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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거룩함 (요 17: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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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가 세상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나쁜 평판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얼마전에 종교문제 연구소의 탁명환 소장이 무참하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탁 소장을 죽인 자들이 깡패 집단도 아니요 살인집단도 아닌 교회에서 그러한 일을 계획하고 이단이기는 하지만 3만명의 교인을 가지고 있는 교회의 목사들이 관련이 있고 특수부대 출신이고 무지막지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신학생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정의를 위하여 사는 사람을 처참하게 살해한 모습을 보면 오늘날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가슴아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게 생각하며 한국의 모든 교회가 부끄럽게 생각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성교회는 여전부터 탁명환씨에게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은 교회입니다. 그는 전도관 박태선의 신앙과 문선명의 신앙을 이용한 사람이며 전도관에 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 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 교회의 설립자인 박윤식 목사는 많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렸다는 협의가 있어서 탁명환씨가 조사를 하고 있던 중이였습니다.

어쨌든 간에 이런 한 시점에서 우리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질타를 어떻게 견디고 이겨야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대성교회가 이단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더욱이 대성교회는 전 국무총리인 정원식씨도 다니고 있는데 세상사람들은 살인을 한 대성교회나 우리들의 교회와 다 똑같은 줄로 알 것이며 교회를 싸움만 하는 살인집단으로 보게 되였습니다.

오늘날 왜 교회가 세상사람들에게 나쁜 평판을 받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가 거룩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대 교회는 세상의 기업의 조직체처럼 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물만 확장을 하고 예산만 높이 세우고, 어떠한 방법으로 든지 교인들의 숫자만 늘리려고 합니다. 큰 버스를 사서 운행을 하고 예산이 남으면 기도원을 짖고 묘지를 만들기만 한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잃어버린 사람들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교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은 떠나고 유능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기업이 되였다고 합니다.

종교가 부패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100여년전 재정 러시아가 망하고 공산주의 국가가 된 것은 러시아의 정교회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교회는 타락하고 백성들을 교회를 불신했습니다. 왕은 교회와 손을 잡고 백성들을 탄압하기만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싹트게 되였고 러시아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망해버리고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생겨나게 되였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도 보면 고려는 불교가 부패해서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조선도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배했지만 조선말에 유교가 부패함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의 수가 천주교인들과 합하여 25%이라고 합니다. 남한의 인구중에 천만명이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25%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이 기독교가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고 부패하고 타락한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가 거룩해져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을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찾아서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겨 버리신다고 하셨지만 에베소 교회는 끝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지금의 에베소는 초라한 모습이 되였고, 크고 위대했던 에베소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거룩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성을 상실한다면 하나님의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세상은 부패하고 타락해 간다고 하여도 교회는 부패하거나 타락해서는 안돼는 것이며 거룩성을 상실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은 교회에 소속되고 교회의 지체가 되고 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여 살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코데스 또한 헬라어로 하기오수네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갈라 놓다 구별하다 또는 다르다 구별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거룩해야 한다는 말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교회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레19:2에서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셨습니다. 또한 레11:45에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 거룩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너희는 거룩하라고 명령하시고 계십니다. 왜 우리가 거룩해야 합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와 독수리를 연구한 부르프 박사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매나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때때로 까마귀, 딱새의 무리들에게 집단으로 공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독수리나 매는 이들을 공격을 반격할 수 있는 힘은 있지만 매와 독수리는 그들을 공격하지 않고 한 차원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점점 원을 그리며 높이 높이 올라가면 까마귀나 딱새는 매와 독수리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못하고 떨어져서 물러 간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것은 오늘날 거룩하게 살아야 할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주변을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까마귀나 딱새들처럼 우리들을 공격하는 악의 조건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악에 물들어서 그들과 같이 어울려 살아 갈 수도 있고, 지금 말씀한 매와 독수리 처럼 한 차원 그들의 위로 높이 날아서 그들이 우러러 볼 수 있도록 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거룩한 삶이겠습니까

거룩하다는 세상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세상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지만 삶의 모습은 그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에게 나쁜 평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1.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구별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으라.” 하셨습니다. 이 할례는 창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명령으로 할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 이라는 증표로 태어난지 8일째 되는 날 양피를 베어서 행한 의식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늘 마음속에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또한 “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거룩한 백성이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민의식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민족은 이 선민의식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티오커스 에네파스 때에는 유대인들을 구별하여 잡기 위해서는 남자들의 아래도리 옷을 벗겨서 할례를 받았는지 아닌지를 구별하여 할례 받은 사람만 잡아갔다고 합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유태인을 600만명 학살할 때에도 유태인인지 아닌지 잘 구별이 안되는 사람은 할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확인하여 잡아다 죽이기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는 것이 수난의 증표가 될 수도 있었고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에 따라서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왜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행하고 받습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은 것은 내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였고 하나님의 자녀되였다는 증표입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자들은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고, 세례를 받은 우리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우리는 구별된 의식속에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구별된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기 전이나 세례를 받은 후나 똑같이 구별되지 못하게 살아간다면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2. 우리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주일성수를 통해서 입니다.
주일성수는 세상사람들과 우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주일이 되면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놀러가기 위하여 기다려 지는 날이지만 우리들은 이 주일에 하나님 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기다려지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거룩한 주일에 성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 자신을 세상사람들의 삶과 구별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주일날 예배당에 와 있지 않고 산에나 강에 있다든지 직장에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세상사람들에게 약점을 잡힌 것이고 그만큼 거룩성을 상실한 것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 중에 가장 큰 적이 바로 주일성수가 힘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피곤하게 일하고 하루라도 쉬어야 하는데 주일에 쉬지도 못하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콘크리트 도시속에서 매연을 마시며 일하였는데 일요일 하루라도 산이나 강으로 가서 시원하고 공해 없는 공기를 마시고 싶은데 교회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일성수는 세상과 우리들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임을 믿으시고 철저한 주일성수를 통하여 우리들이 거룩해 져야 할 것입니다.

