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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귀를 타신 예수님 (요 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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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마지막으로 입성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 건은 예언의 역사적인 성취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 자체가 어떤 멧시지를 갖 고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에서 '호산나!'란 '지금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붙여서 사용하는 바람에 '호산나'도 찬송한다는 뜻인 줄 알고 성가대 이름 중에서도 호산 나 성가대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찬송하는 뜻인 줄 알고 이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뜻이 아니고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하자면 도 움을 청하는 외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호산나라는 외침이 처절한 상황에서 외치기 보다는 자기를 도우고 해방시킬 메시야가 들어온다는 시점에서 외치는 것이 기 때문에 기쁨과 감격과 환영의 뜻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같이 대대적인 환영을 하던 날로부터 몇일이 못되어서 그렇게 찬송 하며 맞이했던 그 무리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한 목소리로 외쳐댓던 것입 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는 환호와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군중들은 다시 빌리도 법정에 모여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못박을 것을 요구했던 것 입니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급격한 변심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가 하는 것을 오늘 이 사건으로부터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도움과 큰 이적과 선한 일을 베푸셨던 그 분을 결국은 모두가 다 버리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복음서의 중요한 추적거리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이렇게 쉽게 볼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들에게 좋은 일을 해줄 때는 쫓아다니다가 결국은 이유야 어찌하였든지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제발 그러지 말자!' 이렇게 쉽게 비교해서 결론으로 가기에는 이른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같이 '도대체 사람 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졌으며, 또한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이 당시 사람들의 기대와 어떻게 달라서 그렇게 떠나가고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리고 제자들은 무엇을 뛰어 넘었길래 나중에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그렇게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되었는가'하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 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 각처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 을 때에 마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사람들은 들었습니 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문둥병자를 고쳤으며,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켰는 가 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기다 더더욱 바로 몇일 전에 베다니에서 죽 은 나사로를 일으킨 사건도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 중에서는 친히 그같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고쳐주셔서 병이 나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 하였던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십시오! 당신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왕이십니다!'하면서 그렇게 기쁘게 맞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가리켜 만일 '이 사람들이 소리치지 아니하면 이 돌들이 외치리라!'고 하신 것처럼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하 였던 사건이 역사적으로 성취되는 사건임을 보여주실 뜻은 있었지만, 그러나 환호 하는 백성들의 그 기대와 요구를 위해서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건 자체에서 이 미 예수님은 상징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금지한 몇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기 를 먹을 때 짐승을 잡아서 먹게 되거든 그 짐승의 피는 먹지말라'라는 규약도 있고 '이방 민족과는 결혼하지 말라!'라는 규칙도 있습니다. 그런 많은 규칙 중에 중요 한 규칙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말을 기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최소 한 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즉 농사용으로 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전투용으로는 말을 기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명 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라 할지라도 마병을 거느릴 수 없게 되어 있고 전차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위용을 위해서는 전차를 가질 수 있었지만 전투용을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가지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구 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솔로몬이 범한 가장 큰 잘못 중의 하나로 그가 말을 많이 둔 것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방 여인들을 왕비로 삼은 것을 큰 죄로 지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20:7절에 보면 이런 구체적인 설명도 나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 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신앙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말과 병거를 의지 하는 것은 중대한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말과 병거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전 쟁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상징시키기 위하여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란 전쟁용으로는 부적격 합니다. 나귀가 힘 은 세지만 전쟁용으로는 못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고 전쟁을 하는 예는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예수님은 다 큰 나귀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이 때에 그들은 겉옷을 깔아서 겉옷 위로 나귀를 타고 들어 오십니다.

