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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 (요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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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대단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두시고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라'는 이 말씀을 내용으로 삼아서 그 속 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약속들과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될 기쁨들을 확인하고자 합 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시면 그의 생애 속에서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민망히 여기 시고 불상히 여기시고 슬퍼하시고 우시고 하는 것들은 있어도 기뻐하신 것 같은 표 현은 별로 안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의 평안과 그의 기쁨을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또 거기서 한 번도 흔들리신 적이 없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기쁨이고 복이 고 승리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신자들을 만나보아도 기쁨 속에 있거나 승리 하고 있거나 평화로운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일단 표정에서부터 그 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쁨이라든가, 복이라 든가, 평안이라는 것을 너무 세상적인 차원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 은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하고 성경이 정의하고 있는 평안과 기쁨과 복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하 여 좀 더 분명한 이해를 살펴 봄으로 우리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익과 특권들 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론>

우선 요15:9-11절을 보십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 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 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여기에도 기 쁨에 관한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케하기 위 하여 우리가 해야될 일은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가 내 사랑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충만하리라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15장이나 17장:13절이 사실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7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요17:10-11절을 보십시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 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주님께서 우리로 말미암 아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과 저희도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하시라는 이 부탁의 말 씀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기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15장 식으로 얘기를 하 자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거한다는 것에 대 한 다른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된다는 것은 신자의 기쁨의 유일한 조건이 된다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를 사랑했습 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에게 완성되기 위해 오셨는데 그것을 십자가 대 속의 사역으로 이룩하셨습니다. 이것을 요17:10절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내가 저희 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입니다. 이리하여 이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같 이 저희도 우리와 한가지로 하나 되게 하는 자리에 초대를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가 되는 초대의 결과 자연히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도 전달될 수 밖에 없 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이런 식으로 기쁨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 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기쁨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혼동하지 않게 되는 것 입니다. 우리의 기쁨이란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가지셨던 기쁨이며, 그 기쁨은 아 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신 그 일에 동참하고 그 마음과 뜻과 계획과 성품에 동참한 자 가 당연히 가지는 그런 감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며 가지는 그런 기쁨들 하고는 차원적으로 거리 가 멉니다. 우리의 기쁨이란 나의 욕심과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에서 나오는 기 쁨이지만, 지금 여기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의 참기쁨이란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 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만 다 해놓고 하 나님 혼자 기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일은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선한 것이기 때문에 기쁨이라는 것이 당연히 수반될 수 밖에 없는 성질 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같이 전혀 새로운 기쁨을 성경은 우리들에게 여러가 지로 확인시켜 주고 싶어 합니다.

요한복음 8:29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 느니라"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기쁨이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 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 며,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당연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가서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 대화를 나누신 이후에 동네에 들어갔다가 먹을 음식을 마련해 온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4:31-3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여기서 기쁨을 양식이 라고 예수님이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신령한 기쁨이 바로 삶의 에너지 요, 놀라운 동력원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것으로 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신자가 이 기쁨을 위해서 산다기보다, 이것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란 이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자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이러한 신령 한 양식으로 힘을 얻어서 만들어지고 움직여지는 존재입니다. 일단 무조건 살아놓고 보자는 식의 신앙은 많은 실수를 만들고 맙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자세 히 다루는 성경이 있는데 바로 하박국서입니다. 하박국서의 주제는 우리 신앙에 있 어서 아주 근본적인 문제들입니다. 합1:2-4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 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 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 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지금 하박국 선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계셔서 선하시고 의로우신데 세상을 이대로 형편없이 돌아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으신 것입니까 왜 악당들이 설 치고 있는데도 그냥 놔두며, 의로운 자들이 악인들에 의해서 고난 당하는 것을 그냥 놔두십니까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같은 질문은 오날도 마찬가지로 있는 질문들 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시원한 해답이 없다고하여 많은 신자들이 세상에 나 가면 같은 악당의 부류로 살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주일날만 신자가 되고 나가서 세상에 살때에는 의인으로 살아서 도무지 이해타산이 안 맞아 같은 악당들로 사는 것이 하나의 만연된 풍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답게 사는 모습을 거의 찾 을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의인으로 살것을 요구하면 언제나 너무도 떳떳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 살아가지고는 입에 풀칠도 못해요!'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같은 대답들을 겁도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말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시는지 아십니까 합1:5-11절을 보십시 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 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 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 니라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 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 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우리가 하는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이 세상을 이대로 놔 두십니 까 왜 악당들이 더 성하는 것을 놔 두시고 선한 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는 데도 내버려 두십니까'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아직도 멀었다! 저들은 더 악할 것이다. 악은 더 기승을 부릴 것이요 죄는 더 심해질 것이 요 악당들이 더 득죄하고 더 나서서 선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세상은 더 엉망진창으 로 굴러갈 것이니라!' 이에 질문하였던 하박국 선지가 더 이해되지 않는 이외의 대 답에 더욱 놀라서 12절 이하야 이런 반문을 다시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죄를 놔 두시지 않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습니까' 이에 하나님의 대답이 다 시 합2:4절에서 나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 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갑자기 믿음이 등장합니까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 나님이 계시는 것과 이 세상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를 알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모두 가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를 알고 있으며 하나님이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심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의 환경과 조건은 그 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로 여기에 싸움이 있고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눈 에 보이는 대로 타협할 것이냐 약속을 다라 믿음을 지켜 싸울 것이냐하는 질문 앞 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개선해 준다는 약속이 성경에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한 기쁨도 없습니다. 신앙의 기쁨은 환경과 조건을 개 선해 주는 것으로 약속된 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돈 나와라 뚝딱, 아들 나와라 뚝딱하면 다 됩니까 물론 예수 믿어서 병도 낫고 안되던 일이 잘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대개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실때 사용하는 방법중의 하나이 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 해결이 결코 목적은 아닙니다. 만약에 무슨 문제든지 다 해결되는 것이 기독교라면 신앙의 최고의 경지인 순교가 설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더 깊은 믿음과 높은 신앙의 경지가 과연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다 우리는 무엇이 부럽습니까 신앙의 깊은 경지보다 주시옵소서!라고 하였을때 척 주는 게 좋습니다. 전부가 유치원생이 되기를 자청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엉앙거리며 떼를 쓰니 원하는 맛있는 사탕과 과자가 척 나오니 신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처에 십 자가 아래 무슨 유치원들입니다. 중앙 유치원 제일 유치원들입니다. 다시말해 신앙적 으로 유치원의 떼를 벗고서 깊은 자리에 나아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주님이 가지셨던 그 평강과 기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 댑니다.

