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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과 진리와 생명된 그리스도 (요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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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합창단의 찬양을 들으니 그렇게 감동이 오네요. 이 땅의 노래가 아니거든요. 제게는 하늘의 노래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영감으로 제 가슴을 움직이고 있어요. 그래서 "야, Wonderful이구나!" 형용할 수 없는 삶의 만족과 희열, 잃어 버렸던 낙원을 다시 회복하는 그러한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제가 사는 서울을 완전히 공해 속입니다. 지금 이 시간만 되면 서울 도성 위에 구름처럼 자욱히 낀 공해, 더구나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다." 미움과 분쟁이 가득한 그곳 거기에서 인물이 나올 수 없어요. 째째한 인물만 나오지요. 그런데 제가 한남대학에 와 보니 "아이구,wonderful이구나! 여기에서 인물이 나오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이 시간까지 여섯번째 설교를 하는데 제 가슴이 점점 뜨거워지네요. 그래 딱딱한 이야기는 안 할래요. 그저 '사랑의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나 때문이다 이야기, 몰라서 그랬는 걸 뭐, 넌 나와 같이 살자, 내가 썩어야지' 이런 사랑의 메세지를 여러분들에게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삶의 방향을 잃어 가고 있어요. key를 잃어 버렸습니다. 삶의 가치관을 잃어 버렸고, 사랑의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형제끼리도 용서가 안 돼요. 용서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요. 사랑의 기능이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동정도 잘 안 되고, 인내도 잘 안 되고... 왜 그럴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가 단절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다가 아주 감동적인 이야길 들었어요. 그 얘기 내용은 이거예요. 미국의 한 작은 도시에서 우체부 아저씨가 우편 가방을 메고 가다가 점심 먹을 때가 되자 길가 벤치에 앉더니 가방을 옆에 놓고 도시락을 꺼낸 다음 경건하게 기도를 드린 겁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주신 하나님께, 생명을 하루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 또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마침 길 건너 2층 집에서 한 여인이 이 광경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 그 사실을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남편도 감동받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신기하게도 아이들도 역시 감동받고 그래서 주일에 모두 교회에 갔다고 그래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아웅산 사건 때 국회 의사당에 와서 전혀 예정에 없던 순서를 진행했는데 1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슬픔을 위로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저 신앙의 힘이, 저 영적인 힘이 있기에 세계를 가슴에 안을 수 있는 힘이 있는 거로구나. 저는 이러한 힘이 한남인들을 통해 이 민족의 역사 속에, 이 세계사 속에 반드시 나타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사랑과 평화의 고향집을 잃어 버렸습니다. 삶의 겉모습은 풍요로운 것 같은데, 정신적인 내면은 너무 황폐해 버렸습니다. 저희 교회 다니다가 지금은 목사님이 되셨는데, 그 분이 울먹이면서 "목사님 세상에 이럴 수 있는 거예요"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데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그 목사님의 처남 가족이 영등포에 살고 있는데 부부가 모두 학교 선생님이래요. 아들만 둘이 있는 데 국민학교 5학년, 3학년이라는 거지요.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전학년에서 둘이 다 수석이예요. 어느날 4식구가 저녁을 먹은 다음 둘러 앉아 이야기하다가 아빠가 "얘들아, 엄마 아빠 늙으면 누가 모실래" 갑론을박 하다가 결론이 안 나니 아빠가 "한국적인 전통과 풍습에 따라 맏이가 모셔라." 그랬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둘째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수지 맞았다. 수지 맞았다." 기쁨에 소리지르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첫째가 이그러진 얼굴로 "김샜구나, 김샜구나" 거기까진 그래도 듣겠는데 "아빠, 빨리 생명보험 들어둬라. 나 책임 안 질란다." 그러더라는 겁니다. 한남인들이여, 이러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역사가 이루어지겠는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세계가 만들어지겠는가 어떻게 이러한 분위기를 가지고 21세기의 험악한 역사의 언덕마루를 오를 수가 있습니까 가슴이 아파요. 아찔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

