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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는 우리의 길(1) (요 14:1-14)

첨부 1


요한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2장은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수직으로 세상에 내려 오셔서 배척을 당하시며 하나님을 계시하신 일을 묘사하고, 13 장 이하에서는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수직으로 다시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을 묘사한다 (성경연구지 제5호 44-45, 69 쪽, 참조). 그러므로 우리의 오늘의 본문은 그 둘째 부분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잡수신 후, 마지막으로 주신 강론(13:31-17:26)의 한 부분이다. 당신이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실 것과 제자들의 장래를 말씀하시면서(13:31-14:31),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13:31-35),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게 되리라는 예고를 하셨다(13:36-38).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심각하고, 침울하고, 막막하고, 걱정스러운 상황 속에 나타난 말씀과 대화이다.

본문 확정 (원문비평)

이 토막에는 몇 가지 중요한 원문비평학적 문제가 있다. 본문을 확정지어 놓아야만 그것을 가지고 석의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 과정을 건너뛸 수가 없다.

< 2절 >

[호티] 라는 접속사가 있는 사본과 그것이 빠져있는 사본으로 구분된다. 그것을 지지하는 사본과 역본과 교부들의 인용이 허다하다. 파피루스와 대문자사본들만 보더라도 P66c A B C D L W Ψ 등이 있다. 그것이 없는 대문자사본은 P66 C2 Δ Θ 0233 등이다. 가장 낡은 사본으로 보이는 P66의 원본(P66)에 [호티]가 빠져있다는 것 때문에 학자들은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이 들어 있는 사본들의 권위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가장 낡은 사본의 권위를 존중해야 하기에 UBS 편집자들이 본문에[호티]를 넣으면서도 B 등급으로 취급했다. [호티]가 본래 있었다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없어도 의미가 통하기 때문에 부지중에 그것을 빼게 됐을 것이다. 만일 본래 그것이 없었다면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초창기에 그것을 삽입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4절 >

본문에 있는 [텐 호돈]이 어떤 사본과 역본에는 [카이 텐 호돈 오이다테] 로 나온다. 전자를 지지하는 대문자사본들 P66c B C L Q W와 후자를 지지하는 P66 A C3 D Δ Θ Ψ 0141를 비교하면 전자가 권위 있는 것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제일 낡은 사본 P66의 원본(P66)이 후자를 지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 수 없어서 본문에는 [텐 호돈]을 두고 B급으로 취급하였다. 즉 결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 7절a >

[에그노카테 메]를 지지하는 것들과 [에그노케이테 메]를 지지하는 것들과 [에그노테 메]를 지지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셋째를 지지하는 것은 387이라는 일과표 하나뿐이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첫째와 둘째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증거 자료들의 권위가 백중하다. 예컨대 첫째를 지지하는 P66 D에 맞서서 둘째를 지지하는 A B C D1 L W Δ Θ Ψ0141들이 있다. 어느 것이 원본일는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UBS 편집자들은 그것을 C급으로 취급했다.

< 7절b>

대개 네 가지 다른 읽기가 나타나 있다.(1)[그노세스테],(2)[에게노케이테] (3)[안 에데이테](4)[에그노카테]. 넷째를 지지하는 사본은 없고 몇 개의 Old Latin역 사본들과 3,4명의 교부들이 그것을 인용하고 있다. 첫째를 지지하는 P66 D W, 둘째를 지지하는 A C3 Δ Θ G H N, 셋째를 지지하는 B C L Q 등은 역시 그 권위에 있어서 백중하여 어느 것이 원본이라고 결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것 역시 C급으로 취급했다.

< 11절 >

절 끝이 [피스튜테]로 된 것들과 [피스튜테 모이]로 된 것이 있다. 전자를 지지하는 대문자사본들은 P66,75 D L W등이고 후자를 지지하는 사본들은 A B Θ Ψ 0141등이어서 전자가 약간 우세하다. 그러나 후자를 지지하는 B 등의 가치 때문에 100% 전자를 지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B으로 취급되었다.

