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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유다 베드로 (요 18: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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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은 준비하는 절기이다. 곧 주님의 오심에 대한 준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사는 우리들은 그 약속이 성취될 때 까지 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그 약속을 따라 준비하는 삶이었다. 하나님은 애급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약속을 주시고 그 준비를 시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약속에 대한 성취이다. 이 예수는 우리에게 다시 오시마 한 약속을 주시면서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라고 가르치셨다. 열 처녀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하고, 달란트 비유에서 장사하여 준비하라고 하신다. 사도 바울도 살전 5:23에서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하셨다.

 대강절은 동시에 무엇을 바라는 절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거나 희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이다. 대강절에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살아가는가 우리의 바람은 바랄 수 있고 또 바라도 되는 것을 바라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기다림이란 멋진 일이다. 학생은 방학을 기다리고, 회사원은 월급날을 기다리고, 젊은이는 연인을 기다리며 어머니는 밖에 나간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이 멋진 기다림 속에 신앙인은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들의 성취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내 안에 계시고 또 우리 안에 계실 때 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진정한 대강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대강절은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두 가지의 깊은 의미를 주고 있다.

①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아 희망을 오늘에 현재화하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기까지 하신 주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음미해 보는 것이다. ②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시며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다시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을 뜨겁게 기다리며 그 사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 전체를 되돌아 보고 새롭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내려오는 역사의 정점이다. 베들레헴 말 구유에서태어난 아기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요 약속된 메시야이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준비 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준비기간을 주셨다. 말3:1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그의 사자가 먼저 와서 그 길을 예비하신다 하였다. 그 길을 예비하신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신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 모른다. 그러나 준비하는 사람은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문제될 것이 없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간은 우리에게 준비기간이다.

고후 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는 잠시도 방심함이 없이 주의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갱신을 통하여 거룩함과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 벧후 3:12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였다.

 현대인들의 바쁜 삶은 경건한 준비를 소홀히하게 만든다. 우리들은 나그네이다. 우리가 나그네임을 생각할 때 결코 경건의 삶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바쁠수록 더욱 힘써 자기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영적인 삶을 준비하지 아니한 채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하다.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준비 기간이 다하기 전에 부지런히 거룩하고 경건된 삶을 준비해야 한다.

 2. 주의 길을 예비하자.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택하셔서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택하사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명하신다. 지금 우리를 택하시고 주의 길을 예비하시며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기 위하여 우리를 보내셨다. 우리 자신들이 주의 오심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준비하도록 부탁하는 사람들이다. 구약 말라기서를 보면 메시야가 오시는 날 예배를 완전 회복시키시고 불의를 행한 자들을 심판하신다 하였다.

 유월절 절기 때에 예수님은 예배하러 성전에 올라가신 일이 있었다. 그분이 성전에 올라 간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할례를 받기 위하여 부모님의 품에 안겨 올라갔던 일이 있었고, 12살 때에 성전에 올라가 선생들과 함께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한 일이 있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전에 올라 간 것은 그 의미를 더 중요하게 매겨두어야 한다. 곧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님의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책망하였다. 아버지의 집은 곧 성전이다. 장사하는 집이란 곧 짐승들을 매매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성전은 예배가 주가 되어야 한다. 예배가 주된 일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사하는 일이 앞선 것을 책망하신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이 성전을 가리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지적하셨다. 교회는 기도하러 모이는 장소여야 한다. 기도를 잃어버린 교회는 기도를 찾아야 한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찬양은 중심에서 나오는 찬양일 수록 아름답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시고 오는 다윗의 심정은 춤을 추고 싶도록 기쁘기 한이 없었다. 그의 중동볼기가 들어나도 그는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미갈은 점잖지 못하다고 핀잔을 주었다. 사울의 딸 미갈이 자식이 없이 생을 마감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대강절 절기를 지키는 사람들이 참으로 주의 기쁨을 위하여 준비하는지 아니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는지 모르실리가 없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넘긴 인물이다. 유다와 함께 예수님 가까이 왔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려워 하면서도 결박하여 끌고 갔다. 당시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넘긴 인물이다. 세례요한과 비교하여 볼 때 가룟유다는 참으로 형편없는 인물이다. 성경이 말하는대로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면 좋을 뻔 한 사람이었다. 유다는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평탄케 한 인물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구속 사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상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유다가 천국에 가 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글쎄요 과연 그럴까) 자기의 소욕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은 30에 스승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에게 아무리 후한 점수를 준다하여도 주의 길을 예비한 자라는 평가를 하기는 어렵다.