여러분, 신앙에는 유치원 과정이 있고 유년, 청년, 장년, 노년반들이 있습니다. 삼 십년을 믿었는데도 여전히 유치한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을 문제스럽게 여기지 않고 있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신앙이 뭡니까 계속적인 수준향상으로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장성한 신앙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래 서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을 맛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던 모든 자취가 우리를 위함이었듯이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영혼 들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기쁘 게 만듭니다. 이제는 돌에 맞아도 기쁘고 죽어도 기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그 를 절망과 좌절로 이끌고 간 것이 아니라, 그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 의 은총을 구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도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듯이 그의 평안과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 리도 그와같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오늘 본문 요17장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주님께서 그의 자리에 우리를 대치시키 고 있는가를 보시겠습니다. 8절에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 었습니다' 즉 주님이 받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13절에서는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줍니다'라고 말하며, 16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18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냅니다' 19절에는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 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또 22절에서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26절에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습니 다. 또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입니다' 이렇게 이 모든 말씀에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특권들을 우 리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있는 인상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기쁨인 것입 니다. 여기 말하는 기쁨이란 우리가 요구하는 어떤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내용물을 포장해서 약속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서신 그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와 그 신분 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기쁨이요, 약속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것과 같은 종류의 삶 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증언이며 또 그 일 을 이루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자였던 것같이 신자의 존재와 삶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것이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나를 본 자는 아 버지를 보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가치입니 다. 신자는 세상의 환경을 바꾸려하기보다 세상에서 그렇게 악하게 밖에 살수 없었던 자들이 나를 봄으로 하나님의 빛을 보며 생명을 보며 그 향기를 맡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이제 할게 된 하나님, 이제 알게 된 기도로 내 환경을 다 좋게 만들어서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의 기도가 이런 차원의 것밖에 없다는 것은 큰 병이 아닐 수 없습니 다. 거기에 거룩한 기쁨이 없으며, 신령한 욕심이 없는 것이 병입니다. 오직 하나 나 태와 안일과 자기 욕심으로 부리는 응석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고후5:18-19절에 보면 우리 신자들이 가진 직분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렇게 우리 신자들은 화목케 하는 직책, 화목케 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팔복 중에서도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어떤 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 음을 받을 것이요 라고 합니다. 얼마나 정확한 묘사인지 모릅니다. 화평케 하는 자 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샘플(모범)으로 설정해 놓고서 상 징으로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란 바로 이렇게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화목케 하는 자들입니다.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서 만이 화목케 하는 진리를 증언 할 수 있으며 그 빛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삶이 유일한 의미와 보 람이 이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11:28-30절에 좀 더 실제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 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 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기독교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것을 다 가지고 오면 쉬게 하는 데라고 쉽게 생각 하셔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 예수님께서 대신져 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무거운 짐을 잘 지는 법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그랬을 뿐입니다 겨울에 등산을 하게되면 춥기 때문에 방한복도 여러 개 가져가야 하고 안에 침구도 양식도 가져가야 되므로 짐이 꽤 무거워집니다. 뒤에서 보면 머리가 보이지 않게 짐 을 지고 갑니다. 그때 무거운 것과 가벼운 짐을 어떻게 넣어 가는 것이 편합니까 무 거운 것이 위에 들어갑니까 가벼운 것이 위에 들어갑니까 무거운 것을 위에 넣어야 짊어지기가 쉬워집니다. 무것운 것을 밑에 넣으면 허리를 잡아 당겨 몹시 힘들어집니 다. 그래서 무거운 것을 위에 실어야 짐이 어깨에 걸려 지기가 쉬워집니다.

