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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알지 못하느냐? (요 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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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들이 신자들을 야유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보 여 달라는 요구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어디 한번 보여 봐라!'는 것 입니다. 이 질문을 하는 자가 답답해 보이고 좀 안 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것보다 그 질문을 받은 우리의 수준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본문을 통 하여 암시하고 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 만 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땅히 해야 되는 말씀인 줄로 생각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의 질문 앞에 10절 말씀에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 았다고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 수님을 보았으면 하나님을 본 것과 방불한다는 그런 식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 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지금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지금 내가 살고 말 하는 모든 일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들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것이 오직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우리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일일까요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11-12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 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우리도 하고 그것보다 더 큰 일도 한다면 마땅히 우리를 본 자는 아버지를 봐야 마땅합니다. 이 기록은 예수님에게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고전4:15-16절에 보면 사도 바울도 동일한 묘사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시말해 어떻게하 여 자신을 전체로 한 모델로 제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해답이 갈2:20절에 나옵 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 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 이라"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를 보면 자기가 나타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 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바로 이 점을 오늘 우리가 깊 이 다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인간이라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인간을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으로 이분시켜 생각합 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 로만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2: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여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 다. 생령이란 영어 성경에 보면 `living soul'로서 살아 있는 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난하주를 보면 `soul'을 `spirit'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 으로 사람들이 영과 혼을 별 차이 없이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듯이 성경도 종종 그 렇게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soul'이란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의 정신적 기능을 말합니다. 다시말해 육체가 갖는 삶의 기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짐승에게도 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없는 영이 있습니다. 성 경의 묘사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흙으로 빚어졌는데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 어 넣으심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물학적인 이 몸뚱어 리는 하나의 그릇이고, 그 육체에 담겨져 있는 인간의 본질은 영인 것입니다. 그러 나 이 영이 타락해서 죽어 버립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일어남으로 영 이 더 이상 육체를 주도하지 않고 육체만 남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기능 중에는 정 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이후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명령과 손길이 들어 와야 될 정신에 죄가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처음의 영으 로 말미암은 그 정신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죄의 근원인 사단이 우리를 죄로 붙잡고 죄의 노예로 다스리고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육체라는 말 을 사용할 때에 몸뚱어리(bod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고 독립되어 그래서 영이 죽어 사단의 휘하에서 놀아나는 자를 설명할 때 육체라는 단어를 많이 쓰게 되는 것입니다.

창6:1-3절을 보시면 육체가 된 인간에 대한 대표적인 묘사가 나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로 삼는지라 여 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 체가 됨이라" 우리는 원래 영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므로 사단에게 장악 당하여 죄와 악밖에는 나올 것이 없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육체 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께로부터 전달 받아야 되는 영적인 생명과 진리가 이제는 더 이상 부어지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 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인간의 모습이란 마치 기름이 없는 램프와 같으며, 전선이 끊어진 전구와 같은 신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불을 붙일 수 없고 불이 들어오지 않는 물건과 같은 존재가 범죄한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이렇게 램프에 기름이 없고 전구에 불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무엇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전구는 양말 뒤축을 꿰멜때나 쓰고, 램프는 집어 던져서 상대방에 위협을 주는데 사용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지금 제대로 자기 가야할 길을 가지 않고 자신을 엉퉁한 것 에다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기름이 주입되고 생명과 진리의 선이 연결됨 으로 영이 빛을 발하고 소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죄의 유혹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어지며 하나님의 불이 붙여지며 하나님의 빛 이 비춰지고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는 자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아직도 우리는 죄의 유혹과 죄의 시험 앞에서 제대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 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신자들을 가리켜 `신앙은 너 자신을 누구에게 바치느냐의 싸 움이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바쳐서 그를 나 타낼 수도 있고, 반면 죄와 더러움에 바쳐서 불법과 불의를 행하는 자도 될 수 있 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 지를 보았다!'고 말슴하시는 것입니다. 즉 내가 누구에게 바쳐서 누구를 나타낼 것 이냐에 따라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나는 존재 가치를 나타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말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 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여 하 나님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하는 사람들 앞에 우리 자신은 큰 충격과 정신차림이 있 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롬6:6-7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또 롬6:12-13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 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 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 께 드리라" 여기서 우리가 몸의 지체를 어디에 드리며, 어디에 순종할 것인가 하는 싸움이 계속 요구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싸움은 우리 자신을 누구에게 바치느냐에 따라서 누리에게 누가 나타나느냐 하는 싸움을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면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나타날 것이요, 우리 자신을 불 의한 것에 맡기면 우리에게 불의한 것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불의한 것이 나타 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요8:44이하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런 묘사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 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 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 음이니라" 여기서 우리를 가리켜 다 마귀의 자식이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한 통속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었던 자요, 꼼짝없이 죄의 명령에 따라 죄를 지 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의 졸병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묘사하는 자연인의 모습 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고 난 이후에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명령하십니다. 죄는 더 이상은 명령하지 않습 니다. 죄가 우리의 주인이었을 과거에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 하나 님의 자녀가 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아직도 옛 주인인 그 죄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계속 유혹하고 있 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의 삶이란 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 녀라는 신분의 변화를 가졌는데, 이에 죄는 끊임없이 우릴 찾아와서 넘어뜨릴려고 유혹합니다. 공갈도 치고 협박도 하고 여러가지로 괴롭힙니다. 그래서 신자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집니다. 하나의 마음은 평화의 안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과 하나님 자녀로서의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또한 동 시에 우리 신자들에게는 현실에서 접하는 매일 매일의 양심의 고통과 의와 거룩을 향한 소망이 있음에도 넘어지는 자신에 대한 좌절과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같은 상황들 앞에서 날마다 스스로에 대한 결단을 내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 결단이란 예수를 믿을 것이냐 하는 결단이 아닙니다. 예수는 이미 믿 었으므로 이제 누구에게 자신을 바치느냐 하는 성화의 단계를 밟아 오르는 결단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나를 바치느냐에 따라서 매일의 삶이 결정되어 지는 것입 니다.

