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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요 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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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일 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 동안에 가능한 대부분의 행적과 이적들을 숨기시는 방향 으로 일하시곤 하셨습니다. 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고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것을 주의를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시고도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감 추고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갔다 내려오셨을 때에도 변 화 산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남들에게 알리지 말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것입니 다. 이처럼 인자가 영광을 얻으시기까지는 이 모든 일들을 감추도록 지시하셨던 것 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에서는 특별히 공개적 으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을 뿐 아니라, 여기 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론>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에 언제나 등장하는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 복음서에서도 증거한 바와 같이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이 미리 예언하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의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사건도 이같은 두 가지 원리에서 벗어 나 있지 않는 사건입니다. 더우기 16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 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성의 입성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사 건입니다. 사복음서에 다 기록될 만큼 이 사건은 중요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 다. 그리고 이 사건은 구약의 단9:24절에 있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주전53 8년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패망하여 시드기 야 왕을 마지막 왕으로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맙니다. 유대 민족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로 붙잡혀 갔습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에서도 여러 변화를 겪게됩니다. 바벨론 이 페르시야에게 망하고 또 페르시야는 그리이스에게 망합니다. 그리고 그리이스는 알렉산더에게 망하게 됩니다. 방금 읽은 이 말씀이 기록된 때는 바벨론에서 페르시 야로 넘어가는 때로서 다니엘이 이스라엘의 포로 기간이 70년 만에 마치리라는 예 레미야의 예언을 읽고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서 기도하고 있는 다니엘에게 장차 있을 일들을 나타내시는 큰 계시를 가브리엘 천 사를 통해서 주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에서 앞으로 칠십 이레 동안에 일어날 일들을 다니엘에게 예언하고 계시한 것이었습니다. 이레라는 말은 우리의 칠(칠)입니다. 그래서 '칠십 이레'면 '칠의 칠십배'라는 말입니다. 즉 490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90년 동안에 일어날 일 중 에 단9:25절을 보면 그 사건들이 조금씩 나누어 집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 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를 합해서 모두 몇 이레입니까 69 이레가 됩니다. 햇수 로 계산하면 483년입니다. 그 동안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 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 하고, 그리이 스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입니다. 메시야와 그리스도를 우리 말로 번역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름을 부 어서 세우는 직분은 세가지밖에 없습니다. 왕이 될 때 왕에게 기름을 붓고, 또한 선지자의 직분을 세울 때도 기름을 붓고, 제사장이 될 때에 기름을 붓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표시입니다. 다시말해 공식적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일 을 맡은 자라는 뜻입니다. 왕도 그렇고, 제사장도 그렇고 선지자도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상징들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대제사장이셨고, 선지자시고, 왕이십니다. 바로 이 그리스 도가 세상에 오시기까지 483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69 이레라고 하지 않고,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로 나누었느냐 하면 거기에는 처음 일곱이레와 육 십 이 이레와의 사이에 차이가 나는 사건의 어떤 구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단9:2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때 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이 복구되는 것이 앞에 일곱 이레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 예루살렘 성이 중건된 육십 이 이레 후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이 세상에 와서는 또한 끊어져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끊어진다는 말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자기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기름부음을 받은자 가 자살을 하거나 병들어 죽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어떤 힘에 의해서 죽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이야기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살펴볼 것은 그 햇수가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대 해서 조금 이해가 있다면 이 문제를 구별할 줄 아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을 복구하는 것이 먼저 허락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는 것이 허락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로부터 그 일을 합니까 느헤미야가 포로에서 귀환하여 맨 먼저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제 2대 왕인 고레스의 허락으로 이스라엘은 종교의 자유를 얻고서 동시에 성전을 지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성전을 짓는 것만 허락된 것이지 그 백성들을 그 지배로부터 놓아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시말해 성전만 짓도록 허락된 것이지 성을 다시 짓도록은 허락되 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게 되는 것은 곧 독립이 허락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독립은 훨신 뒤에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586년에 망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시를 받은 때는 기원전 538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것은 기원 후 30년경 입니다. 예수님이 대략 33세 때입니다. 그러 나 다니엘서 에서는 483년을 말하고 있으므로 아직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느헤미야 1:1-4절과 느2:1-9절을 보시겠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전 건 축에 대하여 허락받은 내용이 나타납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기스르월에 내가 수 산 궁에 있더니 나의 한 형제 중 하나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 으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어서 2:1-9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 니산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 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군대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 와 하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저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 였더니"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허락이 이 때에 처음으로 내려진 것입니다. 즉 앞 의 단9:24절 이하의 그 69 이레의 기준이 방금 읽은 느헤미아 2장의 아닥사스다 왕 20년이 되는 것입니다. 곧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이 내린 것입니다. 아닥 사스다 왕 20년이 기원전 몇 년이냐 하는 것은 성경 학자들이 조사한 것이 아니라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조사되었는데 학자마다 약 10년간의 차이가 납니다. 아닥사스 다 왕 20년이 기원전 455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와, 445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 두 부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455년이라고 본다면 거기다가 69이레인 483년을 더하면 기원후 28년이 되고, 445년을 기준으로하여 따지면 38년이 됩니다. 예수님 께서 지금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때를 33세 쯤으로 보면 플 러스 마이너스 약 5년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맞아 떨어 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고학이 불확실합니까 성경이 불확실합니까 고 고학쪽 입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이 있은 그 날을 기준으로 하여 483년이 지나서 주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성의 입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또하나 확실한 그 증거가 있습니다. 느헤미야 2:1절에 보면 '아닥사스다왕 20년 니산월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니산월이란 바벨론 식의 달 이름입니다. 이 니산월이 유다 달력으로는 정월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쓰 는 지금의 달력으로는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입니다. 이 때가 바로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절기가 있는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 날이 들어있 는 달을 그들의 정월달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사건을 요한복음 12장의 초두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기 위 하여 베다니를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레 향유 를 붓고 머리털로 씻는 사건이 있은 다음에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 성의 마지막 입 성 사건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사건 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이 있은지 꼭 483년 만에 일어나는 사건임을 그 달 까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사건인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하시는 행적들을 다 감추시면서 왜 이 사건은 공개하셨 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좀 더 깊은 의문으로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시다시 피 인생과 인류의 전 역사를 알아 맞추시는 분이 아니라, 만드시는 분이시요 계획 하시고 실천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먼저 우리가 확인하고 지나가야만 이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다니엘 9장에서 다니엘이 받은 이 계시 중에서 칠십 이레라는 그 기한에는 상당히 중요한 멧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계시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기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벨론 포로 생 활이 70년 만에 마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깨닫고 기도하다가 칠십이라는 공통 적인 내용들로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70년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25:8절을 보시겠습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또한 이어서 10-11절을 보시면;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 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는 절기 중에서 많은 절기가 7자와 연결됩니다. 안식일 이 제 7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지키는 주일은 안식 후 첫날입니다. 내용과 사상은 그대로 연결되었으나, 날짜 자체는 안식후 첫 날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칠일 안식일을 지키도록 되어 있었고, 칠년째 되는 해는 안식년으로 지켰으며, 또한 7X7 해인 49년의 일곱 번째 안식년은 안식년으로 지키고, 다음 해인 50년째는 희년으로 지켰습니다. 이렇게 7자가 들어가면 하였튼 뭔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꼭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안식 일을 범하는 죄는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절기이면서도 아주 심각한 내용을 갖 는 일종의 규칙입니다.

