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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백 명으로 구원하라 (삿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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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피타고라스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신(神)은 숫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군사력도 경제력도 수(數)의 대결이 될 것임을 예언한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황금을 많이 가진 자가 다가오는 역사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예언에 비추어 보면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대단히 무지하고 비상식적인 신임에 틀림없습니다. 300명의 군대보다 만 명의 군대가 훨씬 더 전투하기에 유리하고, 만 명의 군대보다 삼만 이천 명의 군대가 더 우세하다는 것은 유치원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은 미디안과 싸우는 병력으로 고작 삼백 명의 백성만 추려 냈습니 다.

 미디안이라는 적과 대결하여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 기드온이 일어섰 습니다. 일종의 의병을 일으킨 셈입니다. 이때 기드온을 좇아 조 국을 구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선 백성의 숫자가 무려 삼만 이천 명 이나 되었습니다. 이 많은 백성을 보고 이제 무언가를 할 수 있 겠다는 포부와 자신감에 차 있던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2절).

하나님은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미디안 군 대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면서 메뚜기떼처럼 밀려왔습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 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12절).

이 많은 적들과 대항하는 데 삼만 이천 명은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두 려워서 떠는 자 이만 이천 명을 돌려보내고 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4절 말 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 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가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결국 삼백 명이 뽑혔습니다. 하나님은 이 삼백 명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7절).

 이스라엘의 병력은 삼만 이천 명이 아니고, 만 명도 아니고, 고 작 삼백 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삼백 명을 통해서 역사하시겠다 고 하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인원 수가 많아야 전쟁을 수행하기가 수월하고 다양한 전술을 펼칠 수 있고 결국 승리할 것이라 여겨지는데, 왜 하나님은 적은 인원을 고집하십니까? 본문에서 주는 교훈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 습니다.

 기드온을 자긍하지 않게 하려 하심 ^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 라.

기드온이 사람을 모으자 삼만 이천 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모여들었 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기드온의 어깨가 으쓱해졌습 니다. 이런 상태에서 전쟁에 승리한다면 기드온은 자신의 실력을 과대 평가하고 백성들도 승리감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예측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 라엘이 오만하고 교만해질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망각한다면, 이는 이스라엘이 또다시 망 하는 길임을 직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스라엘로 자긍하지 않게 하려 한다 해도, 삼백 명은 너무 적은 인원입니다. 메뚜기떼처럼 많은 미디안 군대와 싸워서 이길 승산이 없는 숫자입니다. 요즘 같이 최첨단 무기가 있다면 몰라도 그 당시는 오로지 육탄전인데, 어찌 감히 미디안 사람들과 맞붙어 전쟁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상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삼백 명의 병력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심경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 십시오. 미디안의 대군 앞에 선 기드온의 참담한 심경을 짐작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가 보아도 승산이 없는 전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드온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 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겸손을 기드온에게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똑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삶을 난관에 처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함을 간직 한 채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 스도인인데 왜 우리 삶에 바울의 육체에 가시(고후 12:7) 와도 같은 아픔을 주십니까? 우리는 개인에 따라 가정 문제, 직장 문제, 성격 문제가 있습니 다. 어떤 사람은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녀 때문에, 기 도해도 해결되지 않는 고민거리를 안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이 발견한 답이 있습니다.

 바울의 겸손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7,9).

바울은 그 당시에 전세계를 뒤흔들던 사람입니다. 복음을 들고 다 니며 로마 세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에게 육체에 가시가 없었다면 스스로를 하나님 자리에 놓았을지도 모릅 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교만해질 위험성을 보셨습니다. 그를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그의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육체에 가시가 그를 하나님께 더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에게 더 큰 축복을 내렸습니다.

 아무 고통 없이 편안한 삶 가운데서 교만하게 살다가 하나님과 멀 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편안함이 오히려 그의 영혼에 해( 害)가 됩니다. 더욱 위대한 축복, 더욱 놀라운 은혜를 내리기 위해서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십시오.

삼만 이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당당한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삼 백 명의 군대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겸손이 더욱 필요한 이 유가 납득이 갔을 줄 압니다.

 느부갓네살의 교만 바울과 반대되는 인물을 한 사람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한 시대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왕이었습니다. 바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그는 이방의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 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존중해 준 이방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차로 그의 왕국이 확장되고 주변 나라들에 위용을 떨치자 , 느부갓네살 왕의 생애에 최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위기는 나라가 강성해지자 자기 자신을 하나님 이상으로 높이고 싶어하는 유혹에 부딪친 일입니다. 유혹의 정체를 파헤쳐 봅시다.

 다니엘서 4장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가 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28절).