갈5:16-17절을 보십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육체를 좇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란 단지 몸뚱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이 없이 죄의 권세 아래서 죄악의 종노릇하는 원리를 가르킵니다. 죄 악이 우리의 주인이 아닌 데도 그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것에서 도 망쳐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결심하여 죄악으로 갈려가는 육체와 싸 워 이겨야 합니다. 엡4:17-18절에 이에 대하여 좀 더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 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 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 도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하나님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말입니 다. 이것을 앞에서는 육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자 들입니다.

또한 마음이 굳어져 영적 감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방탕과 악에 빠 진다고 합니다. 엡4:19-20절에;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 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영적 감각이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명려과 생명과 약속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또 엡4:21-24절을 보시겠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 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 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대목의 말씀은 대단한 결심과 결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먼저 유혹을 좇는 구 습을 벗어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새사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신앙 생활을 할 때에 사도 바울처 럼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수준으로 나아가게 되며 그것이 마침내 우리 옆사람이 볼 때에 다시는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보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자의 바른 삶 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부끄러운 것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밖에는 더 이상 기독교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나는 거짓말을 안 한다. 나는 최소한 헌 금은 어 떼어 먹는다. 나는 일요일만은 지킨다' 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 아닙니 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기독교 내용의 일부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며 변두리적인 내용들입니다. 그 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인 것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자를 볼 때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 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하나님과의 동행하심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 신앙 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못 사느냐 하면 아직도 우리는 하 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경외하심이 없기 때문에 사람 속이기 를 밥먹듯이 하고 스스로 신자된 것이 가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약속의 아름다음들 을 놓치고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것 이 명예일 뿐이지 자기 신앙 생활에 있어서 깊이와 더 진지한 자세로서의 받은 봉 사의 직분이 아니라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듣는 얘기 중에 우리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드는 일 중에 하나가 집사가 이렇더라, 장로가 이렇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들입니다. 집사쯤 되면 벌써 달라야 합니다. 그언데 그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기 욕 심을 따라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단지 심리적 인 위안거리 정도로 밖에는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책임은 일차적으로 목 사에게 있습니다. 목사들이 전부 좋게 좋게 해서 헌금받아 먹고 좋은 얘기 해주어 서 서로 짜고 기독교를 망가뜨렸습니다. 목사가 진리를 전하고 신자에게 신앙인으 로서의 바로 살 것을 요구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기 다림은 있습니다. 관용하고 인내하고 사랑으로 훈계하며 한 신자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 가고 있는 것을 그냥 보고 무조건 덮어 주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부담없이 묵계로 짜고 살 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지적하고 뭐라고 그러면, 아니 거기 아니면 교회가 없나! 합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려면, 어느 누가 나를 보았을 때에 당신은 사람 같지 않아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당신은 도대체 그렇게 해서 무슨 재미로 살며,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이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껏 한다는 소 리가 `예수 믿으니까 뭐 누구를 바보로 아는거야'로 나갑니다. 