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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빼앗길 수 없는 기쁨 (요 16: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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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앞 부분의 말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특별히 23절의 말씀은 좀 더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묻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혹 구하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주(주)가 달려 있습니 다. 그러니까, "그날에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리고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는 셈입니다.

물론 잎에 있는 `구한다'는 단어와 뒤에 있는 `구한다'는 단어가 같은 단어이지만 뜻이 조금 달라서 우리말 성경에는 앞에 것을 `묻지 아니하리라'로 바꾸어 써놓은 셈입니다. 그러나 그냥 언듯 보기에는 모순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할 것 은 없고, 그러나 구해야 되는 그런 이상한 설명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셈입 니다.

그런데 신자란 정말 구할 것은 없고 구해야 되는 사람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습 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을 좀 더 확실하게 살펴봄으로 여러분의 신앙이 분명해 지고 나아가서 분명한 새 결심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질 것입니다.

 <본론>

우리는 이같이 이상하게 보이는 말씀이 이런 내용 속에서 나왔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6절의 말씀같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걱정과 근심 속에 싸여 있었습니다. 예 수님께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0절에 가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라고 예 언하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서 떠나야 된다는,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죽으셔 야 된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시각으로 볼때에 예수 님이야말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광풍을 잠잠케 하 시는 실력을 가지신 분으로서 충분히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독립을 시키고 적군들을 물리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시킬 수 있으신 분이신데 왜 굳이 죽겠다고 하시고 떠나가야 하시겠다고 하시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 연히 제자들의 마음이 근심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3년 동안 좇아 다녔건만 예수님의 하시는 그 일들의 중심 내용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오해와 근심이 생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 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은 바로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충실하고도 일관성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가시면 이미 이같은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요3:1-3절을 보면 니고데모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하여 묘사하는 말들이 하나도 맞지 않다는 것을 지 적하십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선지자입니다. 선생님입 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고 그랬더니 예수님 의 대답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너는 지금 장님이 다. 아무것도 못 보았다!'라는 식으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6:22절 이하의 말씀도 결국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다녔었으며 그의 제자 노릇을 했지만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오 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보고,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그들이 모르고 있더라는 이야기입니 다. 저들은 근심하고 있었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베드로 같은 경우는 예수님 께서 가시겠다는 길을 가로막고 서는 일까지 서슴없이 행했던 자였던 것입니다. `주 여, 이 일이 결단코 주님에게 일너날 수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는 즉시 `사간아, 물러가라!'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기도 를 해서 어떤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고 확신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적인 선상에 서 있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한 것같이 아 무것도 모르는 자와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를 능력의 종교라고 하여 능력이 말해주는 줄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 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예수님의 하시는 일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며 행하는 모든 능력들은 전혀 신앙이 아닙니다. 마7:22-23절을 보십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 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능력이 나타나면 참된 기독교인 줄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말 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어 달리면 이 문제를 풀어주시는 것이 신앙이라고 쉽게 생 각합니까 물론 기독교에 기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갈급한 문제들에 대하여 응답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기독교의 최고의 핵심은 아닙 니다. 그런한 기적들이 기독교 안에 부수적으로 따르지만 핵심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핵심이며 중요한 것인가 하는 사실을 혼동하여 그 순서가 뒤바뀐 신앙들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와같은 일들을 왜 제자들에게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묘사했는 가를 추적해야 됩니다. 이 말씀은 결국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그 일을 이루셔야만이 우리의 영안이 뜨여지고 비로소 하늘나라를 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모든 문제들이 풀립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인생이 무엇이며, 우리의 주인이 누구신가 하는 사실이 풀려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역사상 가장 깊이 고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고 타마 싯타르타 석가모니입니다. 그래서 그가 불교를 만들었습니다. 왜 사람은 태어 나는가 태어났으면 왜 행복하게 못 살고 죽으며 병들며 늙으며 고생해야 되는가 또한 인생이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들을 고민하였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에 대한 해답은 우리 신자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영안이 열려져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을 제대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창조되었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배반해서 생명과 축복의 자리에서 떠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출한 자식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절망 뿐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각도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들입니다. `아니 이렇게 믿음으로 바르게 살고 충성된 신자인데 이렇게 고 생을 해야 됩니까'하는 종류의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깊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한 아직도 구 원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기에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이해 되지 않는 상황들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문을 계속 열어 놓기 위하여 하 나님의 심판을 보류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보류되고 있 기 때문에 정당한 신자들이 꺼꾸로 세상에서 공격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의 복음과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신자들이 감당하고 이겨 내야 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는 복음을 위해서 변한 제자들의 변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4:23-28). 제자들은 예수님의 편을 들고 있는 것 때문에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었습 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그들이 당한 그 고통때문에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들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처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들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시려 고 하신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에 그들에게 더 이상 갈등이 없었습니다.

