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도의 말 (요 17:20)

첨부 1


요한복음 17장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들이 이미 이루신 것과 장차 이 루어질 일들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내 용들을 기도 형식으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고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모든 사람들도 위함이 니'라고 분명히 못박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은 `나를 믿는 사람들'이 왜 `저희 말'이라는 것을 조건으로 삼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예수 믿게 되는 방법을 왜 말 로 정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말보다 기적이나 능력으로 한다면 훨 씬 주님을 잘 믿을 것이고 좋을 것 같은데 왜 말로 정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본론>

신앙이란 결코 방법적인 문제가 아니며, 어떤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지 만 대개 신앙이라 그러면 무엇부터 생각하느냐 하면 능력과 기적부터 떠 올리는 것 입니다.

또한 불신자 친구들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예수를 믿고 저 사람들은 부처를 믿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착한 사람이 되어 선하게 살자는 것 아니냐 그러 니 결국 예수를 믿든 부처를 믿든 다 하나요, 똑같은 거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런 차원에서 기독교를 비교한다면 분명히 기독교 신앙은 선행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신자들이 신앙상 가장 잘 넘어지는 유혹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정직하게 살고 정당하게 살아 왔는데 왜 그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느냐'하는 대 목입니다. `왜 오히려 악당들이 더 잘 사느냐'하는 점이 큰 시험거리가 되는 것입 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문제들을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그 러한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그런 것이 동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와 사 귀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깊은 교제,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 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는 기독교가 설명이 되지 않을 대가 많은 것입니다. `아니 공 의 하나님은 어디 가셨는가 저 악당은 저렇게 잘만 살고, 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데도 이처럼 고통의 연속인가'하는 탄식은 기독교의 핵심이 이 땅에서 공의의 하나 님을 나타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그 깊은 인격을 알고 교제케 하 기 위함이라는 핵심을 놓쳤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더 주님과의 깊은 교제 에 들어갔는가 하는 간증 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어떤 업 적을 쌓거나 능력적인 방법에 강조점이 있지 않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이것을 강력하게 말씀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호6:1-6절을 보십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 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 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땅 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 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 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분명히 여기서 호세아 선지는 외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행위가 신앙의 핵심이 아 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해도 신앙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 것 입니다. 잘못하여 맞고 찢김을 당했어도 다시 고치시고 싸매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 니다. 그러나, 구약 성도들은 이것을 잘 몰랐습니다. 신앙의 행위가 신앙의 핵심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율법을 지키고 번제를 열심히 올렸습니다만 하나님 께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너무도 몰랐습니다. 이래서 호세아 선지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지내는 것만으로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울이 왕이 되어 처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명령을 받습니다. `너는 가서 아 말렉을 진멸하되 소든 나귀든 어린아이든 노인네든 모든 짐승과 사람들을 남김 없이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보기에 좋은 살찐 소를 남겨서 옵니다.

이에 사울이 묻습니다. `왜 당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것들을 살려 두었습 니까' 이때 사울의 대답은 참으로 우리와 공통되는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드리 기 위하여 좋은 것만 골라서 남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싫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내가 내 생각과 판단과 계획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위하느냐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힘입어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 하는 싸움도 아닙 니다. 오직,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을 아는 싸움이고 그분과 사귀는 싸움입니다. 신 약에서는 이것을 마7:21-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 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신앙의 핵심을 무엇으로 삼은 자들입니까 선지자 노릇하 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종교적입니다. 그 러나 예수님께서 이들을 물리치신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신앙 의 핵심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귀며 사랑과 신비에의 깊은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에 두지 않고, 종교적인 업적이나 종교적인 행위를 많이 한 것에다가 두 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시거나 어떤 업적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 심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큰 교회를 짖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사업을 이루기 보다도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일로 훈련되어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더라.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시더라.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더라. 나 도 그렇게 사랑하기로 했다'라는 결론을 얻지 않는 한 어떤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일이 내게 상관이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같은 결론을 얻어낼 때까지 계속 무슨 일이든 당하게 하십니다. 계속 어려움이 생기든지 병에 걸리든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다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렇게 철저하게 동원되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을 아는 일이라면 어떤 희생을 치루어서라도 성취하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일을 위해서는 건강도 뺏 을 수 있고, 명예도 뺏을 수 있고, 뭐든지 뺏을 수도 있고, 줄수도 있습니다. 여하 어떤 일이든 우리 앞에 세울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도, 예배당을 짖는 일도,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도, 혹은 이단이 침투하는 일도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런 일들 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인 행사나 의식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결 국 이 목표를 향하고 있습니다. 요17:21절을 보십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결국 이 일 을 위하여 이 모든 기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모세나 엘리야나 다니엘 같이 어떤 큰 일을 시키시기 위해서 보내지 않았습니 다. 그같은 사명은 특별한 소명으로 되어진 것일 뿐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 과 하나가 되는 이 일을 위하여 땅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우되 우 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들로 통하여 배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요17:2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 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영광을 보는 자리까지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주님께서 오셨고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그 자리에까지 나아가기 위하여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훈련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개인 적으로 가정적으로 또는 사업적으로 오기도 하고 교회적인 사건을 통하여서도 훈련 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그 한 목표를 향하여 밀어 부치시는 하나님 의 손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같은 하나님을 체험하고서 그 인격에서 베어 나 오는 말이 `저희 말을 인하여'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단순한 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히11:4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 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 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싸, 혀로써 말한다고 하여 다 말이 아닙니다. 말이란 인격이고 존재여야 합 니다. 말은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해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오직 이것으로 주님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 인격 속에 하나님의 인격이 나타나고 그 분의 성품이 나타남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뜻밖에도 그렇게도 많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 으로만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만큼 기적을 많이 기록한 책이 어디 있겠습니 까 죽은 자가 살아나고, 말 한 마디에 광풍이 잠잠해지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중 풍병자가 낫습니다. 문둥병이 깨끗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으로 연결되 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의 연결은 이상하게도 순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아 벨은 죽었으나 오히려 그 믿음으로써 말하기 때문입니다. 죽인 자는 가인이고 죽임 을 당한 자는 아벨이었지만 그 죽음은 오히려 우리가 가진 내용인 하나님의 관한 것 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오히려 증거됩니다.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성 령과 지혜가 충만해져서 죽습니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는 증거되어 왔고 그것을 막 을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히11:33-12:2절을 보면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 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 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 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 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 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 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 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 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예수 그리 스도의 예수 그리스도 되심을 체험하되 그 약속의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산 증 언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아직은 좀 모호합니다만 조금 후 다 시 분명한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의 신앙의 내용과 근거는 놀랍게도 대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의 기준에 못 미쳤다고 생각할 때에는 불안해 합니다.

