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기를 부인하는 삶 (요 16:12-15)

첨부 1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거의 다 마치고 이 땅을 떠나가실 날이 얼마되지 않았을 때 떠나가시면 성령님께서 오실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 성령님께서 오셔서 행하실 근본적인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 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많은 신자들이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성령님의 나타나심에 따르는 여러가지 기적들과 기이한 일들을 많은 성도들이 목도 하고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성령님의 가장 큰 사역은 초월적인 기적이나 커다란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과 자신이 기대가 다른 지를 모르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이같은 현상은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인간의 본능과 체질에 적응되기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아직 절실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 나는 부작용들인 것입니다.

쉽게말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가만히 두어도 자라나는 나무 같지는 않습니다. 신 앙이야 말로 정말 가꾸어야 되며, 본인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긴장하며 애써야 되 는 일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 과같이 사랑하라 하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명령들이 모두가 다 필 사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신앙이란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천성 적으로 할수 없는 일들인가 하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 생활을 해오신 분들이 교회 안에는 많이 있습니다. 믿는 부모 밑에서 자라나며 어렸을 때부터 이미 환경과 분위기가 교회 안이었던 분들이 있습니 다. 교회 테두리 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얻은 이익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테 두리 안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과 손해도 또한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교회 안에 오래 지냈다는 것이 자신의 신앙을 이롭게 해주기 보다 더 상처를 주어버 리는 부작용 속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과 교회를 부정적으 로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진리와 생명과 영적인 것에 대 하여 잘 적응을 못하는 인간인가를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이란 그리스 도의 영광을 나타내며 산다는 것이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원래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편 을 든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뒤를 쫓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쪽에 설때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 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므로서 가능합니다. 오늘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우리 인생이 얼마나 주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존재인가 하는 말씀이 오늘본문 12 절에서 놀라운 힌트가 나타납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지금 예수님께서는 3년간이나 예수님을 쫓아다닌 제자들마저도, 예수님께서 이 세 상을 떠나가셔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었더라고 하십니다. 제자 들의 편에서 볼때에 얼마든지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승리의 나팔을 울리며 그를 추종하하는 자들과 그의 민족을 위하여 독립된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들수 있으신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지 그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언제나 해당되는 의문거리라고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전지 전능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어찌하 여 예수 믿는 우리들이 정직하게 살고 의롭게 사는 데 대하여 제대로 보답을 하시지 않으시는가'하는 의문을 가질 때가 많은 것입니다. 또한 `왜 교회들이 그 모양 그 꼴이며 왜 별 신통 찮은 사람들이 목사를 하는가'하는 의문들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 간단하게 보고 판단할 문제 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괜챦은 사람들이 일을 맡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의 공통된 통계입니 다. 장로가 평신도보다 꼭 낫지 않으며, 목사가 평신도보다 꼭 낫다는 법은 없습니 다. 잘난 평신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똑똑한 평신도들은 대개는 교회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열심을 부리는 사 람들은 대개 좀 모자란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고 밖에서 비평이나 하는 사람들은 훨 씬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 사람들은 주의 일에 잘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똑똑한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보통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 이 언제나 똑똑한 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일을 하게 되면 어느날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야, 저 정도 설교하는 것 갖고도 잘하는 것이라 하는데 나를 시키면 세 배는 더 잘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목사 에게 있어서 설교란 일주일에 한 번씩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과 같습니다. 그만큼 혼신을 쏟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주의 일은 외적인 재주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육적인 재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근본적이고도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인간이란 무식하며, 싫어하며, 생래적으로 입맞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 들의 모든 말들은 육신적이며 세상적인 차원에서 똑똑한 것이지 영적인 차원에서는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사역과 그의 신자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그리 스도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들이 사람들에게 그토록 대접을 받지 못하고 외면 당했었지만 사실은 그 일들이야 말로 옳은 것이며 복된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임을 확인시키는 작업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확인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는 것만큼 우리 자신이 영적인 문제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고, 배은망덕하며, 대적하여 처참한 자리에 있는가가 동시에 확인되는 일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원래의 모습이 얼마나 쓸 모없으며 죽어 마땅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깨닫고 아는 것만큼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 를 드러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어느 틈엔가 자기 자신이 나타나 그리스도의 영광 을 가리우고 방해하는 자리에 앉아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기억할 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롬8:26절에 의하면 성령님께서는 지금 도 이렇게 밖에 사역을 하시지 못하신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족속입니다.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 로 우리를 위하여 지금 구하셔야 됩니다. 