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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대구원의 완성 (요 16: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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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은 그리 간단한 말씀이 아닙니다. 16장 전체에 걸쳐 신자란 영계를 준 비하는 자들이지, 이 땅을 목적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기독교란 단지 여러분들의 세상 살이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힘 정도로 생각해서 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세상의 물질계에서 영원한 영역 인 영적인 세계로에의 변환을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알고 있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죽 었던 생명이 소생하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되며, 무엇이 행복이며 무엇이 복인 가를 아는 수준으로 나아가게 될때에 허락되는 축복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 면 이루리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세상 것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제대로 그 목표를 알고 구하고 바르고 정 당한 것을 기도할 수 있는 수준의 신자가 되었다는 뜻이 포함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그와같이 무엇이든지 하나 님의 기쁘신 뜻대로 올바로 구할 수 있는 수준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단 지 예수님만의 덕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도 상관이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미움을 받고 있던 우리가 예수님의 간절한 중재로 간신히 우리가 죽음을 면케 된 것으로 이해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를 사랑 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뜻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 리를 대속하여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이 일은 예수님의 일인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 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셔서 예수 그리 스도를 보내신 것이지, 원래 우리를 향하여 기분 나쁘게 생각하시고 밉게 생각하셨 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너무나 훌륭한 일을 하셔서 하나님도 그만 마음을 돌리신 것 이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보는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란 무속 신앙의 형태로 흐르기 쉬운 위험성이 다분히 있기때 문에 더욱 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속 신앙이 란 신이라는 신이 있다면 이 지성에 감동되어 안 주고는 못 참을 것이라는 식입니 다. 그러니까, 무속 신앙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를 감동 시키러 오셨고 바로 그 일로 돌아가신 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와같이 오늘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기독교의 구원 교리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로마서 3장입니다. 롬3:21-25 절을 보십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 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 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 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지금 이 구원의 복음을 누가 계획하고 누가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로 되어 있지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시행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어떤 착각을 하느냐 하면, 원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과 뜻이 없었는데 이렇게 처참하게 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몰래 뒷문으로 나오셔서 아버지가 쫓아낸 아들을 엄마가 몰래 치마폭에 싸가지고 부 엌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얼른 뜨거운 밥을 먹이는 것처럼, 달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 접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과 화목하게 할 것을 하나님 이 의도하시고 원하셨던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는 이미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 나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노력하고 힘쓴 어떤 것 때문에 이 구원의 지위를 얻고 이 자리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식으 구원이 정리되어 있으면 신앙은 천국 들어갈 때까지 흔들리고 있을 수 밖에 없게 되 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식 구조가 구원받은 신자들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의 진전과 성장에 늘 실패하고 마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간섭하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늘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을 다시 용서받는 일만이 유일한 신앙의 문제가 되곤 합니다. 하나 님 몰래 도망갔다가 실수를 했으니까 이제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울고불고 되돌아 오는 신앙 밖에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 울고울고 하느냐 하면 그래야지 하나님께서 내가 얼마나 회개했는가를 알아주는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으로 사랑을 했으며, 그래서 예수 그리 스도를 보내어서 어떻게 당신의 자녀를 삼으셨는가 하는 사실을 냉정히 알기를 원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데 나같은 것을 하나님이 사랑하셨는가 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강에 다리를 하나 만들어 놓고, 이 다리를 우리가 얼마나 큰 돈을 들이고 수고해 서 만들었는가를 오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그 이야기를 합니다. `이 다리를 얼마나 수고를 해서 만들었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이 다리를 만들다가 누구도 죽고 누구도 도 죽었으며, 이 사람이 돈 내고 저 사람이 돈을 내었으니 여러분들은 감히 이 다리 를 건너가려 하지 말고 저리로 헤엄쳐서 건너시오!'하면서 아무도 못 가게 가로막고 서는 밤낮으로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불꽃놀이만 합니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 다. 하지만 신앙에 있어서 신자들은 곧잘 자신의 부족함을 다른 무엇으로 보상하려 고 하는 생각은 곧잘 하면서도 십자가로 세워진 구원의 다리를 찬송하며 건널 생각 은 아예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보통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나의 운명의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기초가 되어 심각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여기서 결코 도망칠 수 없구나! 나의 운명은 이제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완전히 책임져 주시 는 안심이 있는 동시에 나는 죽었다고 복창해야겠구나!'하는 무서움인 것입니다.

