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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예배 (요 0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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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사이에 나누는 대화 중에 참된 예배에 관한 부분을 특별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설교는 두가지 시각에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겪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부터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을 찾아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현실과는 부딪치 는 상황이 없이 하나님편에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추적해 내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들을 우리의 현실이나 순서에 관계없 이 사ㅍ여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말씀을 살필 때에는 우리의 문제들 과는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말씀이 결국은 조 만간에 우리가 인용하고 사용하게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오늘 몬문 앞 부분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주고 받던 중 사마리아 여인이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하면서 마침내 어떤 초월자의 임재 를 느끼기 시작하는 자리에 까지 도달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여인의 질문이 오늘 본문 20절 부터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왜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유일한 예배 장소라 고 주장하고 있습니까' 이같이 질문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흔히 있는 일 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맞는 교회를 찾는다든가 솔깃한 목사님을 어쩌다 만나게 자기가 품고있던 어떤 급박한 문제나 질문들의 보따리를 풀어 놓습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있는 질문이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하나님은 창세 전에 무었을 하셨는가' 등등의 질문을 들고 나옵니다.

드디어 문제가 풀어 질지도 모르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심정으로 마구 질문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 20절에서 "우리 조상들이 이 산에서...."할때의 이 산은 그리심 산을 말합니 다. 모세가 출애굽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입구까지 오지만 그리심 산 에 못 들어 갑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유 언을 한 것이 있습니다. 즉,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쟁을 마치고 각 부족 간에 땅을 나누고난 후에 그리심 산에 가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 가서는 저주를 선포 하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축복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포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심 산은 창세기 12장에 보면 좀 더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볼 수 있습니 다. 창세기 12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이르렀다가 하란에서 드디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창12:5-7절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당에 들어 갔더 라 아브라함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 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아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 에 단을 쌓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브람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고 거기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셨고 거기서 단을 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11:26-30절에는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 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 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는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이 두 산은 요단강 저편 곧 해 지는 편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 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 라바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앞에 말 했던 지명과 같은 곳으로 시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장소가 아니었겠는가 생각되어 집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고 지명 이 자주 바뀌므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맞다고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지금 여기에 나타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 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한 번도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그리 심 산이 예루살렘과 함께 양대 산맥으로 대조를 이루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왕상12:25-29절을 찾아 보십시다. "여로보암이......하나는 벧엘 두고 하나는 단 에 둔지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좀 더 알아야 사실이 있 습니다.

이스라엘은 청음에 부족사회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울 때부터 왕국이 됩니다. 초대 왕 사우르 둘째 왕 다윗, 셋째 왕 솔로몬까지만 통일된 왕국으로 있다가 솔로몬 왕 의 사후에는 나라가 둘로 나뉘어 집니다. 12지파 중에 10지파가 다윗 왕조를 배반 하고 북쪽 지방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이스라엘로 씁니다. 남쪽 지역은 다윗의 왕통을 인정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으로 남쪽 왕조를 설립하였고 국호를 유 다라고 하였습니다.

분열된 이유는 이러합니다. 솔론몬이 궁전을 짓느라고 이스라엘의 경제는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민심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마치 중국의 진시황제가 아방궁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을 때 백성의 생활이 도탄에 빠졌던 것과 비슷햇습니다. 마침내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를 이어 왕이 됩니다. 그러자 원로 대신 들이 '당신은 아버지 같이 세금과 부역을 과하게 부과시키지 말고 민심을 수습하시 오'라고 충정으로 간하였으나, 그 말을 무시하고 젊은 동료들이 말을 듣고서 "내 새끼 손가락이 우리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지 아니하냐"라면서 아버지 보다 더 과 중한 세금과 부역을 시키겠다고 호언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10지파는 실망하여 떠 나게 되었으며, 여로보암을 새 왕으로 삼아 북쪽 이스라엘 왕조를 세우게 되는 것 입니다.

이리하여 북왕조가 세워 졌는데 여로보암 왕이 가만히 보니까 이스라엘이 원래 신 정국가인지라 종교를 빼 놓을 수가 없는데 예배 할 성전이 남 왕조 유다에 있으니 자연히 백성들의 발걸음이 유다로 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각에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에 오고 가고 하다가 왕통의 정통성이 있는 유다로 민심이 쏠리게 되면 자신의 왕의 자리가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걱정이 생기게 되었 습니다. 그래서 고안해낸 묘책이 바로 방금 읽은 말씀처럼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이스라엘의 최 북단에 위치한 단에 세워서 예배를 드리 게 하여 예루살렘으로 넘어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시킵니다. 이리하여 북왕조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러한 일은 누군가가 아브라함이 그리심 산에서 단을 쌓은 것과 연관을 시켜서 단을 쌓고 예배드리는 것을 정당화 시키지 않았었는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습니다.