왜 성경이 이렇게 안식년과 희년을 강조 하느냐 하면 그 속애 중요한 구원의 멧 시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고, 안식 년에는 씨를 뿌리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밭에서 자연적으로 난 것도 먹 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기 위해서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 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노력하거나 또는 그들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이 루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을 만들어 낼 어떤 것도 심을 능력이 없고, 가꿀 능력이 없는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이라는 결과를 있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고자 그렇게 절기 를 이용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의 구원과 사랑의 구원을 멧 시지화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더욱더 확증하기 위해서 그 7자를 합친 50년이 되면 희년이라고 하여 누구 에게 무었을 꾸어 주거나 전당잡은 물건, 혹은 남의 밭을 산것, 누구를 종으로 산 것, 이런 것들을 원 주인에게 무상으로 돌려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 되 었던 자도 무상으로 해방되고, 남의 밭을 산 것도 원 주인에게로 되돌려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땅은 사고 팔되 끝까지 남의 소유로 사고 팔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제비 뽑아 나눠 가졌던 그 본래의 땅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업이란 불변 하는 것이며 우리가 값을 물고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공짜로 풀려나게 했는가를 이것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면서 이런 경고 를 하셨습니다. '내가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 내가 사망과 생명을 너희 앞에 둔다.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면 이렇게 축복을 받고,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이런 형벌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형벌 중에서 최고의 형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 땅에서 쫓아낸다 것입니다. 땅에서 쫓아낸다는 것이 벌치고는 약해 보이 지 않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레위가26장으로 넘어가 보십시 오.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쫓지 않으면 어떤 형벌을 받을 것인가 가 하나씩 나옵니다. 이런 벌을 받고, 이런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나오다가 맨 마 지막 형벌은 이것입니다. 레26:3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서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 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쫓아 내는 것이 최고의 형벌입니다. 그런데 왜 쫓아내는 형벌을 택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43-44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 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 히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 거할 때에 내가 싫어 버리지 아니하며 미 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여 나의 그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 라" 43절에는 분명히 최고의 형벌로 쫓겨간다는 이야기가 있고, 44절에서는 다시 돌이 키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벌과 그 돌이킴 사이에는 어떤 돌 이킴을 입을 만한 이스라엘의 회개나 간구가 없습니다. 단 하나 있다면 황폐하여진 땅이 안식을 누린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 한 맨 마지막 형벌로서 땅에서 쫓아낸다는 것을 선택하신 것은 아주 큰 의미가 포 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땅에서 쫓아 내면 그 땅은 농사 지을 사람이 없어서 황무해 집니다. 그러면 안식년과 똑같아집니다. 원래 안식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해서 지켜야 할 절기였는데 지금은 안 지켜서 쫓아 냈습니다. 그러나 그때 땅 자체는 안식년을 쉬는 것과 똑같은 형태가 되고, 하나님은 거기서 '나는 이 백성의 조건이나 능력이나 반응에 의해서 구원하는 자가 아니라 내 성실과 내 긍휼과 내 사랑을 인하여 구원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다시 분명히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 다.