제가 지금 두루마기 입고, 털 고무신 신고 왔는데 제 나이 예순 여덟입니다 58년 전 열살 때 동대문 밖 고려대학교 근처 태능에서 살았습니다. 학교를 갈려면 십리 길을 걸어 가야 했지요. 제가 칠대 독자인데 지금은 이렇게 튼튼하지만 그때는 마른 가지처럼 말랐어요. 그래 어머님이 늘 "아니 가엾어라. 바람불면 쓰러지겠구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제 때는 운동화는 커녕 고무신도 구하기 어려워 집새기를 신고 다녔지요. 그렇데 어머니께서 지구표 검정 고무신을 사 주셔서 저만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어요. "아이구 저거 얼면 어떻게. 십지 길인데" 고무신을 명주 포대기에다 요렇게 계란 싸듯이 싸 가지고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밤새껏 고구마 굽듯 구어 놓는 거예요. 학교 갈 시간이면 이것저것 꿈지락 꿈지락 보자기에 싸고 있으면 엄마는요 뜨끈뜨끈한 지구표 검정 고무신을 봉당에다 갖다 놓고 "얘! 종수야, 어서 나와라. 어서 나와라" "엄마, 나 숙제물 싸는데 왜 그래!" 뜨끈뜨끈한 고무신이 다 식어 가니 엄마 마음이 저려 오는 거예요. 식어 가는 검정 고무신을 불같이 뜨거운 가슴 속에 부둥켜 안고 "얘, 종수야, 빨리 나와." 제가 책보자기를 메고 봉당에 나오면 어머니는 가슴 속에서 다시 뜨거워진 고무신을 얼른 대령하는 거예요. 그걸 신고 십리 길 갑니다. 가면 갈수록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이 아랫 종아리에서부터 가슴으로 얼굴로 전달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인생이 만족한지, 왜 그렇게 행복한지, 왜 그렇게 예순여덟 고목이 된 지금도 그 진한 사랑이 내 가슴 속에 넘쳐 흐르고 있는 것인지.

한남인들이여! 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회복하소서! 형제를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고, 길을 잃어 버린 민족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모세의 심정을 여러분은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가능성이, 이 대학의 전신인 대전대학의 뿌리가, 맥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전승되고 있기에 여러분들이 이것을 기억할 때, 바로 거기에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석학이었어요.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 한 가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했어요. 고린도전서 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겐 어리석은 거지만 구원받은 나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3:16에 사도 요한은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으니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사랑, 이 뜨거운 십자가의 사랑, 나 버림의 사랑, 자기 희생적인 삶을 가족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완성하는 그리스도의 처음 사랑을 우리들은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어려서 초가집에 살았는데, 그 시절 봄이 되면 닭이 병아리를 깝니다. 엄마 닭이 둥우리에서 병아리를 모두 데리고 나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모이를 주어 먹이지요. 그 때, 고양이가 습격을 합니다. 그러면 재빨리 엄마 닭은 병아리들을 날개 안에 품고 목숨을 걸고 고양이를 막아냅니다. 할 수 없이 고양이가 물러 가지요. 그 뒤에 다시 사나운 개가 덤빕니다. 또 다시 어미 닭은 병아리를 보호합니다. 위기가 지나 가면 이제 더 무서운 독수리가 급습을 합니다. 그래도 어미 닭을 또 날개를 펴서 병아리의 생명을 지킵니다. 전 어려서 그런 구경을 많이 했습니다. 원형적인 사랑이지요.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이예요. 일본 사람이 너무 못되게 구니까, 아시아 사람들을 잡아다가 소나 돼지처럼 마구 도살하니까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으신 거지요. 중폭격기로 신형 폭탄을 히로시마 상공에 떨어뜨린 거지요. 철근 콘크리트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그 불빛에 사람들은 새까맣게 타 버리고 8시 15분에 모든 것이 정지됐습니다. all stop이예요. 봄페이의 최후의 날이, 소돔과 고모라 성의 최후의 날이 일본 히로시마에 도래했다고, 신문 방송 기자들이 사진에 담기 위해 히로시마로 들어 갔습니다. "냄비까지 다 탔구만" 지나치려는데 그 냄비 안에서 15마리의 병아리들이 날개치며 뛰어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냄비가 아니라 어미 닭의 새까맣게 탄 날개죽지였던 거예요. 원자탄의 섬광도 날개를 관통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기사를 읽고 한없는 감동의 눈물을 쏟았던 일이 있습니다.