바로 그런 추측들이 섞인 구전을 이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하였습니다.'라는 말로 질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질문의 내용을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우리는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데 왜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도 야곱도 여기서 예배를 드렸으니 이 쪽이 더 정통이 아닙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든데 어느것이 맞습니까'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 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 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히시고는 이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추적해 보려는 것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었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앞에서 살펴본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만이 실감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파악하기 전에 먼저 종교란 무었이며 교회는 왜 필요한가 하는 것에 대하여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는 무었 때문에 필요할까요 교회가 과연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일까요 혹은 종교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일까요 아니면 교회나 종교가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요 또한, 하나님을 만나고 소위 신을 만나는데 있어서 반드시 어떤 종교적인 지도자가 필요한 것인가요 하는 질문들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질문에 성경은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십니까 성경은 아니라고 그러며, 없다고 그럽니다. 성경은 만인 제사장론을 말합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예수를 믿 으므로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칭호가 붙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누구나 담대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권리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도 아니고, 교회의 지 도자들이 하나님을 면회하는 비서실장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바 로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와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서 우리는 쓸데없는 정력을 낭비 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이 이야기 를 예수님께서 어떠한 말씀과 연결시키시는지를 조심스럽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21절을 다시 보시면 "여자여 내 말을 들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 라"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신령과 진정으로"하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께서는 이 말씀을 처음부터 꺼내지 않으시고 그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하나의 징검 다리를 놓고서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었이냐 하면 "때"라는 것입니다.

왜 "때"라는 말씀이 필요하셨을까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 때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 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에 왜 "때"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요구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의 형식이나, 통로나,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23절에 나타난 대답에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라는 말씀 중에 어느 단어가 가장 중요한 단어 이겠습니까 그 것을 알려면 21절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 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렇습니다. 아버 지라는 단어가 제일 중요한 단어입니다.

왜 아버지라는 단어가 중요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사실을 함축해 주는 단어입니다.

다시말해 예배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알고 마땅히 아버지로서의 대접을 하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할때에 과연 하나님 을 아버지로 인식하며, 어버지께 돌려 드려야 할 영광과 경배를 바로 드리고 있느 냐 하는 것으로 참된 예배냐 아니냐를 가리는 것이지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하 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전에는 참된 예배에 대한 이러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말 씀이 없었다가 굳이 예수님이 오셔서야 비로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예수님 만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으신 분이기 때 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큰일 난다 는 정도로 밖에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자 하나님이 누구신 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단지 우리에게 권위와 물질적인 충족 만을 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사랑이 있으며, 성품이 있으며, 내가 그 깊이를 알고 있기에 끊을 수 없는 혈육의 관계처럼 밀접한 관계로서의 하나님 되심을 예수님으 로 말미암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 이전에는 참다운 예배가 불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때"라는 말씀을 등장시킨 것입니 다.

요1:17-18절에서 왜 모세를 등장시켜 말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모세가 할수 있 었던 일이란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좋아하시며 저것을 싫어하신다는 육법전서식의 이야기 밖에 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감정이 있으시고, 의지가 있으신 인격적이 신 분이라는 설명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은 오직,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조건이 무었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 그 분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요, 오늘도 나를 지키시는 분이 시요, 나로인해 안타까와 하시며 애태우시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내가 느끼기 전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때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것이란 성경이 언제나 요 구해 왔던 가장 큰 계명인 "너희는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것입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 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요14:6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그러자 빌립이 물었 습니다. 우리가 하는 방식대로 물은 것입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 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언제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 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자를 보았 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 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 버지께서 내 안에 계씸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사실을 바 로 알려면 복음서를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보면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베드로가 자른 말고 의 귀를 붙여주신 분이십니다. 그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하여 "아버 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양 육하신 제자에게 팔렸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받은 것은 말 구유와 십자가밖에 없을 정도로 푸대접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시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는 이와같은 감격과 진심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늘 두드려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라는 사실을 무었보다도 잘 아십니다.