종종 우리가 로마 제국이 배경이 된 영화들을 보면 로마 군대가 외국에 가서 전쟁 을 해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면 어떻게 돌아오는 지를 묘사되는 것을 보신 적이 있 을 것입니다. 앞에서 나팔수들이 나팔을 불며, 연변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환호를 하고, 그리고 특별히 탈취한 전리품들을 앞세워 들어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쪽이 면 표범을 앞세우고, 사자도 함에 담아서 오고, 노예들도 앞세우고, 그리고 뿌리는 꽃송이와 오색 종이들, 환호하는 퍼레이드 속을 당당히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그 렇게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추종을 받았을 때에 누가 제일 많이 긴장 했겠습니까 바로 로마 정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이고, 그 곳에 빌라도 총독 이 와서 관할하고 있습니다. 민중이 어떤 사람을 추종하고 거대한 힘으로 모였다 면 가장 긴장되는 것이 빌라도와 로마 정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이 예수님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혁명가로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에게 무장한 모습이나 어떤 민첩함이나 교활함이나 그런 류의 어떤 것도 없음을 보 고 아마 피식 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깐 겉옷 위를 지금 느릿느릿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드러내었 습니다. 그러한 모습에서는 로마 정부를 전복할 의도나 힘이 있어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상징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장면을 대하면서 예수님께서 겸손하셨다든가, 예언에 응해서 이 길을 걸으셨다든가 하는 것은 많이 상고하는데 이 사건 자체가 갖는 뜻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를 못하고, 바로 그 다음의 십자가 승리로 인한 능력과 감격으로 너무 쉽 게 뛰어갑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한 이 사건이 스가랴 9에 있는 말씀이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슥9:9절을 보시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 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 귀의 작은 것 곧 새끼니라" 여기서 예언된 말씀 중에서 분명히 그가 구원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귀를 타고 오는데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올 것이라 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면서 구원을 요구하고 있고 이제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입니다마는 이 말씀 속에 숨어 있는 '왜 그가 이스라 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신데 나귀 새끼를 탔느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이해를 못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한 번 더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실 그 때에 는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며,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러 오실 것입니다. 그 묘사는 요한 계시록 19장을 보시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계19:11절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무엇을 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까 백마를 타고 오시 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분명히 정복하러 오시며, 심판하러 오시며, 권세 와 영광 중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초림하시는 예 수님께서는 평화의 상징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오셔야 했는지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님을 오해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예 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다른 메사야룰 찾아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슥12:10절 의 말씀을 보면 또 하나의 예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 성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잘못 알아 볼 것에 대한 예언이 이미 되어 있음 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 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어느 날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자기네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 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대하여 회개하는 날이 온다고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예언이 응한 것같이 여기 이 예언도 응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을 놓고서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려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뜻밖에도 놀라운 결론에 부딪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때 예 수 그리스도를 환영했던 모든 사람들이 오해했던 것은 이것었습니다. 그 오해는 오 늘날 까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로서, 자신들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 실을 생각지를 못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얻 은 자인데 다만 지금 악하고 나쁜 나라와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불편하게 핍박하고 있다고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생각에 이제 공의의 하나님께서 오 시기만 하시면 자기네들을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을 따름이 지, 그들 자신이 바로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러 오셨다고 설명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메사야는 지금 그 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공의로 심판하러 오시어서 자기네들의 어려 움과 억울한 핍박 가운데서 꺼내어 주실 자로 생각했지, 그들 자신이 고침을 받아 야 하고 죄값을 치러야 하고 거듭나야 될, 회개가 필요한 대상이라고는 전혀 상상 치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오해하고 있는 신자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향하여 갖고 있는 뜻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는 거의 대부분이 오해를 합니다. 나로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대한 특별한 뜻과 계획이 있어서 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내 계획이 있고 내 욕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필 요한 것을 요구해서 얻어 가지는 대상으로 밖에는 생각을 안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 다. 바로 이같은 생각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만들었다는 역 사적인 이 엄연한 사실을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가 결국은 어떠한 불행을 불러 오게 되는가 하는 점을 눅19:4 1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며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 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 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 사건을 놓고 우리가 이중적 인 메세지를 구분해 받아야 합니다. 그 첫번째 멧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 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올바로 반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 고 또 한가지 멧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그 사실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상태에 모든 인생들이 빠져 있었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인 그 죄인됨을 고치기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러 오셨다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 이중성 때문에 기독교는 늘 오해를 받습니다. 기독교는 세 상사람들에게 이렇게 오해를 받습니다. '너희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너희 들을 그 모양 그 꼴로 밖에는 인도하지 못하느냐'하는 오해를 듣습니다. 이건 세 상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 자체로 부터도 오해를 받습 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믿었을 때와 도대체 뭐가 다르고 차이가 납니까' 하는 오해를 제기 받기도 합니다.

왜 이런 오해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 고 뛰쳐 나왔으되 자신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서 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예수님 을 통하여 우리의 어려운 이 모든 형편이 피어지고 고쳐지리라는 기대와, 이 지긋 지긋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리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나왔는데 항 상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기대에 응답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 려운 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신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고 참된 신앙의 길이란 주님의 뒤를 쫓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인 것입니 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들어 오실 때에 말을 타고 들어 오셨다면 그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것 같습니까 놀랍 게도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그 해답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초림 하 셨을 때에 심판 주와 왕의 모습으로 오셨더라면 모두 다 죄값으로 멸망을 받고 말 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원이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악된 현실은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대와 요구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작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 도의 은혜에 대해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같은 문제는 2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는 뿌리 깊은 문제입 다. 여러분의 기대와 요구사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의 모두가 '정말 예수 그리 스도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 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경제력입니까 집입니까 그것이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져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 가운데서 꺼집어 내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가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무엇을 쌓아 나가는 작업을 하는 그것이 시 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르켜 주어도 우리는 끊임없이 뭐 라고 고집을 피웁니까 ' 아닙니다! 이 경제의 문제, 건강의 문제, 집 문제, 이 출 세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 시는 것이 내게는 더 현실적인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다른 문제는 잘 모르겠고,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해 주시옵소서!'라고 내 목소리만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소원과 기대가 제대로 이 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우리 입에서 무슨 말 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아!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는지 모르 겠습니다'하는 겁니다. 이와같은 혼동과 오해가 우리들의 신앙의 대부분을 차지하 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분은 놀라셔야 합니다.