제 아버님은 서울 종로 YMCA 회관 옆에 있는 성동교회에서 목사로 계셨는데, 58년 전 그때 아버님 연세 41세에 수요예배 설교 도중에 뇌일혈로 돌아가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울며 불며 7대 독자인 나를 데리고 태능 배꽃피는 마을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정말 어미 닭 같은 희생적인 삶을 사시는데, 낮에는 하루종일 과수원에서 일하시고 밤에는 삯바느질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나를 보통학교 졸업시켜 주셨어요. 보통학교를 졸업한 나는 다시 종로 5가에 있는 경신학원에 들어 가게 됐는데, 수업료가 비싸니 어머니는 세브란스 병원 식모일로 돈을 버셨어요. 그다음 다시 서대문 신촌에 있는 연희학당(현재 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시키셨어요. 어머니는 식모살이하면서 저를 공부시키고 게다가 과수원 3,500평까지 장만하셨어요. 정말 놀라우셨습니다.

저는 그때 문학도 공부하고 철학도 공부하고 뭐 별거별거 다 했어요. 백낙준 박사를 비롯 최현배 박사 등 그때 참으로 쟁쟁한 석학들이 계셨거든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고생고생하면서 공부시켜 주시는 어머니께 효성을 다 해야 마땅하지 않아요 그런데 쥐꼬리만한 인간적인 지식 때문에 하나님은 죽었다, 십자가의 기도교는 노예의 종교요, 패배의 종교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버리고, 어머니를 헌신짝같이 버렸습니다. 슬픈 이야기이지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처럼 그 귀한 재산을 방탕한 생활로 다 허비하면서 살았습니다. 뭐 젊은 나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제게 한 가지 한으로 남은 게 있어요. 제가 술로 방탕한 생활을 하니 어머니는 밤새도록 창가에 호롱불을 밝혀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술에 취해 친구들 4,5명을 끌고 집으로 와서 어머니보고 "어머니여 술상좀 받아옵소서" 이게 사람입니까 인간 이하 아닙니까 어떻게 그 사랑의 어머니에게, 더구나 목사 사모인 어머니를 향해 술상을 봐 오라고, 지식이란게 아무 것도 아니예요. 명문학원에서 공부한 것, 그저 영어좀 알고, 문학을 알고, 역사를 안다해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진리가 떠났을 때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떠났을 때에는 7대 독자의 지성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머니로 안 보이고 주모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넘어짐의 역사가 있었어. 어머니는 그때마다 한 번도 "이 자식아, 네가 인간이냐 너 같은 건 나가 버려라. 너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어!" 그런 말 하지 않았어요. 그 아들을 볼 때마다 상한 갈대로 보였으니 사랑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술병을 행주치마에 감추고 술을 받으로 갈 때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처럼, 얼마나 많이 우셨을까. 그렇게 5년, 10년 동안 술상을 봐 오셨어요.

15년만에 제가 어머니의 눈물 기도로 다시 돌아와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학을 마쳤습니다. 신학을 마치고 배꽃피는 동산으로 다시 돌아 왔을 때에는 사랑의 어머니는 급성위암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어요. 급성위암은 많이 살아야 6개월밖에 못 사는데 너무 아픈 병이래요."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얘야, 종수야! 그런 소리 하지마. 네가 다 몰라서 그랬지 뭐. 알면 그랬겠니." 그래요. 제가 몰라서 그런 겁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못박는 무정한 군중들과 로마 군병을 굽어 보시면서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말할 수 없는 동정과 사랑, 연민의 정을 마음에 품으면서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용서의 의미를 어머니의 비극적인 임종 시간에 깨달았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해 봅시다. "얘야 괜찮다. 다 모르고 그랬는 걸 뭐." 한남인들은 이 사랑을 가지고 모세처럼 이 민족의 허물과 잘못을 위하여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모세의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맥과 뿌리를 이어 받기 바랍니다.

