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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 있는 인생 (요 10: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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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그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0장 까지가 제 1부 이고, 11-마지막까지가 제2부가 됩니다. 제1부는 예수님께서 바로 유대인들에게 약 속되었던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며, 아울러 속죄양으로 오실 수 밖에 없는 것을 증명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장-마지막 부분은 이제 예수께서 속죄양으로 죽으시는 내 용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3공관 복음서처럼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여 기록한 것이 아 니라, 따로 메시지별로 사건들을 시간적인 순서를 무시하고 묶어서 기록하고 있음 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요한복음에 있어서도 1-10장까지 이르는데 대략 2가지의 굵은 흐름이 있습니다.

그 첫번째 흐름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를 배 척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제시하시고 진리를 선포하시고 그것을 옳다 는 것을 아무리 이야기 해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같은 사실에 이어 서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내가 죽을 수 밖에 없구나! 너희 중에 아무도 스스로 구원받을 자가 없느니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굵은 흐름은 첫번째 것의 부수적인 결과입니다. 즉 '그러나,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생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번째 내용은 첫번째 흐름을 파악하지 않고 이해하면 오해하게 될 위험의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인생이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첫번째의 흐름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두 번째 말씀만 붙잡게 되면 구원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론>

요한복음 10장의 끝부분에 이상한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40절을 보시겠습니 다.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 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 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예수님께서 돌이켜 가신 곳이 어디입니까 요단 저편 세례 주던 곳입니다. 요한복 음은 세례요한부터 시작을 합니다. 세례요한이 왜 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빛에 대 하여 증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이런 유명한 선언이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우리가 듣고 그것을 내가 선택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부분은 결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죄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셨지, 우리에게 도를 전달 하러 오신 분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도를 전하고 가르치고 우리의 반응과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러 온 분이 아니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러 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가르치신 것을 붙잡고 그것으로 결단하고 영접하는 싸움이 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뜻밖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 도에 관하여 세례 요한이 맨 처음으로 증거할 때 뭐라고 하였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의 이 선언 이후부터 10장에 이르도록 증거하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 서 복음과 생명과 진리를 펼쳐보이고 기적을 통해서 그것을 증거했어도 아무도 듣 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듣을 수 없 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아셨기에 세상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 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인간쪽에서는 도무지 구원을 위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이 스라엘백성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달리 하나님께 귀여움을 받는 백성 이었기에 선택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를 대신하여 한 샘플로 채취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그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기적으로 간섭하시며 하나님 앞에 올 것을 제시하시지만 인간은 그럴 능력이 없다 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그 역사를 펼치십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출애굽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냅니다. 열 가지 죄앙을 보임으로써 애굽 관리들이 그들을 놓아줄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봅니다. 그러 나 우리가 잘 아는대로 출애굽 사건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한 것보다 불평한 것이 언제나 많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홍해 앞에 서자 뭐라고 합니까 기껏 우리를 애굽에서 끄집어 내어 홍해에서 죽이려고 끌고 나왔느냐는 원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홍해 바다 사이에 길을 내서 그들이 걷게했습니다.

그리고 또 조금 있다가 이제는 먹을 것이 없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먹고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세가 시내산 에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서 내려오지를 않자 백성들이 기다리다 지쳐 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에다 무슨 이름을 붙인지 아십니까 이 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처구 니 없는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많은 기적과 간섭을 체험하고서 그들 이 느낀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운에 불 과한 일이었다는 정도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는지 놀랍지 않습니 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우리를 구약식으로 간 섭해 주신다면 난 언제든지 항복하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여러분이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왜 여러분이 쉽게 생각하느냐 하면 지금 여러분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 분에게 왜 믿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나중에 성경 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내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 스도를 보내사 내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게 하셨으므로 내가 거듭나게 되었구나. 그 래서 내가 하나님을 아는구나 라고 알게 된 것이지 그 왜 자체가 우리에게 있거나 경험되게 되어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구원 얻었기 때문에 나타 난 사건들이 있습니다. 회개가 있고,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 나 그것마저도 결과이지 원인이나 근거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이 문제에 있어서 걸립니다. 이렇게 질문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 리도 중요하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신 자가 자신이 가진 어떤 지혜나 결단이나 감정을 근거로 신앙을 쌓고 있는 분은 자 신이 흔들리면 하나님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기분이 침체되면 하나님도 그 날은 침체되었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신앙을 자 기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인양 착각하는 자리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힘을 잃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즉 기독 교를 자신의 역량 위에다 세워놓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 나님이어야 할 자리가 자신이 서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실패하는 날에도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괜챦고, 나는 넘어져도 하나님은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기쁘고 감 사할 수 있는 그러한 반석 위에 서 있는 담대함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바로 이 싸 움이 요한복음 1장에서 10장에 적나라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 되어 있으면, 구원 이후에 그 다 음부터 쌓아가야 하는 성숙의 과정에서도 그 기초가 여러분 자신이 되기가 쉽습니 다. 성숙의 기초가 자기자신이었을 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만세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 에 쌓아야 합니다. 다시말해 은혜 위에 나의 신앙의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 다.

