄값을 치르는 방법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세워 적당하게 지나가고자 한다. 이것은 성경과는 거리가 먼 생각이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
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5-6)”
하나님은 사랑이시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어두움 가운데서 빠져 나오는 일이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사랑의 하나님과는 관계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어두움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꺼내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
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
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
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
18-21)”
예수님은 스스로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두움 속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그 사랑의 관계를 유지키 위해 먼저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건져 내셔야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역사상 큰 부흥의 때나,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은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 언제나 그들에게는 죄에 대한 심각한 통회가 있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은 그 죄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늘 비례한다. 죄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가 깊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더욱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시며, 결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 죄를 간과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이전에 그가 얼마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며, 또한 반드시 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으시는 분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또 기억해야 될 것은 죄는 결코 그 본질 면에서 약해지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시간이 흐른다 해서 절대 양보하지 않으신다. 예나 지금이나 죄에 대해서는 절대 용서하지 않으신다.
요즈음 우리의 신앙상태를 보면 죄에 대한 무서움에서 점점 그 생각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에서 제일 강하게 유혹받는 것이 있다면 아마 죄의 무서움에 대하여 점점 잊도록 요구받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마찬가지로 바로 우리가 짓는 그 무서운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꼭 대가를 요구하시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으신다. 다만 그 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변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
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했다. 피는 죽음을 말한다. 죄값으로 흘리는 피로 말미암아 죄는 그 댓가를 치름으로써 깨끗케 되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셔서 그냥 우리의 죄를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죄 가운데서 죄의 형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구해 주신 것이 은혜이지 그냥 간과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
졌느니라(엡 2:13)”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화목을 위해서 피가 있어야 한다. 즉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은 ‘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죄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심각성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신앙의 그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 문제의 심각성을 신앙의 뿌리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 더 성숙할 수 없다.
성경에서는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의 죄를 말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좇아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한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그 어떤 생각이나 사건이 다 죄라고 정의 하고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
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우리는 더러 모르고도 죄를 짓는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범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죄라는 뿌리에서부터 나온 열매라고 말한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죄 뿐이다. 열매가 크냐 작으냐 관계없이 다 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나타나는 모든 죄악된 현상들은 그 뿌리로부터 기인한 부산물들이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늘 우리 속에 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그로 인하여 내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
와 훼방이니(마 15:19)”
우리가 죄인이요, 죄의 뿌리를 갖고 있고 우리 속은 늘 악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언제나 본능적으로 튀어 나오는 죄에 대한 생각들이 있는 한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열매 맺지 않는다고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세상과 단절된 수도생활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 그가 무지했으며, 환경이 좋지 않았으며, 가정환경이나, 주위의 환경 때문에 그의 심리상태가 좋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죄인이었기 때문에 생각이 근본적으로 악하므로 죄를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그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것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 죄를 지었으므로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린애가 모르고 독약을 먹어도 죽는다. 모르고 죄를 지어도 죄의 댓가는 반드시 치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자라 할지라도 죄값을 치르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
이니라(롬 6:23)”
여기에서 언급하는 시제는 다 현재형이다. 죄의 삯은 지금 사망이고,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지금 영생이다. 신자의 삶에 있어 죄를 짓지 아니 하려는 노력은 하루 하루 매 순간 순간 현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갖는 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렇게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와 함께 하는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지은 죄에 대한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이 여기에 있어서는 구원얻는 문제가 아니라 신자들이 그들의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위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자범죄에 대하여는 계속 발을 씻어야 한다.
이와같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 그것에 대한 자백을 요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씻겨 주시고, 다음 관계를 유지하신다.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 제물로 가져 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그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아 속죄제를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를 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취한
것 같이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의 범한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4:32-35)”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
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
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히 9:1-5)”
언약궤 속에 담겨 있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첫째 만나를 살펴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할 때에 만나를 내려 주셨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먹을 것이 없어서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셨을 때 배부른 뒤에는 잘 믿었는가 그렇지 않다.
둘째 민수기 16장,17장에서 아론의 싹난 지팡이 사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 외에 우리도 제사를 지낼 자격이 있다고 향로를 들고 나오다가 불타 죽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다시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반항하자 지진이 나서 그들을 삼켜 버렸다. 모세와 아론의 지도권을 증명하기 위하여 장막 안에 족장들의 지팡이를 가져다 두었는데 아론의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
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
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민 17:10)”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자들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려고 그 지팡이를 보존케 하시는 것이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자들의 죄를 지적하시는 것이다.
세째는 언약의 비석이다. 첫번째 돌판은 깨어지고 이 십계명 돌판은 두 번째 돌판이다. 출애굽기 32:15-19을 보면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려 버렸다. 언약궤 안에 있는 증거의 비석은 그것이 두번째 것이라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다.
언약궤 안에 있는 세 가지 물건은 하나같이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것들이다. 이 언약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위를 덮는 그룹(천사)가 있다. 일년에 한번씩 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릴 때면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이곳에 부음으로써 속죄소를 덮는 것이다. 언약궤 속에 있는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이 이 피로 인하여 덮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이 세 가지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칼로 찌를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그 찌른 칼에 의하여 흐르는 피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값을 분명히 요구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 그 대가로 우리를 살린 것이다. 피로 말미암아 죄를 덮었다는 것은 직접 나를 찌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죄를 덮었으며 간과하셨다는 것이지 죄를 그냥 넘어가셨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흘린 피가 우리의 죄를 덮을 수 있는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고 피흘려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지시고, 죄값을 치르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죽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값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죄라는 문제를 가장 중요한 근거로써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결국 죄에 대하여 내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는 것이며, 매일의 생활에서 얼마만큼 죄와의 투쟁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느냐로 결론되어진다. 복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 앞에 우리의 죄에 대한 처절하고 심각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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