즉 성경이 요구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아 버께로 돌아사시면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허락하시고, 권고하시는 것 들, 즉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이러한 내용들을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 여금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내용들 을 기도하고 기대하고 있기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밖에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 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는 그 내용이 무엇일 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 린 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말씀들과 그 약속들, 그리고 그 계획들이 사실 이며 복된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임을 확인하는 작업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이요, 또한 동시에 성령님의 간절한 소원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예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확인되는 순간 반드시 부수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참으로 무지하며, 죄악 덩어리요, 완악하며, 비천하며, 저주받을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어리석게 고집부리고 있는 것들이 동 시에 확인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이같이 변화되기를 탄식하기 까지 원하십니다. 그렇게 변화되고 확인하고 알게되면 우리의 신앙이 올바로 성장하 게 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복된 자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히3:1절에는 이렇게 바뀌어지고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좀 더 직설적으로 표 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 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은 신자들이 꼭 기억해야 될 말씀입니 다. 이 말씀을 제대로 명심하지 않기 때문에 딴소리 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최고의 적이 누구입니까 기독교의 탈을 쓰고 딴소리하는 자들입니 다. 통일교 문선명이나, 구원파의 권신찬의 딴소리가 바로 그 예들입니다. 사기꾼들 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경이라는 등등의 단어를 쓴다고 해서 그들이 기독교인인 것은 아닙니다. 양을 가죽을 쓴 늑대요 사단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하셔야 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그 앞 뒤의 말씀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 선 그 앞부분을 읽어보십시다. 히2:14-18절을 보시겠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함께 속하심은 사 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 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 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 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여기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시기 위함인 데,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 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게서는 인간으로 오셨으며, 또한 십자가 를 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난받아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 아 버지의 뜻을 자원하여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 셨고, 자기 목숨을 우리 죄의 대속물로 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나중에 말씀하시기를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셨는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하라고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신자들이 기억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의 핵심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나 한 사람을 기쁘게 하며 만족시키기 위하여 모인 곳이 아닙니 다. 교회는 신앙의 훈련 도장입니다. 다른 데서 만났거나 세상에서 그 일을 당했으 면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을 교회였기 때문에 참을 수 밖에 없었으며, 교회였기 때 문에 양보하는 일들이 생기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회였더라면 도무지 훈련 받으려 하지 않았었을 고집과 이기심과 거친 부분들을 훈련하여 고쳐 나가게 하는 곳으로 존재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저 사람만 없었다면' 하는 단서를 붙여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할지라 도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함께 만나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됩 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훈련이란 결과적으로 내가 하나 더 양보하고 내가 한 번 더 죽어서 한 사람을 살려 내며 한 사람을 진리로 나아 오게 하는 싸움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지금 성령님께서 우리 중에 와 계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같이 하면서도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훈련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안 되 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며, 양보하며, 죽는 일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차라리 성경 66권을 외우게는 할 수 있으며 여러가지 문제에 있어서 지식있는 신자 로 키울 수는 있는데, 지며 양보하며 죽는 신자로 만드는 것은 참 안되는 일중의 하 나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가장 큰 일입니 다. 빌립보서 2장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높이 드셔서 영광의 자리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들어 영광의 자리에 앉히는 일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우리 중에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영광을 드러내시는 사역을 행하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바로 그와같은 자리에 힘차게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우리의 교회는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와같은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 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런 방해꾼은 안 되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낮 추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죽을 수는 없다 유혹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험 이 신자에게 있어서 언제나 지는 시험이요, 가장 큰 시험입니다. 세상에서 지고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죽어야 될 사람 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할 것이 하나 있다 면 이것입니다. 이제는 직접적으로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설명 하고 지적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로 요한 계시록의 앞부분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 에 보낸 사도 요한의 서신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면에 이어 책망과 경 계의 말씀이 항상 나타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맨 먼저 에베소 교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계2:7절을 보십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 사도 요한을 만나 말세에 일어날 일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맨 끝절마다 후렴같이 등장하는 말씀이 "귀 있 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거듭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지적과 권면 의 말씀을 들을 귀를 갖고 들으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교회에서 보낸 편지는 이런 지적이 들어 있습니다. 계2:4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예수를 믿고 구원의 감격을 갖는 것은 상당한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감격이 그이후로 계속 연장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구원 얻은 것이 감격스럽다면 그 이후의 일들은 말할것도 없이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 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하나님의 자녀된 인생 길을 걷는 행복과 감격도 가히 무엇과 비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가 분명히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 구하고 그 이상 있어야 할 신앙 생활의 꽃과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대신 나를 증명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 니다. 