바로 이와같이 예수님은 그런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내 짐을 지고 내게 오 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 '고 하십니다. 이 말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그 짐이 어찌 쉽고 가볍 습니까 주님께서 지신 그 짐이 얼마나 어려우시면 잡히시기 전날 밤에 세 번씩이나 따로 하나님께 기도를 아뢰었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짐을 지시는 일을 위하여 이 땅 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비켜 달라!'고 하셨겠습니까 얼마 나 심각한 문제였기에 그 때 예수님의 이마에 흐르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와 같았 다고 하였겠습니까 그럼에도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기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러니까 다시말해, 이 짐 자체가 쉽다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지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짐이란 짐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지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문제라는 것입니 다. 억울하면 십원으로도 사람을 죽입니다. 별것 아닌데 억울하면 큰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자동차를 타고가다 보면 접촉사고가 곧잘 있습니다. 그때 살짝 건드릴 정도 로 부딪쳐서 보기에 별 탈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앉아서 밖을 내다보고는 `뭐! 괜 챦네!' 이렇게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차에서 내려 `아이구, 최송합니다. 뭐 어디 어 떻게 된 데는 없습니까' 이렇게 해야지 `아이! 괜챦군요!'가 나오는 것입니다. `괜 챦네!' 이렇게 나오면, `아니, 괜챦은지 안 괜챦은지 어떻게 압니까' 이렇게 하여서 싸움으로 가는 것입니다. 싸움은 접촉사고 때문이라기보다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 니다.

우리는 억울하기 때문에 짐이 언제나 무거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그 짐이 안 무겁다'고 대답하십니다. 그 일이 억울하지 않 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가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억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 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러 왔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 은자이며, 이것 자체가 그의 기쁨이기도 하신 분입니다. 바로 그와같은 자리에 우리 들을 초대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신자란 바로 이런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신자의 모든 삶의 가치가 바로 이러한 것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더 억 울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 당할지 모릅니다. 멸시를 당하며 조롱을 당하며 놀림 감이 될지도 모릅니다. 시편 53편에서는 이같은 문제로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뺨을 치며 수염을 뽑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지금 말씀하 시기를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들이 마음의 이 기쁨과 평안을 놓쳤거든 여러분은 그것을 다 시 확인해 보셔야만 합니다. 신자로서 나의 신앙이 어디 있는가 무엇이 내 삶의 부 분이고 핵심이며 원리인가 하는 사실들을 늘 확인해 보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구하며 자신을 쳐 서 복종시키는 훈련이 드디어 발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그렇 지 못합니다. 그냥 분노를 트뜨리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이고 또 찬송을 부를 때는 그렇게 열심히 부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그랫더 더니 어떻게 합니까 찰 때는 차고, 더울 때는 더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냉탕 온탕 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느 것인지 분별해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 느 것이든지 하나이어야 됩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신자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빌4:4-5절을 보십시다. "주 안에서 항 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 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기쁨과 관용이 같이 붙어 나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 까! 보통 우리의 기쁨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한 것이 되어서 흔쾌한 맛일 때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쁨이란 관용이 있는 기쁨입니다 관용이란 말이 좋아서 관용이지 쉽지 않습니다. 굴복하고 굴욕을 감수하는 것이 관 용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왜 기쁨이 붙어 옵니까 그것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가 지지 않은 빛과 진리와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증거하는 자들 입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과 진리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으며 빼앗기지도 않습니 다. 담을 쌓고 시야를 가린다고 향기를 막을 수 없듯이 우리의 존재와 가치를 그 무 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협박하고 막고 방해한다고 하더 라도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관용입니다.

빌4:6절에서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 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붙였는지 이제 아 시겠습니까 빌4: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 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바로 이 하나님 의 평가에다 맡기십시오. 십자가가 실패의 길이 아닙니다. 돌에 맞아 죽어도 그것으 로 망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세상적인 것을 목표 로 세상적인 싸움에다 쓸데없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고 있지 않는지 세밀히 정검 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참 신자로서의 삶의 방법과 원리들을 가지고 있는지 말씀을 통하여 정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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