< 14절1 >

14절 전체가 들어 있는 사본과, 그것이 아예 빠져있는 사본과, 위치를 달리하는 것 등으로 분류된다. P66 P 66c P75 A B D L W Δ Θ Ψ 0141등에는 14절이 들어 있고, 1010이라는 소문자사본에는 14절이 13절 가운데로 끼어들었고, 몇몇 소문자사본과 고대역본에는 아주 빠져있다. 그러나 그것이 들어 있는 사본들의 압도적 권위를 보아 그것이 원본의 읽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14절2 >

`내게 구하면'의 `내게' 즉 [메]라는 대명사가 있는 사본과 그 대신 [톤 파테라]로 바뀐 것들과 아예 생략된 것으로 분류된다. 둘째 경우는 249라는 소문자사본 하나와 어거스틴이 지지할 뿐이어서 주목할 가치가 없으며,그것을 뺀 사본들(A D L Ψ 등)의 권위는 그것을 가진 사본들(P66 P75 B W Δ Θ 060등)의 권위와 비교할 때 열등하기 때문에 첫째 것을 취하게 된 것이다.

Ⅶ. 석 의

몇 시간 뒤에는 체포되어 십자가형으로 죽으실 운명을 앞에 놓은 예수는 크게 두 가지 일을 하셨다. 하나는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잡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이고 또 하나는 마지막으로 길다란 강론을 행하시며 여러 가지로 그들을 가르치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고 부탁하신 일이다. 보통 사람 하나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을 때도 유언도 하고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예수는 보통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주로 세상에 오셔서, 짧은 공생애 동안 인간 구원과 관계된 모든 필요한 계시와 교훈을 남기셨지만, 아니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오, 구원의 행동이었지만, 특히 이 마지막 순간의 만찬과 교훈과 기도는 참으로 밀도 높은 의미와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몇 시간 후에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고, 옛 질서를 타파하고 이제 새 질서의 세계, 고차원의 세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를 이룩하시려는, 획기적인 변화를 내다보는 순간에기에, 예수의 마음은 무겁고 심각하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와 행동 하나 하나는 매우 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가 세상에 소풍을 오셨다가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질서의 세상을 이룩하시기 위한 근본적인 여건을 조성하시고(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그 새 세계의 골격을 이루어 놓으시고 그 세계에 대한 법과 질서를 가르치고 떠나시려는 것이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훈련하셔서 당신의 증인을 삼으셨고, 이 마지막 밤에 새 언약의 공동체를 이룩하셔서 새 이스라엘을 발족하셨다. 예수는 떠나시더라도 그를 토대로 하는 새 공동체, 그 영원한 왕국이 시작되었고 그 왕국의 원리는 서로 발을 씻듯이 서로 섬기는 일임을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다(13:1-20).

이것은 예수님 편에서의 사려 깊은 조치이었다. 제자들은 예수의 그 모든 말씀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이 느끼는 것은 예수의 말씀과 행동의 심각성과 초조감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그들을 두고 떠나간다는 말과 마지막을 고하는 만찬 등은 제자들에게 큰 걱정과 불안을 안겨주었을 것이 확실하다. 먼 앞을 내다보면서 하는 염려가 아니라 막연한 가운데 가지는 불안과 걱정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러한 마당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혀서 제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태도와 자세를 가지도록 하시려고 길게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셔서 그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사건을 통해서 새 질서의 세계가 이루어진다. 그런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는 예수의 떠나심이 걱정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라는 길을 통해서만 새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토막에서 그 진리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제1세기 말의 글로서 그 시대의 요한 공동체를 위해서 쓴 것이다. 예수가 이미 세상을 떠나 계시고 그가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시대를 사는 신도들에게 주신 말씀이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다가오는 말씀이다.

14:1-4 예수는 떠나가셨다가 다시 오신다.

< 1절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구절의 주어는 `너희의 마음' [휘몬 헤 카르디아]이다. `근심하지 말라'[메 타라쎄스토]는 것은 마음이 안정을 가지지 못하고 흔들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동방박사들이 찾아 왔을 때 헤롯과 예루살렘이 술렁이었던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떠나고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불안과 공포와 걱정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눈 앞에 안 보일 때 이스라엘 백성은 당장에 걱정이 생겨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었다. 사람들 나름의 어떤 수단을 써서 그 불안을 해소하려는 시도를 하기 쉽다. 그것이 세상의 종교들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개역성경에 하나님을 믿으리라는 표현은 오해를 자아낼 염려가 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또 나를 믿으라'는 말이 되어 하나님은 믿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이 어떤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신학적으로는 물론 하나님을 믿는 일과 예수를 믿는 일이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도 믿으라는 말에 불과하다. 참된 하나님을 믿으면 그만이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참되다고 한다. 우상을 붙들고도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한다. 거짓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믿는다. 그러나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 예수가 계시하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믿되 또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믿는다' [피스튜에인]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나는 너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뜻은 `신용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는 흔히 [피스튜오 소이]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즉 목적어로 여격 명사를 사용한다. 그러나 여기서와 같이 [에이스]라는 전치사를 동반하는 경우는 다른 의미를 나타낸다. 그냥 신용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종교적인 귀의(歸依), 연합, 일치, 의뢰 등의 신비한 관계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삼위일체 신을 믿는다는 점이다.