요한복음 10장까지의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세례 요한이 등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본문 10:22-24절을 보시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 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 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유대인들이 와서 예수님께 '당신이 그리스도가 맞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믿겠다 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한 지 오래되었지만 이제 분명한 근거를 잡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가 지신을 메시야라고 그랬다. 그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죽이는 것은 당연하다'하는 확실한 근거를 잡아 내기 위해서 자꾸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어떠한 배경 속에 그림처럼 그려져 있는가를 보십시오. 본문 22절에서 수전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수전절은 헌신절(the Feast of the Dedication)입니다. 기원전 160년대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이끄는 이방나라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집니 다. 그것을 마카비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성전을 다시 짓시 위해 12월 중에 일 주일 동안을 이 헌신절로 만들어 민족의 절기로 정하여 성전을 새로 짓고 또 지은 성전 을 보수해 나가는 데 쓰기 위한 헌신의 절기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절기에 예수 님게서 솔로몬의 행각에 계셨던 것입니다.(23절) 성전 안은 여러 구획으로 되어 있는데 맨 바깥 벽이 있고, 그 안에 또 벽이 있고 또 있고 해서 들어가는데 겹겹이 담이 있습니다. 맨 바깥쪽에 들어갈 수 있는 대상 은 이방인 모두입니다.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이곳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합니다. 그 이방인의 뜰 한 단계 앞에는 이방인은 못 들 어 가고 유대인 여자들만 들어가는 여인의 뜰이있습니다. 또 하나 더 들어간 곳은 이스라엘의 뜰이 있고 그 안 쪽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가는 곳인 제사장의 뜰이 있습 니다. 제사장의 뜰 안 쪽에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못들어 가는 곳입니다. 일년에 한번씩 대 제사장이 양의 피를 가지고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속 죄 제사를 위하여 들어가는 제일 거룩한 곳입니다.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 하면 맨 바깥뜰로서 누구나 올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 있는 곳이 었습니다. 성전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경배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의 뜰에도 못들 어가고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유대인들에게 힐문을 당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요 1-10장까지의 결론을 짓는 광경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디로 되돌아가십니까 요단 저편 즉 세례요한 이 처음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십니다. 지리적으로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요단 저 편이면 어디입니까 이스라엘은 위로는 갈릴리 바다, 밑으로는 사해 바다, 가운데 왼쪽은 지중해, 오른 쪽은 요단강으로 에워싸인 나라입니다. 요단 저편이라 하면 이스라엘 국경 밖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밖으로 나가셔야만 되 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었을 암시하는 것입니까 유대인이라는 것이 구원의 조건 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인류 전체의 대표였던 유대인이 그 본성으로나 율법으로나 도무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이 사역을 회피하시거나 끝맺거나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님은 이제 처음부터 약속하신 대로 죽으실 것입니다. 10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 결 론으로서 언급한 10:41절을 살펴보십시다.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 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결론적으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한 것이 다 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요한복음 서두에서부터 뭐라고 증 거하고 있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요1:1-11절을 읽어 보십시다.