다시 다니엘 9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니엘이 그 포로 된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너희 포로 된 것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는 말을 듣고 깨달 은 바가 여기에 나옵니다. 햇수로 70년이면 안식년이 몇번 지나갑니까 열 번 지나 갑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은 포로가 되어서 다 이곳으로 와 있습니 다. 예루살렘은 황폐했습니다. 그러면 올해도 안식년, 내년도 안식년이 아닙니까 매년 안식년인 것입니다. 안식년은 자기 땅에 있을 때에는 7년에 한 번이지만 쫓겨 갔기 때문에 그 땅은 지금 관리하는 자가 없으니까 매년 안식년같이 황폐되어 있다 는 말입니다. 마치 70번의 안식년을 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70번의 안식년이 제 대로 7년마다 거쳐서 지켜진 것이라면 햇수로 몇 년이 됩니까 490년에 해당되는 안식년입니다. 이것을 성경적 용어로 말하면 칠십 이레가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의 포로 기간을 이 칠십 이레 라는 개념으로 맞추어 놓은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 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깨우치고 전달하고자 하는 멧시지가 있기 때문인 것입 니다.

이것은 희년에 관한 개념을 주입시키신 것으로서 우리에게 멧시지를 주시는 것입 니다. 희년은 7x7년이 지난 50년째입니다. 이스라엘의 포로 70년은 70번의 안식년 이 지난 것과 같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70이레가 지난 것과 같습니다. 햇 수로 따지면 490년이 지나면서 안식년을 치룬 것과 같아집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희년이라는 개념을 확대하기 이해서 7x7=49년에 10이 붙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 희년을 위한 동일한 멧시지라는 것입니다.

희년의 멧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형벌을 받 을 수 밖에 없고, 마땅히 찢겨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그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기어코 회복시키시고 불러 일으 키시는가 하는 멧시지 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셔서 우리를 죄악에서 회복시키신다는 멧시지인 것입니다. 바로 그 메시야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햇수에 맞추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모두가 떠듭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누가복음 19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말리십시오!'라고 했습 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외치리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이 말씀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잠잠해도 돌들이 외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와 이 주관하시 는 역사가 하나님의 계확 속에 있으며, 그 손길과 의도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오늘도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안타까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온 우주와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 녀로 불러 인쳐주신 우리 신자들도 그렇게 간섭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 무도 더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는 신앙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부적을 하나 갖고 있는 정도이고, 주택복권을 하나 산 정도일 뿐이 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되면 이익이고, 밑져도 괜챦은, 그 정도로 밖에 우리는 역 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칭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감격과 자 신과 긴장이 없어진지 오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며, 그의 말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지옥 형벌의 물못에 집어 넣는다는 것을 우 리는 말로밖에 얘기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병이요, 아픔입니다.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등장하십니다. 그것 이 우리에게 놀랍게 보여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많은 세월을 지나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뛰어드신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방향과 목표가 달라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나는 신자입니까 나는 지금 무엇을 목표로 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점수를 따기위할 것인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막연히 하 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신자도 아니고 세상 사람도 아닌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리에서 속히 빠져 나 와야 됩니다. 힘있게 하나님의 사람임을 외치셔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의 영혼이 더 많이 깨어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은혜 베푸시기 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는 데도 기뻐하시는 예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제발 돌이키십시오. 신자답게 살아 가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지역 사회, 이웃들 앞에서 과연 신자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십 시오. 여러분이 헌금하고, 찬송가 부르고, 기도하고, 전도만 하면 다 되었다는 이 야기가 아닙니다.

 <결론>

우리는 사는 목표와 원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 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속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차원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쫓으며, 하나님께서 하라는 일에 우리의 모 든 것을 꺼내 놓는 자로서 존재해야 됩니다.

근자에 와서 교회가 양적인 팽창과 경제적인 팽창과 아울러 밀어닥친 시험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로서의 삶이 너무도 맥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하루 아침에 순교자가 되며 펄펄 뛰는 광신자가 되어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그 목표와 원리와 사고방식이 복음적이고 기독교적이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묽어져 있습니다. 누가 물이고 누가 소금인지 구별이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햇빛이 비취어 증발을 하나 안 하나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두움 속으로 자신의 신분을 파뭍히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생애를 하나님 앞에다 붙들어 매 놓으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살기로 결심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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