군대에서 실수를 하면 세워놓고 보통 이런 복창을 시킵니다. `사회에서는 안 그랬 는데 군대에 와서는 내가 왜 이럴까 30번 복창!'그러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전혀 달라집니다. 군대는 참으로 좋은 곳입니다. 거기는 자기의 응석을 받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사람이 갑자기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입장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도망갈 수 없는 자들입 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는 안심스러운 운명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이 갈4:4-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 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 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 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것도 다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이라고 그 럽니다. "때가 차매" 그것이 이루어 졌습니다. 세계 역사에는 어떤 민족과 문화의 싸움이 아니라, 오직 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시며, 그의 부르신 자녀들을 구원얻게 하시는가 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한국의 평내에서 살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각자를 개인적으로 계획하셔서 걷게 하 신 길이고 자리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과 여기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시는 분 이 있습니까 나를 하나님께서 좀 더 여유있는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더라면 내가 더 예수를 잘 믿었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나를 좀 더 멋있게 만들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미인박명이라는 말을 들으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예쁜 여자는 다 술집에 있어요.

가정 집에는 있는 예가 없습니다. 예쁜 여자치고 시집 한 번 가고 끝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쁜 게 자랑이 아닙니다. 똑똑한 것이 자랑입니까 똑똑한 것만큼 귀챦은 것도 없습니다. 남 걱정 안 해야 될 것을 다 해야 하고, 남 못 본 것 보고 신경질내야 됩니다. 똑똑하고 살찐 사람 보았습니까 생각이 많아서 살찔 겨를이 없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행한 일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범죄가 일어나면 먹고 사는 문제로 일어난 범죄였습니다. 배가 고 파서 남의 집에 가서 강도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몽땅 성범죄로 바 뀌었습니다. 그래서 서구 사회에서는 성범죄에 관한 한 여러가지를 완화시켜서 성을 개방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약물중독에다가 알콜 중독 등으로 폐인들이 득실거리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부패합니다. 선한 것을 도무지 만들어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금도 `이것만 해 주시면 내가 더 많이 더 깊이 하나님을 사랑 할 텐데..'라고 끊임없이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 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하나님이 자녀로 항복시키는데 있어서 결코 손해를 보시는 길로 가시거나 손해 보시는 방법으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때가 차 매 누구를 어느 집에 몇째 아들로 태어나게 하시고 고등학교를 두어번 쯤 떨어지게 하시며.... 이런 식으로 인도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며, 그 앞에 항복 하게 하셔서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동창회에 나가서 잴 것은 없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행복한 사람 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일인,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집념과 사랑과 열심 그리고 그의 계획들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님에 대하여 무슨 반응을 하였거나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 하여 갖고 계시는 그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요6:38-40절을 보십시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 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분의 개인의 뜻이나 개인적인 계획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로 묶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요12:44-50절에 보면 좀 더 자세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 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 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 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 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 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완성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로 마서 5장에 보면 이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기록이 있습니다. 롬5:7-8 절을 보십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를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사 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은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좀 극단적인 표현이지마는 이제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어떤 일을 하시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 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의심을 버리십시오. 롬8:31절에 서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 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그러면 나를 대적하는 자는 누구를 대적하는 것이 됩니 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격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만큼 우리를 편드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시비를 걸면 하나님에게 시비를 거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 까 롬8:33절을 보십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를 구원하시며 의롭게 하시며 그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에 죽이시는 댓가를 치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며 이 일을 이루시기로 결심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운명적인 서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롬8:34-35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 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또한, 롬8:38-39절을 이어서 보시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 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그 사랑이 무슨 희생을 치르고 실천되었는 가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또 하나 무서운 결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부르셨고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걸맞는 자로서 우리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 은 참으로 무서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빌2:12-13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 니"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내 발로 걷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내 인생이 내 가 움직이는 대로 다 될 것 같지만, 그러나 아닙니다. 자식이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 가 움직이지만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부모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 다. 그러나 자식들도 부모가 하라는 것을 끝까지 기쁜 마음으로 하는 자녀는 없습니 다. 우리는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얼마나 많이 요구하고 있습니까 동굴에 가서 보물을 찾아 오는 것은 기쁘지만, 학교 안 가고 놀러가는 것은 안 되겠다는 것입니 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금돈도 찾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부모가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그 집념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가를! 이것을 보시면 우 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어떤 심각한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 앞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저 내 하기 좋은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라는 혼동은 하지 말아 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엄청난 집념과 기대인 것입니다.