24년 전 어머님이 돌아 가실 때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으려고 하니 도저히 안 되겠어요. 그 어머니의 아름다운 심장을 배꽃피는 동산에, 어머니의 눈물과 땀을 밑거름으로 하여 장만된 그 뒷 동산에 묻어 드리자. 그래야 오래오래 어머니와 함께 살텐데. 그런데 마음에 가책이 와요. 이 뻔뻔스런 녀석아! 살았을 때에는 죽도록 고생만 시키더니.아무말 못하고 어머니 머리맡에서 울었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만신창이가 된 아들의 가슴을 훤히 들려다 보고 "얘, 종수야! 울긴 왜 우니. 울지마. 끌고 가지마라. 너 고생한다. 배꽃피는 뒷 동산에 묻으렴. 그럼 내가 너와 같이 여기서 오래오래 살거 아냐" 목석같은 나는 이 어머니의 사랑에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갈보리 언덕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실 때 우편 강도가 울며 울며 "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러나 살인강도의, 지옥의 밑바닥에서 형벌을 받아야 할 그 죄인의 호소를 들으시고 사랑의 주님께서 "오늘 네가 진실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과 용서와 영생과 천국의 역사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73살까지 주사 한 방 없이, 정제 한 알 없이도 건강하게 사셨는데 74살에 위암에 거리시니 못 견디게 아프신가 봐요. "아이 아퍼, 종수야. 나 아퍼. 아이 아퍼 죽겠네." 너무 어머니가 불쌍해요. 손발을 만져 봤어요. 뼈만 만져져요. 가슴을 만져 드렸어요. 뼈만 남았어요. 그때 제가 통곡했어요. 그때 제가 부서졌습니다. 저주받아야 할 사람은 난데 아들의 형벌을 대신 어머니가 담당하셔서 이렇게 희생 제물이 되는구나. "어머니 이게 다 저 때문이군요. 그렇죠" 그랬더니 "얘, 정수야. 그런 소리 하지마. 다 이 어미의 허물 때문이야. 내 탓이다." 뼈만 남은 가슴을 두드리면서 어머니는 당신 때문이라는 겁니다. 내 탓이다. 내 연고다. 내 까닭이다. 제가 그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정오에서부터 오후 세 시까지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그야말로 지옥의 밑바닥으로, 저주 덩어리가 되어 버림받은 그 시간 주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 그리스도의 그 절대의 사랑에 아픔과 슬픔과 죽음의 의미를 그 시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가슴을 이렇게 때리면서 "다 나 때문이야" 이렇게 해 봅시다. 왜 나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지. 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점점 가정은, 사회는 지옥으로 변하게 되지요. '나 때문이다' 할 때 가정은, 사회는 밝아질 수 있으며 사랑의 샘물이 넘쳐 흐르는 거지요. 다른 대학의 학생들은 이 민족의 아픔을 짊어지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 한남대학의 젊은이들은 이 민족의 아픔을, 약점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 설교가 이 시간으로 최후의 설교가 되어도 좋아요. "얘야, 괜찮다. 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 사랑의 샘물이, 사랑의 power가, 신비로운 능력이 한남인들의 가슴 속에 넉넉히 흐를 것입니다.

어머니는 몰골이 말할 수 없이 다 상대 가지고 "아니 목 말라. 목 말라."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 마르다 하신 그 말씀처럼 어머니는 "아이 목 말라 죽겠다. 얘 종수야" "어머니, 저 때문에 얼마나 속이 썩으셨어요." "아니야, 그저 내가 죽고, 내가 썩어야지. 내가 죽고 썩어만 봐라. 너 많은 열매를 맺을 거다. 너 잘 살거다. 얘야, 너 잘 믿어야 한다. 너 믿음이 약해. 너 십자가 지는 인내가 약하다. 얘야, 너 잘 죽고 썩어야 한다. 그러면 영원히 천국에서 더 살게 될게야." 이 말씀을 남기고 고개 숙여 운명했습니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어머니의 심장을 배꽃피는 뒷 동산에 묻어 드렸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가슴을 치고 땅을 치고 대성 통곡하였습니다. 어머니의 관이 배꽃피는 동산에 하관하던 그 시간 그 얼굴에 흰수건을 썼던 사망의 아들이 새롭게 살아나는 놀라운 삶의 거듭됨의 역사가 마침내 반석이 꺽어지면서 회개의 눈물 속에서 사랑의 샘물이 흘러 나기 시작했습니다. 7년 동안 울었습니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울며 울며 기도했지요.

지금부터 16년 전이지요. 어머니 무덤 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꿈을 꿨는데, 갑자기 어머니의 무덤이 황금빛으로 빛나면서 온 과수원이 그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예요. 꿈에서 꺽어 났습니다. 제 가슴이 불같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과수원 팔아서는 안 되겠구나. 어머니 무덤 옆에 사랑의 겨자씨 교회, 밀알의 교회를 지어야겠구나. 그래서 그해 구월 어머니 무덤 옆에 38평의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기도하면요, 어머니는 죽었는데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 모르고 그랬는걸. 나와 같이 살자. 나 때문이다. 내가 썩어야지." 아벨은 죽었는데 믿음으로 말하듯이, 손양원 목사님은 죽었는데 여수 애양원 뒷 동산에서 나환자들을 위하여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시듯이.