인간이란 자기 최면이라는 허구적 종교성과 외식이라는 도덕적 경건주의라는 늪에 빠져 언제나 허우적 거리는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도 철저히 아시는 것입니다. 그 실 예로써 구약의 4000년 이스라엘 역사가 있으며, 신약에 책망받은 무리들이 있습 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셨습니다. 온갖 보호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증표로 시내산에서 율법까지 받았습니다. 그 리고 나중에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까지 짖도록 하였습니다. 이토록 많 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나라를 둘로 나뉘었고 금송아지 를 만들어 그것을 가리켜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 와니라"(왕상12:28)하는 자기 최면의 망령적 종교성에 빠졌습니다. 이뿐입니까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과 율법들을 받기 위하여 40일을 금식하고 있을 때에 산 밑에서는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지칭히기를 "이는 너 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이로다"(출34:4) 하면서 이 때에도 하 나님을 반역하는 망령에 또 빠졌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인간이란 그 종교성을 만족시키기는데 있어서 인격적 인 대상을 가지지 않고 자기들의 욕심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비 인격적인 대상을 삼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추앙하는 어처구니 없는 작태를 스스럼 없이 수행하기 위해서 바로 종교적 자기최면을 가진다는 것입 니다. 이렇게 인간이란 자기 손으로 만든 물건에 고개를 숙일 정도로 영적인 문제 에 대해서 어리석습니다. 타락하다 못해 이지러진 영적은 실상인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들이 구약 4000년 역사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언제 없어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됨으로써 없어집니다. 환난을 당하 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그들은 종교적 자기 최면과 자기 눈가림을 하던 허구에서 손을 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바로 전의 구약시대에서도 선지자들이 등장했다 하면 도처에 편만해 있는 우상숭배를 지적하곤 했습니다. 신약에 예수님께서 오실 때 쯤에서야 비로소 우상숭배 문제가 거의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기 최면의 종교성을 없애고 나니까 두번째로 등장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도덕적 경 건주의가 그 대신에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전 생애를 걸쳐서 바리새인과 싸우셨습니다. 바리새인 의 무었과 싸웠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외식, 곧 도덕적 경건주의, 다시말해 스스로 어떤 아름다운 도덕과 윤리를 지키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는 자들과 싸우신 것입 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똑같습니다. 한 인간이 그의 신앙의 수준을 높여 가는데 있어서는 언제나 이 두가지의 과정을 지나가야 됩니다.

자기 최면의 종교성에 머물러 자기가 만든 탐욕을 우상을 좇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럴듯한 껍데기로 치장한 도덕적 경건으로 신앙을 대신할 것인가 하는 함정이 어 김 없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결 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나의 아버지라는 뜨거운 인식과 만남이 있으며 또 한 그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반드시 나옵니다. 교회 라는 틀이나 집사나 장로나 목사라는 형식들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왜냐면 사람이란 혼자서 잔심을 가지게 되면 진심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어 늘 독 재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다시말해 독단으로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제 세력이 필요합니다. 마치 발갛게 달아오른 석탄 덩어리도 혼자 꺼내 놓으면 곧 식 어 버리듯이 인간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교회라는 형식이 존재해야 하는 필요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형식주의와 진정한 형식이 필요한 것과의 차이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일이면 성경책이 밖으로 보이도록 들고 다니며, 가능한 심장에 가깝게 들수록 영성이 높고 신앙이 좋다고 하는 말은 옳을 수도, 틀릴수도 있습니다.

그 형식이 성의의 자연스런 표현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을 대치하는 것이라면 틀린 것입니다. 참된 형식은 그 내용에 정성이 넘치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마치 연애할 때 편지를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연애 편지를 아무 노트나 쭉 찢어서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깔도 핑크색 편지지에다가 쓰고 찢고, 썼다가 찢고를 반복하면서 쓰는 성의를 보입니다. 이렇게 형식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 에 갖고 있는 정성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무었인가 하면 마22:34-39절에 나타난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옆으로 흘러 넘치고 있는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요구 하시는 진정한 예배인 것입니다.

 <결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는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하라시면 목숨이라도 내 놓고 불숙으로 뛰어들겠습니다.'하는 식으로 살벌하게 증명하는 문제가 아닙니 다. 그것은 봄볕이 따스하게 얼음을 녹이듯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녹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감당하 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반역과 무지에 대하여 그토록 오래 참으시고 포기 하지 않으시는 그 열심이 기억되십니까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살아갈 때에 비로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를 드 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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