이것은 처음 사랑과 열심을 잃었기 대문입니다. 계3:1-3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 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신앙 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잠자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형편이 어떠합니까 구원은 얻었습니다. 에베도 교회처럼 처음 사랑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 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인정하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고 합니다. 이름 은 산 자입니다. 신자입니다. 그러나 신자같이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에 게 있어서 늘 어려운 싸움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해 볼때에 예수를 처음 믿은 것과, 믿은 다음에 신앙 생활을 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어렵습니까 믿은 다음의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더 어렵 습니다. 예수 믿기 전까지는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믿었습니다. 믿고나 자 내가 왜 이걸 일찍 몰랐던고 하면서 믿고난 다음의 확신과 영생에 관한 것 등 으로 기쁨에 사무치게 합니다. 한 없이 기쁩니다. 그런데 믿은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내가 생각하며 애쓰며 노력하지 않고는 한 걸 음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전에 믿지 않던 생활로 되돌아가면 이 젠 편한 것이 아니라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나서 믿는 자답게 되어진다는 것이 은혜가 떨어지면 참으로 피곤한 일로 비쳐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벗어나오기까지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벗어 나와서가 어려웠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육지같이 건너서 애굽을 벗어 나왔습니다. 그들 스스 로가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해서 광야 40년 유리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 고 그들은 `이럴려면 왜 데리고 나왔느냐'며 늘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은 신자의 생활을 정당하게 걸어서 가나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의 무서운 함정은 자신이 신자로서의 이름을 가졌는데도 신자답게 살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 신자의 길은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길이 아니라 반드시 가야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하여서 포기하고 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같은 사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지적해 주는 말씀이 계3:15-18절의 라오디게아 교 회를 향한 지적에서 잘 나타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 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교회란 한 번씩 나와서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 기능을 다하는 것이 아닙 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참여시켜 여러분에게 어떤 봉사직이든 맡기시려 합니 다. 여러분이 교회 안으로 들어 옴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부딪치게 하여 여러분 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가졌던 지혜와 세상이 준 교양과 상식과 예의범절로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는 영적 싸움에 직면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난하며 벌거 벗었으며 한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확인시켜 마침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 어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은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부요한 자로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씩 나와서 자리나 채웠다 돌아가는 것으로 신앙 생활을 다 했겠거니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처음 나오신 분들은 교회에 잘 나오는 것으로도 대단 히 큰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건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 임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꽤 오래 신앙 생활을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 생 활이 여러분에게 어떤 간증거리와 풍성한 것들을 경험하게 만들었는지를 돌이켜 보 십시오. 잘못하면 우리는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이름 하나밖에는 갖고 있지 않는 사 람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신앙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얼마나 높아졌 으며, 여러분이 믿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얼마나 낮아졌으며, 얼마나 겸손해졌으며, 얼마나 인내하게 되었으며, 얼마나 충선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는 그러한 싸움을 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싸움을 위하여 빌립보서3:10-11절에서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을 세상 학문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입니다.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일류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으며 박사요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요 뛰 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해롭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그 지식들과 원리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으며, 매일 죽었으며, 자기를 없는 것으로 여기는 자리에 들어 가기로 결심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더 알기를 원했습니 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를 결심했던 것입 니다. 이 세상의 것과 연결되는 지식, 지혜, 권세가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인 그리스 도의 죽음을 통해서 나아가는 부활의 자리, 영적인 자리 영원한 자리, 생명과 진리 의 자리로 나아감을 얻으려고 그토록 애써 달려가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얼마나 이 세상 것과 다른가하는 사실이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놀랍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5:38-42절을 보십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 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 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 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여러분에게는 이같은 일이 가능합니까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얼마나 이런 말을 쉽 게 하는지 모릅니다. `누굴 바보로 알어 예수를 믿으니까 완전히 아주 그냥 먹던 떡으로 알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목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것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에 성령님께서는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고 계심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결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교회가 창설되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게서는 오늘도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어찌하든지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높임으로 나의 죄악됨과 주님의 필요성을 절실히 확인해야 됩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주의 죽음심을 본받아 그의 고난에 참예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여러 분의 목마름이 되어야 하고 소원이 되어야 하며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주님 께서 성령을 보내신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같이 변화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계속되는 훈련에 기쁨으로 참여하고 열매맺는 성 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