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 됨(일치) (요 17:21)

첨부 1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에 심각한 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있어서 신앙이란 그렇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라는 분위기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세상 살이가 점점 더 편해지 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 생활이 어렵게 사는 때와 여유 있게 사는 때 중 어느 때가 더 어려운가 하면, 여유 있게 사는 때가 더 신앙 생활 하기 어렵다고 할수 있습니다. 살기 어려울 때는 이래도 저래도 어렵기는 마 찬가지이기 때문에 눈 앞에 있는 이익보다 영원한 가치를 더 열심히 추구하게 되고 그 영원한 가치에서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생활에 여유가 생기게 되면 달라집니다. 지금 당장 내 몸을 편하게 하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영원한 것을 생각할 틈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신앙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슨 큰 도움이나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구원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하나됨에 있는 것입니다. 본 문 21절에서 마지막 끝절까지 영광과 하나 됨에 대하여 계속 그 결론으로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신앙이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된 것같 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궁극적 인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 는 영적인 교제가 신앙의 년조가 길면 길수록 더욱 더 깊어져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이러한 구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빗나간 신앙의 길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정검해 보이야 할 것입니다. 그 렇게 함으로써 지금 내가 서 있는 신앙의 위치를 올바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신앙이 어디로 얼마만큼 더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하 는 것입니다.

<본론>

요즘 우리들에게서 가장 놀라운 일 중의 하나가 `어쩌면 애들이 그정도로 부모들에 게 위대한 존재가 되었나'하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자식들이 신이 되었습니다. 자 녀에게 못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애들을 위해서라면 밤잠을 자지 않고 독서실에 데 려가고 오고, 사 달라는 것 다 사줍니다. 애들과 같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도무지 참기 어려운 일들을 보고 당합니다. 어쩌면 애들을 그렇게 마음대로 키웠나 싶을 정도입니다. 모두 하나같이 어른 앞에서의 최소한의 예절을 훈련시키지 않은 것입니 다. 어른 앞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까요 여러분에게 그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해 줄수 있는 한 다 해주는 것으로 만족해 하고,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닙 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사랑하며 순종하는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그 자리에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목표와 계획이 영적인 긴장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듯 우리들의 자녀들을 키우는 그 자세도 그같은 긴장 속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영적 긴장의 영역과 는 상관 없이 내 마음대로 내 성껏 내 자녀를 키우겠노라는 어리석음에서 빠져 나오 셔야 합니다. 엡1:3-10절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폭 넓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 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 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 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의역하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려 하심이라' 이것이 오늘 본문인 요17:21절에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 에 있게 하사'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우리는 누구도 자기의 계획과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그 대상이 물질이든 자녀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일치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같은 품성과 수준에 참여하며 같은 영광과 거룩에 참여하는 그같은 신분으로 요구받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요구를 받는 부분에서 우리의 신앙이 약화될 소지가 많습니 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이 하나되는 거룩에 초대 받는 엄청난 사실 보다도 현실에 부닥친 문제 그 자체에 너무 집착되어 그 배후에 깔린 하나님의 위대한 초대를 보지 못하고 쉽게 주저 앉거나 거기에 안주해 버림으로 신앙을 송두리채 날려버리는 일들 이 허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간다. 하나님은 나의 위로자이시다.'라는 정도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그러한 구원 위에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 려는 일이 내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고백이 세워져야 온전한 신앙의 삶이 되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 전세계와 온 우주와 역사가 거기에 나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의 계 획하시고 뜻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되었음에도 이같은 사실을 외면하고 현실에만 집착하여 전전 긍긍하 는 삶을 면치 못한다면 그보다 비극적인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인류역사의 방향을 제시하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마치 천년만년 살것 같은 착각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신자들을 흔하게 볼수 있다 는 것이 문제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 사람들이 노아의 말에 노아 가족 이외에 그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 다. 간혹 지진도 있고 홍수도 있었지만 어제도 똑같았고, 그제도 괜찮았고 벌써 몇 백년, 몇 천년을 이 지구가 이렇게 평온한데 세상이 끝장 난다는 이야기가 무슨 당 치도 않는 말입니까 반문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벧후3:3-7절에 이에 대하여 자세 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 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 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물론 신자들은 이렇게 말하진 않습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믿고 있습니 다. 그렇지만 문제는 사는 것이 믿는데로 살지를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이 문제입니다. 살기를 그 믿는 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어느날 몸이 몹시 피곤하고 아파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암이라 사형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앞으로 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입 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생애는 갑자기 변했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하고 할 일이 있으면 결코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쓸데없는 일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지 중요한 것부터 처리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아쉽지만 어느 정도 정리된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돌이켜 보며 편히 눈을 감았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에게 일주일 밖에 남은 생애가 없다면 당장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맨 처음 생각나는 것은 있는 돈 다 털어서 빨리 써야 되겠습니까 일주일의 기간은 있는 재산 처리하여다 사용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아 억울해 하지는 않을까요 여 러분이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다 가지고 가지도 못할 그 재물을 위하여 일평생을 허 비하면서 단지 더 많이 모으는것 자체에 재미를 붙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많 이 모은 것이 내가 남보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여겨 스스로 자랑스 럽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계획과 목표를 가지시고 계시며, 결국은 산자 와 죽은자를 다 함께 심판대 앞에서 심판하며 계산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 게 선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설 준비가 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고도 과연 제대로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것을 단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가는 것으로서 날 부추기고 위로하는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면 그 신자는 믿는다는 이름만 가졌을 뿐입니다. 실상은 그에게 세상이 전부요 세상이 주는 영향 력 앞에 무기력하게 완전히 지배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의 신앙을 어렵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기초적인 차원을 벗어나 하나님의 뜻과 계 획의 선상으로 진보하여 살아가는 신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의 삶이 정욕과 낭비와 죄악된 곳으로 발맞추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 획 속에 나의 모든 것을 맞추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자신을 맞추려기 보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억지로 거스려 서라도 자신의 정욕에 맞추어 살아가려는 생활 방식이 시한부 종말론 소동을 불러일 으켰던 것입니다.

