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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사랑하는 자 (요 14: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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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사랑의 댓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사랑에 무슨 댓가가 있을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21절 이하를 보라.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어떻게 하리라 하였는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1)

요 14장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 있었던 일의 기록이다. 당시 제자들은 큰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하고 위로하셨다. 오늘 말씀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하신 우리 주님의 지극한 위로의 말씀이다. 본문에서 주님은 먼저 '나를 사랑하는 자는 이러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어떠한 사람인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이다. 여기에 가진다하는 것은 마음에 담는 것을 말하며, 지킨다하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가지고 지킬 의무를 가진 사람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의 계명을 가지고 있으며 또 지키고 있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자임이 분명하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인가

우리 주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하신 말씀들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기억이 되는 말씀이다. 그는 맨 처음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시면서 회개하라 하셨다.(막 1:14-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나무라신 말씀이 아니다. 영원한 심판의 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으로 임하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의 심판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노아시대의 홍수와 소돔 고모라의 심판은 회개하지 않은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이다. 니느웨의 멸망을 예고한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으나 하나님은 좌우를 분별할 줄 모르는 12만명을 기억하사 진노의 심판을 미루시지 않았던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또 빛이다 하시며 너희 착한 행실을 보이라 하셨다. 항상 기도하라 하셨다.(눅 18:1)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기도를 실천하신 분이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피를 말리는 기도시간에 잠자는 제자들을 깨우시면서 하신 말씀은 '깨어있어 기도하라 하시면서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들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으라!' 하셨다. 예수님 그때에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 눅 12장에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하셨다. 요한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내 안에 있어 과실을 많이 맺으라' 말씀하셨다. 마 28장에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하셨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명하셨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말씀이요 가르침이다. 이 계명을 가지고 있는가 또한 지키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지킨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임이 분명하다. 할렐루야 !

이렇게 주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의 댓가는 무엇인가

1. 내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는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아버지되신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입는다는 말씀이다. 사랑이란 주는 이와 받는 대상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며 그를 사랑하면 그 결과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사랑을 입는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두가지 사랑을 보게 된다. 하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다른 한가지는 조건적인 사랑이다. 전자는 'EVEN IF...'이고 후자는 'BECAUSE OF...'이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은 전자이다. 그러나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은 후자이다.

눅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자식의 이야기를 보자.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전자이다. 비록 재산을 다 허비하고 돌아오는 아들이지만 용서하고 맞이하였다. 아직 상거가 먼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달려 나가 아들을 영접하였다. 아버지는 오래도록 문 밖에서 기다려 온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였다. 중심으로 용서를 구한 것이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였다. 이렇게 회개한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동시에 조건적인 것도 보게 된다. 그것은 회개와 관계없이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돌아와 회개하는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조건적이다. 전자를 아는 사람이 후자를 행하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300 데나리온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은 용서받은 기쁨 때문에 향유가 하나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아는 사람은 그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도 어려울 것이 못된다.

2.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생각은 극진하다. 그가 처음으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겸손하였다. 인물됨됨이도 남보다 빼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름 부음을 허락하자 이스라엘의 처음 왕을 삼았다. 사울이 있는 곳에 사무엘이 있었고 사무엘의 가는 곳이면 사울이 함께 따라갔다. 그러나 사울이 범죄하였다. 제사를 멸시한 사울 보기를 사무엘은 두번 다시 원치 않았다. 능력의 사람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 그의 제자인 엘리사가 그를 바짝 좇았다. 엘리사는 제자 엘리사더러 여기 머물라 여기 머물라 하였으나 엘리사는 길갈에서 벧엘로, 여리고로, 요단으로 계속 좇아갔다. 사랑하면 언제나 함께 있고 싶은 법이다.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를 좇아갔고 결국 스승의 능력을 전수받았다.

사도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이다. 그 순간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뒤 돌아 보시는 모습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할 모습이었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닭이 두번 울기 전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크게 통회하고 자복한 베드로였다. 얼마 후 그는 실의와 낙담 속에서 고기나 잡으러 간다고 다른 7 제자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 나갔다. 그는 거기서 뜻 밖에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이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부활의 예수는 베드로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

예수님을 구주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 우리 주님께서 지금 여러분 곁에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때때로 절망 속에서 몸부림 치며 잠 못 이루며 괴로워 할 때에도 사랑하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 계심을 기억하라.

3.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다. 60만 대군이 광야를 행할 때 하나님은 성소 가운데 이스라엘과 동행하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구름이 멈춰 서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멈추었다. 구름이 움직이면 그들도 함께 움직였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막 가운데 함께 계셨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진을 치면서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쳤다.(민 2:2) 동으로 유다 스불론 잇사갈 지파가 진을 쳤고, 서쪽에는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그리고 북쪽에는 납달리 아셀 단에 속한 사람들이 진을 쳤다. 그들은 회막을 중심으로 진을 쳤다. 이것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증거였다.

출 25:8 '내가 그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9: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 레 26:11 '내가 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 니할 것이며 ...'

본문 23을 보면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하였다. 본문의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삼위 하나님을 의미한다. 거처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생활 하신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눅 19장에 보면 삭개오의 이야기가 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나 키가 작아 뽕나무에 올라갔다. 보고싶은 예수 만나고 싶은 예수 그 분의 얼굴을 가까이 뵈온다는 것이 그저 감격스러운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미국인들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는 여인이 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레나 루즈벨트이다. 그녀는 20살에 결혼하여 11년동안 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 중 한 아이가 죽었을 때 그의 친구가 찾아와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그때 엘레나여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다섯 아이들이 남아 있어요 !' 패기있고 장래성이 있는 한 남자 루즈벨트와 결혼하여 사는 중에 그녀의 남편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관절염으로 다리가 말라버리는 불행을 당하였다. 루즈벨트는 하는 수 없이 쇠붙이를 대고 다리를 고정시킨채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루즈벨트는 부인 엘레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불구자가 되었는데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오 ' 엘레나는 그의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줄 아세요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이에요 !'

이 말은 다리불구로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루즈벨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루즈벨트는 1932년 불구의 몸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36, 1940, 1944년 계속하여 4번 대통령직을 연임하였다. 한 사람, 어진 아내 엘레나 덕분에 루즈벨트는 용기를 잃지 않았고 모든 환란을 잘 극복하였다. 하물며 한 분 우리 주 예수님께서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함에야 .....

단순히 예수님을 뵙고자 한 삭개오에게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뜻을 전하신 주님께서 오늘 그의 말씀을 가지고 지키는 자에게 거처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열번 들어도 좋은 메시지이다. 그분이 거처를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이 왜 좋은가 그분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능력 많으신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시면서 우리와 사랑을 나누신다는 이 약속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 약속이다.

언제나 용기를 더해 주시는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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