누가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세상 일들이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눈 물이 완전히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정말 울 수 있고 안타까와 할 수 있습니다. 잠시 살 인생이요, 영원을 준비할 한 번 밖에 없는 기회 인데 세상 사람들은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가진 돈을 탐낼 뿐이며, 썩어질 세상의 것을 탐낼 뿐이지 가치있고 영원한 것을 하나도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끼리 모였는데, 한 애는 전자오락 갤러그 60만 잘 하는 실력을 가졌고, 또 한 아이는 야구 연습장에서 20개 나오는 것을 다 때리는 실 력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에게 그것이 자랑이 될 수 있습니까 이들에게서 정작 필요한 것은 이번 모의고사 성적에서 최고의 성적을 받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고 3학년 학생들끼리 모였는데 누가 전자오락을 잘 하는가가 자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부모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얼마나 한심해 보 이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들은 그러한 것들이 자랑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와같은 허술함과 어리석음이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나이가 몇 이십니까 얼마나 오래 사신 느낌이 드십니까 바로 엇그제 같이 학교에 다녔던 것 같지 않습니까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라고들 그럽니다. 이제 내일 모레 천국 갈 준 비를 하여야 할 나이인데 청춘이라는 생각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엇그제만 하더라도 중등부 학생이었던 아이가 어느날 결혼식 청첩장을 보냅니다. 그제서야 나 자신이 그들에 비하여 꽤 늙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착각 속에서 살 아가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한 번도 제대로 준비해 본 적이 없는 엉성한 사람들 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게되자 드디어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존심도 아니고 세상의 것들도 아 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우리가 타고나는 것도 아니며 경험한 것이나 우리의 실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살게될 전혀 다른 인 생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롬8:28-30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 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 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 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이 약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 이 내 계획과 내 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의 계획되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가 정 하신 길로 가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세 상이 방해하지 못합니다. 38-39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 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우리는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뺏을 수 없고 세상의 것으로 는 도움도 안 되고 방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안타까움은 늘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세상의 싸움에서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제일 큰 병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를 믿기는 믿었지만, 목표와 생각은 하나도 바꾸지 않은 것입 니다. `너희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는 그 충만한 기 쁨에 아무도 못 들어와 있는 이유는 바로 목표와 생각과 시각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 때문입니다. 방금 읽은 말씀같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 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 리라" 이와같은 감동이 일어나는 자리에 들어선 적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세상 것들 을 요구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이 대학에 붙여 달라는 것과 크게 노 력을 안해도 항상 돈이 풍족하게 해달라는 것과 그저 좋은 차 굴리게 해 달라는 것 외에는 우리의 기도 소리가 힘이 없는 것입니다.

입시철이 돌아오면 기도의 계절이 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기도합니다. 그러나 여름 휴가 때나 크리스마스 연말 연시를 보낼 때에는 안 합니다. 보너스를 받았겠다, 놀 일도 많겠다, 왜 기도를 합니까 입시철이 돌아오면 새벽기도마다 사람들이 많아집 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감동과 기쁨을 이런 식으로 그 근거를 삼으시니까 그토록 오 래 믿어도 신자가 신자된 자랑과 경험이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것들로부터 바뀌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이 오 더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로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길을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남들이 나를 낮게 평가하더 라도 이 일은 항상 내게 의미있는 일이요 이러한 힘들고 어려운 일로서 내가 커간다 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리라' 혹은 `아무것도 묻 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후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다시 약속이 연결되어 나옵니다. 그런데 "내 이름"으로 다 주시겠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과거에는 거의가 물어볼 가치조차 없는 쪽의 것들을 기도 제목으 로 삼는 신앙 생활을 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같은 물질계쪽의 제목들이 아 니라, 영계 쪽의 기도 제목으로 넘어와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물질계에 속한 것들도 이제는 영적인 방법으로만 얻는 기도가 있을 뿐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는 이러한 영계 쪽의 기도의 좋은 모범이 나타나 있습니다. 골1:9-12절을 보십시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 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 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 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로 이것이 참된 기도의 내용들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 자식을 이번에 꼭 서울 대학에 붙여 주시면 이 자식을 하나님께 딱 받치겠습니다.