3. 윤리적은 정결을 통하여 우리들이 거룩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기 위하여 음식에 대한 규정이 많이 있었습니다. 레11장을 보면 짐승을 먹을 때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은 부정한 것이지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대인들은 개나 돼지 고양이 같은 고기는 먹지 않습니다. 물고기도 비늘이 없고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부정한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뱀장어 새우 조개 종류는 먹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날아다니는 새 중에서도 매나 부엉이 같은 것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의식적인 정결이 아니라 윤리적은 정결을 강조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행15:20에서는 우상에게 드렸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하며. 고기를 먹어도 피채 먹지 말라 하였고 목매어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구원의 필요한 진리가 아닙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지켜야 한다는 권고 사항이지 이 것을 꼭 지켜야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윤리적으로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생각하기를 어느 정도는 세상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가 문제입니다. 조금만 지나치면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우리들이 자신들과 함께 맥주 한잔쯤 마시기를 바라고 있고 함께 마시면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가서는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성을 상실해서는 절대로 안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습니까 그것은 저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다 타락을 하고 죄를 범하고 살아도 우리들은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정결 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더러워지고 타락한다면 이 세상에 어느 곳에서 거룩한 것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4. 방종한 식욕을 버림으로 거룩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먹는 것과 죄를 연결하여 언급하신 곳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먹는 문제 때문에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성경은 노아시의 타락상을 증거 할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소돔 땅의 죄도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는 것.” 이였습니다. 사람들이 식욕과 방종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로마가 망한 것은 먹고 마시는 향락 때문에 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눅17:28-29에서 “또 롯을 때와 같으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잘 먹고 마시면 힘이 나는 것입니다. 이 힘을 생산적인 일에 잘 쓰면 좋을 것이지만 그렇지를 못하고 향락적인 것에 힘을 소비하게 때문에 먹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방종한 식욕을 버려야 합니다. 너무 잘 먹어도 안돼는 것입니다. 방종한 식욕은 감각을 마비시키고 두뇌를 둔하게 하여 분별력을 약하게 만들며 육체의 종이 되게 합니다. 또한 생활을 무력하게 만들고 영력을 약화 시키며 진리이신 말씀을 멀리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금식도 하며 기도를 해야 잃어버린 영력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성도는 다른 사람을 도와 줌으로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장 거룩하게 사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남을 돕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교회에 소속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에게 주어진 능력안에서 성실하게 살면서 남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동방에서 찾아와서 아기 예수님께 예물을 드린 동방박사의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동방박사가 셋만 나오고 있지만 전설에 의하면 원래는 네명 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카르팔, 멜키오르, 발더자르였고 네번째 박사는 아르타반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박사와 네번째 박사가 만나기로 하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네번째 박사가 오지를 않는 것이 였습니다. 그래서 세명만 먼저 길을 떠나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를 하게 된 것입니다. 네번째 박사가 세명의 박사와 만나지 못한 이유는 아르타반이 다른 박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가고 있는데 길을 가는 도중에 도둑들에게 매를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주님을 위하여 준비한 선물중에서 사파이어를 팔아서 그 사람을 치료해 주느라고 늦어버린 것입니다.

부랴 부랴 예루살렘으로 갔지만 예수님은 이미 애굽으로 피난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 때는 헤롯의 군대들이 헤롯의 명을 받고 2살 아래의 어린아이들을 잡아서 무참히 죽이고 있었습니다. 아르타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루비를 팔아서 군인에게 잡혀서 끌려가고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살렸습니다.

그 아르타반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다녔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33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게 된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에 어린 소녀가 노예로 끌려가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아르타반은 그가 불쌍해서 자기 손에 끼고 있던 마지막남은 진주를 주고 그 소녀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지진이 일어나서 아르타반의 머리에 돌이 날라와 맞았고 아르타반은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신을 잃으며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저는 주님께 선물을 드리기 위하여 33년간 헤매 였지만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고 빈손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멀리서 소리가 들려 오기를 “아니다 너는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을 하였느니라. 여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나는 네에게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작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을 떠 주는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남에게 도움을 줄 때 그것이 거룩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야 교회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며 교회가 거룩해야 교회가 부흥되고 세상에게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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