그래서 교회가 예쁘게 성장합니다. 눈물의 기도를 밑거름으로 해서 교회가 자라나요. 밀알 하나는 정말 작은 존재 아닙니까 그러나 그 한 알 이 땅에 떨어져 자기 희생의 삶을 완성했을 때에는 30배의 놀라운 새 생명체가, 60배의 새로운 생명체가 100배의 새 생명체가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지요. 겨자씨는 아주 작아요. 채송화씨는 겨자씨에 비하면 왕초예요. 겨자씨는 바늘 끝으로 꼭 찍어 놓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씨가 땅에 떨어져 자기 희생의 삶을 완성했을 때에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더 커서 새들이 날아와 고달픈 날개를 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38평의 자그마한 예배당을 짓고 그 옆에 애기를 가진 엄마들을 위해 조그맣게 방을 지었거든요. 제가 축도를 마치고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반갑습니다. 모르고 그랬는 걸 뭐. 너 나와 같이 살자. 나 때문이다." 이 말을 꼭 합니다. 그러면 그 애기들이 이 사랑의 말을, 이상의 메아리를 자기 가슴 속에 심는 거예요. 그 아이들이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거지요. 아름다움의 역사가 일어 납니다.

우리 교회를 관리하시는 집사님이 있는데 애기들이 셋이예요. 혜란이란 아가씨는 연세가 넷이구요, 그 오라버니 광남 씨는 여섯이지요. 그런데 몇해 전 부활절 아침 혜란 아가씨가 고무줄총으로 힘껏 쏴서 오라버니 여기를 딱 맞췄어요. 오라버니의 옥체가 얼마나 아프셨겠어요. 뭐 새빨갛게 부르트고, 보통 오라버니 같으며 "요 계집애가, 요걸 그냥!" 독기가 발해서 잡아 먹을 것처럼 할 거예요. 그러나 여섯해 동안 사랑의 샘물을 먹은 우리 아들 광남이는 "얘, 혜란아 괜찮아. 다 몰라서 그랬는 걸 뭘, 괜찮어." 난 아이의 어머니 임집사님한테 그 이야기를 듣고 왈칵 울어 버렸어요. 한남인들이여, 울며 불며 사랑의 씨앗을 뿌렸을 때 마침내 사람의 열매가, 용서의 열매가, 화평의 열매가 배꽃피는 동산에 열렸어요. 이것이 삶의 결실이죠. 이것이 천국인 겁니다. 여기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우리 교회 지현이란 아가씨는 두 살이지요. 그 오라버니 재현이는 네살이구요. 그런데 엄마가 이 아이들을 잉태했을 때부터 늘 '고맙습니다. 나 때문이다' 들었거든요. 태아 교육이라는 게 있지요. 태속에서부터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 주면 그대로 인격화된다는 겁니다. 자 그런데 몇 해 전 성탄절이 가까와 올 무렵 우리 꼬마 도련님 재현이가 교회 앞에 있는 태권도장에서 연습하는 광경을 보고 집에 와서 닥치는 대로 얏! 얏! 해가며 걷어 찼다는 거예요. 그래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항아리를 깼는데 엄마가 화가 나서 "이 새끼가, 이걸 그냥!"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무참하게 무너지는 거지요. 살벌해요. 그때 두 돌 잡수신 지현 아가씨가 엄마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 보면서 "엄마, 오빠 때문이 아니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 이러더라는 겁니다. 이때 엄마의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얘, 지현아! 왜 너 때문이니, 다 엄마 때문이다." 마침내 천국의 역사가 일어난 거지요. 한남인들이여! 우리 두 돌밖에 안 되는 지현이가 그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낙원의 역사를 재창조할 수 있었겠어요.

창우라는 남자 애가 있는데 한 돌하고 5개월 됐어요. 여자 애는 좀 말을 빨리 배우는 편이지만 남자 애들은 느리거든요. 창우네 집이 어떻게 해서 모든 재산을 다 날리게 됐지요. 그래 늘 "으이그 지긋지긋해. 진작 죽어 버려야지."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창우가 "엄마!" 하더니 "나 때문이다." 이 소리가 안 나오니까 "엄마"이러면서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더래요. 그때 엄마가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 차리고 그동안에 쌓였던 미움과 불평과 원망이 다 허물어지더라는 겁니다. 용서의 샘물이, 사랑의 샘물이 솟아나며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을 느꼈다는 거지요.

이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계명, 십자가의 도를 통해 사랑하고, 용서하고, 동정했을 때 이미 우리들의 가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으로 충만케 될 것입니다. 여기 우리들의 삶이, 거듭남의 삶이, 문제 해결의 삶이, 결실의 삶이, 천국의 삶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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