여러분, 사실은 바로 예수 믿는 것이 바보 되는 것이요, 매맞고 죽는 것이요, 욕심 속에 끼지 않는 것이요, 찌를 때 찔림받는 것이요, 오른 뺨 맞으면 온편 뺨을 돌려 대는 것이 아닙 니까 그게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기뻐 하시는 일을 하여서 결국 받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어떻게 변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도록 아주 높이셨으며, 모든 피조물들의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다고 성경 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받았으면 하는 상이 솔직히 무엇입니까 혹 돈도 생겼으면 좋겠고, 건강도 주셨으면 좋겠고 하는 부류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기왕이면 예수 잘 믿고 돈도 생기면 좋습니다. 똑같이 동일한 칭찬을 받을 바에는 돈도 있고 건강하 면서 칭찬받으면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돈과 하나님은 거 의 병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별히 하나님께 서 돈을 맡기시는 일이 있습니다. 부자 중에서도 신자가 있으며, 지위가 높은 사람 중에 신자가 있는 법입니다. 예수 잘 믿기 때문에 부자되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돈이 생기고, 예수를 잘 믿으면 지위가 높아진다는 법 칙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가난할 수도 있고 지위가 낮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잘믿으면 무조건 가난하다는 법칙도 없습 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 님께서 맡기시는 건강이 있고,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돈이 있고, 하나님께서 맡기시 는지위가 있고, 하나님이 맡기시는 인생과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 님게서 내게 맡기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펼쳐 보이는 사명이 우리에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하나의 종교적인 포옴만 갖추면 되는 것 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믿는 것을 예배드리고 찬송부르고 기도하고 전도 하고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는 것이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말하자면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빛을 발하며 향기를 발할 수 있느냐를 살 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그러한 빛이 발휘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 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다른 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한 것입 니다. 내용과 핵심이 없는 형식은 거저 겁데기와 외식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롬6:17-18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 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롬12:1절에 가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의에 종이 된 우리가 이 몸을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드리는 자세와 행동을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몸을 무엇을 위한 수단으 로 사용할 것이냐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깊이 살펴보십시오. 지금 내가 가장 열심으로 시간을 내 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먹고 살고 자녀를 키우며 가야 합니다. 그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에 우리의 시간이 훨씬 많 이 배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무엇을 목표로 해서 하고 있느냐인 것입니다. 남보다 낫다는 자기 증명을 하기 위해서 그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남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 위하고, 육신의 안락을 위해서 그 일들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그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증명되고 나타나기를 원 하면서 그 일들을 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모든 일 들이 하나님 앞에서 드릴 영적 예배요, 산 제사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합 니다.

교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증거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 신을 산 제사로 드리고 아름다운 향기와 빛과 소금이 나타날 때 자신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요 간증거리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바로 그러한 것을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 의 전체적인 영적 분위기가 점점 그러한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만은 사실 입니다. 종교화의 분위기는 있습니다. 금식 기도가 있고, 산 기도가 있고, 철야 기 도가 있고, 새벽 기도가 있습니다. 종교화된 사업들이 있고, 모임들이 있습니다.

부흥회가 있고, 선교가 있고, 전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하나 님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나타나야 하는 대목이 외면되어지고 있 지를 않나 우려 되는 것입니다.

 <결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보람된 자리에 부름 받았으며, 얼마나 크게 부름받았으며, 얼마나 영광된 삶에 초대받았는 가를 나타내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 매일 만나는 사건, 그 모두가 우리에게 소중 한 것들입니다. 그 일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분의 영광과 기쁘신 뜻을 펼 쳐 보이는 소중한 순간이요, 사건이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기도 가 더 영적이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살아야 될 힘과 방법이 더욱 더 영적이 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그 도우심을 구하며 그분이 나를 통하 여 나타내는 일, 그것에 촛점을 맞추겠다고 결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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