"태초에 말슴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이시니라.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 였고 자기 당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사도 요한이 이 글을 쓸 때에 이제부터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행하시게 될 그 모든 일들을 다 알고계신다는 전제하에서 서론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처음 부터 십자가를 염두에 두셨던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먼저 알리기 위하여 세례요 한을 앞세웠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 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위한 하나 님의 대속의 어린 양으로서 오셨다는 사실을 요1-10장에 걸쳐서 계속해서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니고데모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3:5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또한,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통해서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과 진리와 생명에 대 해서 알고 싶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요5:42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새삼스럽게 알았다는 뜻입니까 이미 알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같은 사실들을 드러내는 사건인 것입니다.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6장에서 무슨 사건이 나옵니까 오병이어의 사건이 나옵니다. 무었때문에 예 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먹이시는 사건 을 일으키셨습니까 그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몸을 주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 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 오는 것을 보고 뭐라고 지 적하셨습니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 른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는 이어 책망이나 저주의 말씀이 나 올법도 한데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희는 다 죄인이다. 너희는 나를 모른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구하겠다!'고 하십니 다. 바로 이 부분을 분명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이 기록된 것입니다. 본문 요10:27-28절을 살표보십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 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 가 없느니라" 여기서 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전에는 두 가지 사 건을 먼저 확인하고서 주어야합니다. 그것은 곧 선택과 예정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이야기 할 때마다 선택과 예정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과 선택은 어떤 사 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버렸는가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우리의 조건과 우리의 근거로서는 시작이 될 수 없고, 오 직 하나님쪽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도 그 구원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드디어 어느날 확인하는 날이 옵니다. '내가 진짜 구원을 받았구나!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 시구나. 이렇게 간섭하시구나!'하는 감격이 있습니다. 이러한 확인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여러분의 시작이 아닙니다. 훨씬 그 이전에 이미 우리의 구원 시작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잘해야겠구나라고 언제 철이듭니까 꼭 돌 아가신 다음에야 그런 느낌이 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때에는 무슨 말을 하 든지 안 하든지 괜챦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섰습니다. 돌아가신 부모 님에 대하여 진정 마음으로 회개하는 글이었습니다. 뒷 부분에 이렇게 섰습니다.

"내가 이 회개를 쓰는 데 있어서 나를 이 순간 까지도 괴롭히는 것은 내가 부모님 께 못되게 놀았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후회하면서도 그럼 '지금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잘 하였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네'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기 때문 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께 제대로 효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말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선을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도무지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효도라는 것이 어느 때에만 논란이 되느냐 하면 누구를 정죄할 때에만 거론되는 것입니다. "불효 막심한 자!"라고 몰아쳤지만, 한 사람도 제대로 부모에게 효자 효녀노릇을 한 적이 없는 것이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모습입 니다.

요한복음 10장이 어떻게 끝을 맺고 있습니까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 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선한 목 자의 덕택에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사실을 자꾸만 거 듭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근거로서 아무리 자신을 들여다 보아도 여러분은 뽐낼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늘 확인하셔야 하게 때문입니다 그 확인이 여러분을 아직도 절망과 자포자기로 끌고 간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기독 교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내가 이 꼴이기 때문에 주께서 나를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믿는 종교입 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는 그 어느 것으로도 방법이 없으며 희망이 없었는데 그 리스도께서 죽으시는 방법만이 나를 유일하게 생명과 소망을 주는 구원이 됨을 알 므로서 힘과 위로가 넘치게 되는 종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자랑할 것이 있으십니 까 가독교인은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열하고 자랑할 것이 있 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었이 아쉽고 답답해서 여 러분에게 십일조를 요구하시며, 헌신을 요구하시며, 여러분의 지혜를 요구하시겠습 니까 결코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들이 모여서 그의 열심을 모으고 그의 정성을 모아서 무었을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란 하나님께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 고 은혜를 체험케하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만이 그 갈급함이 채워질 줄로 알고 모여드는 자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이 오늘도 스스로를 쳐다볼 때에 불만과 불안과 낙심과 절망이 있습니까 그 렇습니다. 꼭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누구도 자기를 근거로 해서 사는 이가 없습니다. 만유의 주재 되시며 우리 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그를 힘입어 존재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분명 히 약속하시기를 본문 요10:28-2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 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 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여러분의 절망과 여러분의 어리석음과 여러분의 실패가 여러분의 구원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낙심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낙심하시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이 실패하면 하나님도 실패한다는 신앙은 없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하는 말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척량할 구 없는 엄청난 사랑과 은혜가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나의 이 구원은 결코 포기되지 않는 구원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제1부라고 할 수 있는 1-10장까지의 결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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