왜 놀라야 합니까 우리는 백마타고 왕권과 철장의 권세로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 스도를 자꾸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 앞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 아 영락없이 자신조차 멸망 당하고 말 처지에 누워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심판의 주님을 자청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왜 심판의 대상이 됩니까 아직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평화의 왕을 상징하 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다음 번 재림 때에는 반드 시 백마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나귀타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 평화의 주님의 뒤를 쫓아가는 것이 이 땅의 신자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심판을 보류하시고 영광을 감추셨습니 다. 그래서 결국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에 대한 진 노와 형벌의 담을 제거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맺게해 주셨습니다 아직은 평화의 때입니다. 재림이 있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가지고 지속적인 교제를 이루는 것 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의 아들들답게 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 요한 우리 자신들의 지상 과제입니다. 결국 신자들의 지상의 삶이란 완성을 향해 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직은 우리가 누군지 를 증명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칼을 뽑아 보이도록 요구받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신자란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방법으로 신자 됨을 증명해 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예 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환영을 받으셨지만 저들의 기대 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인생의 어떤 역경과 어려움 때문에 기독교에 입문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그 문제들을 푸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줄 아십니까 기독교는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 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에 전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간 이란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며, 하나님이 만들어 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만들어준 분에게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배신한 자요, 상처받은 자요, 눈먼 자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지적을 기독교는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 고는 이제 거기서 돌이키고 돌아오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셨기에 그 분을 만나고 영접하므로써 돌아오라는 말씀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며, '내가 이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중생한 자에게만 알게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 도 우리는 역시 2천년 전의 그 예루살렘의 군중들 처럼 그저 쉽게 호산나! 호산나! 외치면서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려고 갈증이 난 군중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히 있 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환호하고 열열히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 이라는 이야기에 다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사랑하는 제자들마저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 런데 눅24:13-26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날에 저희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 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영광 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지적을 받아 마땅한 자들일 것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 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전 66권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약속들, 그리 고 그 행하신 능력에 관한 기록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성경 전 66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를 향하신 전체적인 뜻에 관심 이 있기 보다는 내 욕심에 더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내 욕심과 유사한 말씀을 찾 아 놓고서 '하나님! 이렇게 하셨으니까 제게도 이렇게 해 주십시오!'하면서 우리는 기독교를 너무도 쉽게 갈갈이 찢어서 마음대로 뜯어 맞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바를 더디 믿는 자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신자들의 참 승리와 감격의 생활로부터 단절시 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자랑이 물질이라고 누가 가르쳤습니까 인간의 힘이 자기의 육체요, 자기 손에 잡고 있는 권세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잠자리는 두평도 안됩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무덤도 그저 한 평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도 정력과 관 심과 마음을 쏟아붓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큰 사랑과 축복과 하늘의 행복을 왜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사는 것이야 뭐라 그러겠습니까마는 세상 사람들과 엄연히 그 신분과 차원이 달라야 할 신자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약속과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여간 불 행한 일이 아닙니다

<결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의 입성의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우리을 향하신 엄청난 진리를 우리 신앙의 대전제와 기초로 놓고서 그 위에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서 있 는 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짧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문제 는 우리가 늘 미련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의미를 더디 깨달음으로 연약한 신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걸어가야 할 신자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이 무엇인지에 온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내 마음의 욕심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참 행복과 축복과 감격이 있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으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착취하시 려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이 다만 신자로서의 사명과 책임만을 요구하시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찬송과 감사를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느낄 수 없고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까 아직까지 내게 미련함이 있고 더디 깨닫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미련한 마음을 제하시고 성경의 신령한 깨닫는 은혜로 속히 깨닫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세상이 주는 기쁨과 전혀 다른 새 기쁨을 차지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끼쳐주시는 평강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의 기업을 바라 보고 기뻐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바라고 독수리처럼 높이 높이 올라가는 믿음 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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