롬16:25-27절을 보십시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 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 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 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이렇게 로마서의 결론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던 비밀이 나타난 것이 구원의 복음이 라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한 개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얻는다는 차원만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심에 대한 사실도 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하나만을 대상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롬16:26 절에 보면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 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크고 광대한 것으로서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 이 구원이 원대한 차원에서 보아져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자들 이 하나님의 구원이 단지 자기 민족들에게만 한정된 것인 줄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1:6절에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 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그러나, 때와 기한은 사 람의 알바 아니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로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이것을 맡기지 못하고 임의적으로 날자를 정하여 그것을 합리화시키려고 하 니 자연히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갖다붙이기식 해석을 일삼는 어리석고 미련한 행 동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벧후3:8-13절에 이에 대하여 미리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 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 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 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 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 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지금 여러분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 보십시오. 주님께서 지금 오셨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좀 더 있다가 오셨으면 좋겠습니까 전 지금 오셨으면 제일 좋겠습니다. 만 일 더 있다가 오시는 것으로 인하여 그 허락된 연기된 시간을 여러분이 열심히 부족 한 부분을 채우고 신앙의 열매와 성장에 매진하기 보다 게으름과 미련함을 더 연장 하는 것에 시간을 허송하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꾸지람을 쌓게될 뿐일 것입 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이 여유와 기회를 우리 자신을 돌이키고 새롭 게 성장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회를 어떻게 쓰는 것이 지 혜일까요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 나님의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손길에 그대로 순응하여야 합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입니다. 시146:10절에 "시 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말씀합니다. 이같은 통치에 대하여 모든 피조물들은 감사와 찬송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 하나님의 통치는 선하시고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 150:6절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말합니다. 바 로 이와같은 시각과 이해가 없이는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저희도 우리 안에 있게 하사 하나 되게 하소서'라는 의미를 못 알아 듣는 자입니다. 신앙생 활이란 주와 하나되어 그로인한 선하시고 영원한 통치에 대한 끝없는 감사와 찬송 으로 연결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동일 한 마음을 갖고 모든 어려움과 고통까지 헤쳐 나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능력인 동시에 책임입니다. 물론 시편에는 좀 이상하게 보이는 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28:3-5절을 보십시 다.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 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 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다시 시31:17-18절을 보십시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 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이렇게 시편에는 뜻밖에도 이런 저주의 내용을 담은 시도 있습니다. 이것을 저주시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복수 해 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시말해 이 기 도를 올리는 자가 개인적으로 저 사람은 저주받아야 됩니다라는 증오와 복수심에서 의 개인을 향한 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은혜로우심과 자비하심이 빨리 온 천하 만물에 제대로 다 드러나며 모두를 그 안에서 불러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와 사랑으로 거두소서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향한 신자들의 간절한 소원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하신 우리를 향한 기도인 `저희도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우리 와 함께 하나 되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소서'가 역사와 세 상을 보는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걸어가야 되는 길들마다 분명한 방 향과 책임과 사명을 인식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밤에 죽으면 내일 천국에서 깨 어날 줄을 믿는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당연히 나타나야 할 그런 담대함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을 내다보시고 안타까와 하시는 그 마음에 동참한 간절한 기도가 왜 없는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기껏해 야 자기 하나 나와서 설교 듣고 예배 드리고 가면 끝입니까 신자의 모습이 어찌하 여 이렇게 전락되었습니까 우리야말로 이 세상 역사의 끝을 보는 자들이지 않습니 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들입니다. 우리의 걸음 걸이 속에 주님이 함께 있게 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같은 특권과 사명 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운 문제 때문에 밤낮 나와서 `하나님 이것 해 결해 주십시오. 저것 해결해 주십시오'라는 정도의 신앙을 넘어서야 할 자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참으로 연약한 자들입니다. 깨어지기 쉬운 진흙으로 빗어진 존재들입니 다. 그러니 왜 그런 기도가 없겠습니까 그런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를 아뢸수도 있 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머물지 말라는 말입니 다. 적어도 우리 성도들에게는 온 우주와 역사가 우리들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 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셨고 그것에 대한 유일한 증 인과 도구가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 전할 부름받은 선지자들이요, 하나님과의 화해의 길을 나타내는 제사장이요, 어두움 을 이기고 진리와 복음으로 승리하게 될 왕같은 자들입니다.

<결론>

옛날에 못먹고 가난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경제성장을 거듭한 결과 먹 는 문제로 아쉬워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드디어 잘 사는 나라들이 그렇게 부 럽지 않은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다입니까 신자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신자란 먹고 사는 문제나 생활의 여유와 물질적 번영으로 말하지 않습니 다. 신자는 한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며, 인류 역사의 마지막을 예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할 것이 있고 남을 위하여 방향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생수가 흘러 넘쳐 퍼져 나가야 하며, 진리의 향기가 진동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 냄새를 맡 고 호기심과 관심이 일어나는 자로서 성도는 서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기도가 끊임없이 나와야 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문제가 생길 때나 자녀 들 입시 앞에서만 기도하는 기도하는 신자의 생활은 이제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 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써 주소서!'라는 기도가 쉬임없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