제발 합격만 시켜주십시오! 그 다음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것은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욕망일 뿐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오직, 영적인 수준 향상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각 속에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 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란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주께 합당 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게 하셔야 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무슨 큰 일을 할 때에만 기 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들어 부흥회를 한다든가, 선교사를 보낸다든가, 그 런 큰 흥행을 할 때에는 설치는데 안 보이는 일을 할 때에는 절대 안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범사에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종교성을 띄고 종교적인 행사가 될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 전체에 걸친 이야기여야 합니다. 동네에서 반상회를 할 때, 집에 서 아파트를 오르내릴 때, 그때 표독스럽게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파트 경 비원이나 집으로 찾아온 세탁소 종업원이 초인종을 세 번 씩이나 눌렸다고 신졍질을 내시지 마시고 그때에 웃으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큰 일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며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 쁨으로 견딤과 오래참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자들이 제일 못 참는 것은 옳은 것을 주장하다가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용서를 놓친다는 점입니다. 내가 정당했다는 것입 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옳은 편에 섰느냐 뿐만 아니라, 옳은 자세와 태도 를 가졌느냐도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하기를 항상 승리해야 되는 줄로 알고, 성공해야 되는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밟아서 쓰실 때 도 많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제 그 두번째 기도의 참 내용을 보십시다. 골1:19-23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 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 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 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알게 해 달라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알 면 기독교는 다 아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가 필요했는가 우리가 도대체 누구길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어야 했는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신 모습을 보 고 살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의 본 이시 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오래 참으셨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모델과 샘플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 므로 이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에서 `내가 누구인가' `십자가가 왜 필요했는가'를 놓친다면 보기 좋은 이상주의가 되 고 맙니다. 우리 자신은 생래적으로 자신과 주님을 깨달아 아는 지혜나 능력을 가지 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란 이 렇게 저렇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겠지만 언제나 은혜와 긍휼로서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 하는 차원에서의 `무엇이든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는 말을 하는 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말이 옳습니다만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어떤 신자는 열심히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고 충성하는데도 애가 시험만 쳤다하면 떨어집니다. 열심히 기 도 하고 있는데 오는 감기는 다 걸립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를 안 해서 그럴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기도란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자연인의 마음 속에는 기도하고픈 마음이 생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미 정당한 기도를 하고 있으며 정당한 기도 제목을 갖고 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기 도하면 되는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열심의 산물이 아닙니다.

제대로 안 되는 것도 더 열심히만 기도하면 무조건 되는 이루어지는 것으로 오해해 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기도하러 들어갈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 며, 은혜를 베푸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며, 마땅히 빌 바를 깨우쳐 주시기 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골1:24-29절에서는 이 모든 기도가 영광과 축복이라는 결론으로 바뀌어 지도록 하 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허락하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 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 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 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데는 참으로 긴 시간이 걸리고, 긴 훈련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은 곧 교회에서 이루 어집니다. 교회란 신비한 곳이고 놀라운 곳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가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리라!'고 결심했는데 누구와 틀어진 마 음이 아직도 안 풀려요'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 밖이라면 어떻게 해치우겠 는데 교회 안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일들을 참고 견디면서, 우리 자신의 성품에서 가장 치명적인 약점들을 스스로 확인하게 되 고 그것을 고치게 되고 오고오는 후배들에게 전해줄 좋은 선배의 충고가 되고, 보고 배울 좋은 지혜의 말씀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이 되며 제자가 되는 그런 이익 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리들과 계명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쉽게 여러분들의 것이 되리라고는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게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계속 해 보셔야만 됩니다. 그 연습장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 와서 부딪칩니다. 섞이며 일을 함께 나눠 보십시오.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내가 알고 있었던 것 이 내 것이 되기 위하여 아직도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우리는 거기서 정당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구체적인 기도를 하게 되 는 것입니다. `주여, 이 문제를 감당하게 하소서! 여기에 인내를 주소서! 용서할 마 음을 주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이런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커가는 것입 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28절 끝에 나온 것같 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 교회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을 배우며 실천해서 내 것을 만들게 됩 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이 런 결론을 함께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골1:24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제 결심하십시오. 그러나 결심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된 것으로 착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금방 사랑하겠다고 분명히 결심하고 간증해 놓고서는 물어뜯을 듯 이 덤벼드는 사람이 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제 깨달았으니까 다 된 줄로 착각해 서는 안됩니다. 이제 다 알고 깨달았으니 내 말대로 하라는 것이 성경입니다. 깨닫 고 결심했다면 이제 입 다물고 참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 까 빌2:5-8절을 보십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 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결론>

요즘 어떤 신자들은 이렇게 종종 고백을 합니다. `나는 십자가를 질 각오를 했어.

난 이제 예수님의 뒤를 좇을거야. 날 제발 건드리지 마' 여러분, 이것이 신앙입니까 도대체 뭐가 나아졌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되고 있습니까 무엇을 참 으며 무엇을 인내하고 있습니까 과연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까 기독교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중의 하나가 기독교를 만병통치약으로 파는 것입니다.

어디를 발라도 낫는 호랑이 기름 같아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 으로부터 시선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그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바로 여러분에게 그 빼앗기지 않을 기쁨이 있습니까 빼앗길 것이라면 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 가운데서 혹시 기독교를 세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방법 정도로 알고 계신 분들이 있을까봐 걱정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도 형편없이 살다가는, 살아서도 고생하고 죽어서도 지옥가는 사람입니다. 두번째로 불행한 사람은 세상에 서는 행복하게 살았는데 죽어서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생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불행한 사람은 천국을 가기는 갈 텐데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차원에 서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죽어서 영광된 자리에 갈텐데 그것을 지금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고 난을 당하고 나서 가 보니까 안 믿었던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경우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제 여러분들은 변하셔야 됩니다. 기도가 변하고 삶이 변하고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변하셔야 됩니다. 그럴때에 세상이 도무지 빼앗을 수 없는 천국의 영광과 기쁨을 맛보면서 승리하며 나아가게 될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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