예를들어 오늘 나는 착하지 못했다. 의롭지 못했다. 정직치 못했다 하는 것으로 불 안해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그분을 기쁘게 했느냐 슬프게 했느냐가 아니라 옳 았느냐 그릇되었느냐 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옳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어떤 깨우침과 도가 인격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이 설 자리를 대치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 중의 문제입니다. 게다가 더욱 문 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내가 지켰을 때에는 안심하지만 못 지켰을 때에는 불안이 자 신을 흔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옳으냐 그르냐의 싸 움도 아니고 선하냐 악하냐의 싸움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그 분을 아느냐 모 르느냐의 싸움이며, 그분과 사랑의 교제가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룰만한 조건이나 방법을 가졌거나 전수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나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에도 불구 하고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에 대하야 내가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서 자신을 갖게되 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요17장에 다시 돌아와서, 지금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당신의 사랑 하시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이루실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느 자리에 까지 인도 하실 것인지를 이제 펼쳐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들에 대하여 오늘 본문 요 1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들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 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로 통하여 다시 기도화된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입니다. 기 억 하셔야 할 사실은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서는 우 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전부 다 무 엇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당신이 이렇게 하라 고 하셨으니 이것을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떤 의미에서 방청객으로 앉혀 놓고 아버지 하나님께만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요17:11절을 보십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지금 누구에게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합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입니다. 누가 예수 님께서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조금도 끼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과 기도 의 응답은 결국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우 리의 신앙을 확보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무엇이며, 근거가 무엇입니 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가 하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하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모든 문제 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신자들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이냐 하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 다. 왜 믿음이 없느냐 하면 언제나 자기를 근거로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운명 의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결국 돈이 가장 확실한 근거이고 건강이 가장 확실한 밑천입니다. 아닌 것 같지만 부닥쳐 보면 그렇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말로 예수를 믿는 것 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진심을 꺼내 놓아야 될 때에 그 좋은 믿음 이 어디로 갔는지 나오지를 않는 것이 우리의 허약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어디에 걸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내용과 근거를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분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하여 어떤 사랑을 갖고 계시는가 하는데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우 리를 무너뜨릴 그 어떤 세력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게 됩니다. 만일 아직도 이 세상 것이 나를 시험에 들게 만든다면 아직 도 나의 신앙은 나약한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시험에 들지 않을 그 믿음을 쌓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그 믿음이 내게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시 145:8-9절에서 성경에서 즐겨 쓰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애굽의 군병들로부터 꺼내셨는가 블레셋의 칼날 앞 에서 어떻게 구하셨는가를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우리를 선대 하시며, 긍휼이 풍성하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블레셋과 모든 대적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그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들을 안다면 흔들릴 것이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는 실패를 합니다.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은 나에게 시험 감독관으로 와 계신 분이 아니라, `나는 너를 사랑하며 나는 은혜 베풀기를 원 하며 복 주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평안의 근거여야 됩니다. 그러면 그 무엇도 그 평안을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세상이 여러분에게 손댈 수 없으며 하나님 손에서 여러 분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넘어져도 복을 받고 꼬꾸라져도 복 을 받으며 다리가 부러져도 복을 받습니다. 눈이 멀어도 복을 받고 물에 홀랑 빠져 도 복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를 좌우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하여 불만 스럽고 부족한 부분들을 손대시는 하나 님의 손길이 있을 뿐입니다. 박대해서 내게 손대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복 주시기 원하셔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충만한 것을 다 주시기 위 하여 내게 손대셔서 훈련시키시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 훈련이 우리에게 어려워 서 비명을 지르는 일이 있을지언정 결코 절망스러운 비명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미 절망이나 자폭이라는 말을 등장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있는 것 입니다.

 <결론>

이제 여러분들이 가진 믿음의 차원에 대하여 정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 이 무엇으로 불안해 하며 무엇으로 자신있어 하는지를 정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 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 되신 것으로 인하여 정말 마음이 든든한가를 정검해 보시 기 바랍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다면 아직 참 믿음의 자리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네게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하여 간섭하시고 인도하시 며 보호하시고 계심을 믿고 있는지 정검해 보기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영광의 자리에까지 가도록 계속 요구 하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