신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 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열심어린 손에 의해 잡힌 바 된 자들입니다. 결코 자기 멋대 로 사망의 길이나 멸망의 길로 가도록 용서되지 않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나태해도 되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길이 아닙니다. 훈련되어야 됩니다. 고 쳐져야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고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 서 우리가 울고불고 하는 것은 내가 그 동안 하나님을 놓치고 도망 갔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를 내버려두지 말고 이제는 저를 다시 붙잡아 주옵소서를 위해서 울고불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는데 내가 마땅히 가 야 할 길을 가다가 얼마나 중도에 샛길로 왔다 갔다 하였었는가 하는 회개로 울고 불고의 촛점이 맞춰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게하 는 울고불고로 돌아 오시지 마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내가 가다가 그만 둔 그 시점 으로 돌아오며 다시 일어서서 이 길을 가는 결단으로서 돌아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혹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감상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기독교의 구원 관을 감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시면 늘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을 감상적인 것 으로 여기기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다가 실패를 하였을 때에 다시 하나님과 화해하 며 하나님의 감정을 풀어드리고 설득시켜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기 위 한 제사로써 회개하는 실수를 범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실족하고 실패하였다고 등을 돌리시는 하나님이 아 니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서 떨어져 나오지를 않 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 하나님의 자녀의 길이 힘들다고 팽개치고 도망갔다 오는 일을 자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팽개쳤던 그 일을 묵묵히 다시 하기로 결심하 여 내가 지난 번에 어디서 넘어지고 어느 유혹에서 졌는가를 확인해서 다시는 여기 서 넘어지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여기서 실패하지 아니 하리라는 것으로 강하게 되 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내가 요구한 인생과 하나님이 내게 요구한 인생 사이에서 충돌되고 무너 집니다. 특히 그것이 눈 앞에 이익에 관한 문제일 경우에는 영락없이 내 고집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에게 내 자녀에 관한 문제, 먹고 마시는 문재, 또한 자존심에 걸린 문제들일 경우에는 십중 팔구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길을 가기보다 이 운 명의 길을 잠시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서 놀고 오겠다는 자들입니다. 늘 여기서 넘어 져 허우적 거리다가 결국은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항복하여 되돌아 오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패하는 경험들을 돌이킬 때에 어디에다 촛점을 맞추어야 만 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자식문제에서 꼭 넘어지는구나, 동창과 이야기 할 때 내 가 그 당시에는 저 애보다 인물도 낫고 성적도 좋았었는데 내가 그만 잘못 결혼해서 이렇게 되었구나, 내 남편이 저 남편보다 못해서 라는 문제일 때에 내가 하나님께 쓸데없는 기도를 하는구나, 또 기도해도 안되니까 잠깐 신앙을 놔두고 딴 데 갔다가 오는구나, 점치러 갔다 오는구나' 하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이같은 시행착오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실패가 아니라, 여러분을 더 강하게 하는 요소로서 밑거름으로서 디딤돌로서 남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를 이 구원과 영생의 축복의 길에서 아무도 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는 심각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기뻐하시는 이 길을 가겠다고 더 많이 맞기 전에 여러분의 인생과 진심을 갖다놓고 항복하시고 그 길을 깨닫게 해 달 라고 요구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비로소 요한복음 16장 전체에 걸쳐 예수님 께서 이야기 하시는 것과 같이 `내가 아버지의 뜻을 받고 와서 행하고, 이제 아버지 께 간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자가 되어 이제 아버지 께로 갈 자들입니다. 바로 그러한 인생을 지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환난 을 당하나 우리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 신 모든 것을 방해할 자가 없는 길을 걷게된 이 평안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드시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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