 베드로는 어떠한가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대와 주머니를 준비하라 하셨다. 그리고 검이 없으면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기까지 부탁하셨다. 그때 이미 제자들은 두개의 검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도 족하게 여기셨다. (눅 22:35-38) 베드로는 말고라고 하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다. 그의 생각에는 예수를 사로잡는 세력들을 거스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성격이 좀 과격한 편이었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맹세를 한 인물이다.(요13:37) 베드로가 자기의 스승을 지키기 위하여 칼을 뽑아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서 있는 가룟유다를 볼 때에 그의 마음은 더욱 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검을 집에 꽂으라 !'

예수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말을 한마디 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왜 마시지 않겠느냐 '

하나님의 일은 칼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미수를 품고 있으면 그 칼에 자신도 다치게 된다. 베드로는 짧은 생각을 가지고 말고를 향하여 칼을 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말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무리없이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요 18:8)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사건은 이 일 후에 있었던 일로 보인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 사람의 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말하였다. '나는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현실은 이런 일이 베드로에게만 아니라 오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서재가 사택에 있지 못하고 교회에 있어서 목양실 겸 서재로 사용한다. 여늬 때처럼 서재에서 누워 잤다. 그런데 새벽녘에 문을 두드리며 저를 찾는 소리가 있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이 집사님이 제 바지를 들고서 '목사님의 바지가 왜 바깥에 있습니까 ' 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바지는 분명히 발 밑에 의자 위에 얹어 놓고 잤었다. 집사님이 제 지갑과 바지를 들고 이 물건들이 마당에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도둑이 들었구나 ...' 생각하였다. 의자에 앉아 책상 위를 보니 칼이 놓여 있었다. 남의 칼이 아니고 과도가 연필꽂이에 있었는데 그것이 책상 위에 놓여졌었고 가위도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아마 저를 위협할 의사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으로 보였다. 감사한 것은 이렇게 제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가지 감사한 것은 그날 밤 제가 잠을 깊이 잤다는 것이다.

 잠근 문을 여는 소리에 놀라 깼다거나 서재를 종횡하는 그 친구의 발 소리에 누구냐고 놀라서 반응을 보였다면 생각 밖의 사건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밤손님은 바지 주머니와 지갑 속에 몇장 안되는 지폐만 들고갔을 뿐이었다.

 새벽기도회에 나가기 전에 책상을 마주앉아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 돈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는데 돈을 좀 넣어둘걸 그랬나 전날 토요일에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찾아 제 아내에게 맡겨놓고 왔었다. 아내에게 돈을 맡기기 전에는 이런 생각도 하였다. 일주일동안 돈을 사용하고 다음 주일에 십일조를 낼까 그랬다면 그날 찾은 돈은 모두 가져 갔을 것이다. 다 잃었을 것이다.

 만일 그때 내가 깨어 있었다면 고함을 쳤을까 아니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과연 침착하게 그를 설득하였을까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었다.

사실 목사이면서도 목사라고 말하기는 부끄러운 일이 어디 한두가지겠는가

유다같은 마음, 베드로 같은 생각이 일어 날 때란 누구에게나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과 인간의 이성과 감정에 이끌려 움직이는 것 이 두 마음의 싸움은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언제나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라하여도 스승을 팔고 선생을 모른다고 배반하였는데 인간사 살아 가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일이 왜 다반사가 아니겠는가 다른 것이 있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약간의 양심이 꿈틀 거린다는 것. 그래서 이따금 말과 행동이 주춤거리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등지지 않았다. 예수님은 조용히 잔을 받았다. 예수님의 잔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 잔은 어떤 사람이 준 것이 아니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준비된 잔이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과거에는 유다였어도 좋고, 성깔 급한 베드로 같았어도 좋다.

조금은 넓은 마음을 가지자. 조금은 더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으로 알고 내게 주어진 고난의 잔을 잘 담당하자. 우리가 고난 당하기를 즐거워 하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란 하나도 없다. 사람을 부인하다가 예수까지 부인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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