< 2절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여기의 `거할 곳'은 [모나이]를 번역한 것으로서 거한다, 머문다, 앉는다, 산다든가 하는 어떤 동작을 하는 곳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공간 room 이 넉넉하고 얼마든지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떠나서 가시는 곳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집이다. 집이라는 것은 하나의 은유(隱喩)로서 영어의 [하우스] house 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 영역을 통틀어서 말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성경에서 흔히 하늘이라고 하지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개념 중에 제일 큰 것이 하늘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사실 하늘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담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히브리인은 하늘들[샤마임] 이라는 장엄복수형을 사용하여 `하늘들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묘사한다. 하나님은 공간적인 의미에서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신 영역을 하늘이라는 은유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이 부분은 여러 가지 다른 번역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호티]라는 접속사가 없는 사본을 번역한다면 한글개역과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 그러나 원문비평의 결과 [호티] 가 있는 것이 원본의 읽기였다고 볼 때 번역은 당연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호티] 가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와 단지 명사절을 소개하는 접속사로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을 것이다 (즉 거할 곳이 많으니까 너희에게 없다는 말을 안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중이니까'라는 말이 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 그리고 문장 끝에 의문부가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는 말을 하겠느냐'가 될 것이다. 최신 비평판 원어성경들은 후자를 택하고 있다.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는 사건은 결국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본연의 상태를 이룩하시려는 것이다. `처소'[토포스] 는 한문자로 볼 때 `있을 곳', 즉 두 개의 개념이 모인 것이다. 그러나 [토포스]는 단순히 `곳' (place)이라는 단일 개념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단지 장소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보고 그 이상의 의미를 거기서 찾으려 할 필요가 없다.

< 3절 >

예수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시고 아버지께로 가신다. 즉 처소를 예비하신 후에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려는 것이며,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상은 낙원을 회복하시고 거기서 당신의 형상으로 좋게 만드신 인간들과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새 이스라엘을 하나님 어전에 불러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교제하며 사는 삶을 주시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4절 >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개역에 `알리라'는 미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사실 원어의 [오이다테] 는 현재직설법의 의미를 나타내는 동사로서 `너희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본은 [카이 톤 호돈] 으로 되어 있어서 `너희는 그 길도 알고 있다'로 번역된다. 그러나 그 읽기는 원본의 읽기가 아닐 것이라는 학자들의 판단이 내려졌기에 문제시할 필요가 없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너희가 알고 있다고 말씀하실 때 도마를 선두로 해서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5절). 그런데 예수는 어째서 '너희는 알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을까 6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 자신이 바로 그 길이시기에,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를 눈 앞에 모시고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아는 사람들이기에 `너희는 나를 알고 있다,' `나는 길이다,' `너희는 길을 안다'라고 삼단론법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마땅히 예수를 그 길이라고 알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알아야 할 것을 제자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14:5 도마의 질문

이 부분은 앞의 사건과 뒤의 것과의 교량적 역할을 한다. 5절이 빠져도 문맥은 어렵지 않게 연결될 것이다. 1-4절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가 어디론가 가신다고 하고 그리로 가는 길을 자기들더러 알고 있다고 하니까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고야 믿으려하고(20:29) 사실을 밝히기를 좋아하는 똑똑한 도마는 당연히 예수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사실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자기들은 알지 못하는 어디론가 예수가 가신다는데 예수는 그들이 알고 있다고 하시니까 그렇지 않다고 밝히는 것이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여기의 주라는 말은 기독론적인 칭호로서의 "주"가 아니라 아마도 "선생님"(master) 쯤의 의미로 사용한 말일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과 동의어로서의 "주"란 명칭으로 부르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이 때쯤에는 제자들이 예수가 누구이시며 어디로 가신다는 것을 깨달을 만도 하기에 예수는 그들이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도마는 이어서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하고 반박조로 질문을 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조로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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