여기까지 읽는 동안 어떤 단어가 강조되어 있습니까? 나라는 단어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 자신을 강조하며 말합니다. 자 신의 업적을 자랑하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엄한 말씀을 하십니다. 왕좌에서 쫓겨나 짐승처럼 지내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位)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 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 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31-33절).

 하나님 자리에 자신을 두고 싶어하는 자아 망상은 가장 위험 천만 한 유혹입니다. 주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 혜를 주십니다. 사람마다 이런 유혹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때때로 우리가 교만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 고 살도록 연약한 부분을 남겨 두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지내도 록 우리에게 육체에 가시 같은 것을 주십니다.

 전도사 시절의 일화 제 자신이 교만해지려고 할 때마다 상기하게 되는 젊은 시절의 사 건이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당시 「선명회」(Wor ld Vision) 총재였던 스탠 무니햄 박사가 한국을 방문하였 습니다. 부산 구덕 체육관에서 집회가 있었는데 제가 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 생애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 본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열심히 통 역을 했습니다. 그날 집회는 정말 성령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진 행되었습니다. 참석했던 사람들은 통역의 어색함이 전혀 없는 좋은 설교였다고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그날 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 충만한 집회였습니 다.

 집회가 끝난 뒤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때 한경직 목사님도 제 옆 방에 묵고 계셨습니다. 부산 시내의 많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저를 찾아와 통역 집회 치고 이렇게 은혜스러운 집회는 처음이 다. 세상에 이렇게 통역 잘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목소리는 어찌 그리 좋고 또 얼굴은 어쩜 그렇게 잘 생 겼냐고 한 마디씩 하셨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드디어 내가 한국 교회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는구나 하며 자아 도취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저녁 집회 때 또다시 통역을 하기 위해서 강단에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집회가 시작되고 한 5분쯤 지났는데 목이 잠겨 버렸습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통역이고 뭐고 목소리 자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내 보려 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침 그 자리에 와 계시던 다 른 목사님께 통역을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집회가 끝나기도 전에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 그 참담했던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고 별이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체면 손상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밤 12시가 지나 갑자기 제 마음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목소리가 네 목소리냐? 통역하는 능력이 네 것이냐? 내가 준 선물, 내가 준 은사, 내가 준 목소리, 내가 준 능력을 가 지고 하면서 왜 네가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느냐? 주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려 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펼쳤는데 시편 115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 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 서(1절).

 제 마음이 찔렸습니다. 저는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눈물로 얼굴을 적시며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커다란 손이 저를 붙잡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위로였습니다.

이제 나를 의지하고 겸허하게 사역을 계속하라.

저는 그날 새벽, 밝아 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받은 은혜를 잊 을 수가 없습니다.

셋째 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이 걱정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저는 기회를 한 번만 더 주면 최선을 다해 보겠 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통역을 시작했는데 첫날과 같은 깨끗한 목 소리가 되살아났습니다. 은혜 가운데 무사히 집회를 마쳤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제 자신을 높이고 싶은 유혹이 찾아오면 부산에 서 새벽을 맞이하며 주 앞에 엎드렸던 그 시간으로 돌아갑니다.

시편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나에게 돌리지 마시기 를 간구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만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시 115:1 참조).

우리가 많은 달란트, 많은 재산을 가지고 교만하기보다는 모자란 듯하게 살면서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 복된 일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주께서 기드온에게 300명의 군대 로 만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긍하지 않게 하려는 주 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심 ^ 기드온이 삼백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메뚜기떼같이 무수한 미디안에 감히 도전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도저히

다음페이지(엔터) 앞페이지(B) 연속출력(NS) 기타(Z) >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두 손 들고 포기할 수도 있는데, 기드온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 비밀은 기드온이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부하 부라를 데리고 정찰을 나갔습니다(11절). 그때 적군 두 명이 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미디안 군사의 꿈 내용인즉,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을 쳐서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이 꿈을 해석하는 동료 병사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 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14절).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자신들이 패배할 것이라고 말 합니다. 적군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사기는 아마도 하늘을 찌를 듯했을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고 이스라엘 진 중 에 돌아와서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이스라엘은 비록 삼백 명이라는 적은 숫자였지만 승리를 확신하며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승리하게 해 주실 것 을 믿고 힘차게 행군하였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믿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어떤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군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승리 를 보장하시므로 기드온은 삼백 명의 군대를 이끌고도 전쟁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약함을 고백하고 주께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진정한 출발은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 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 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내 모습에 가리워 있던 하나 님을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벌레 같은 존재인가 하는 발견 없이는 신앙에 발을 들여 놓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이제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 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창조하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정(否定)하는 고백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고백으로 이어 져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에서 끝나면 이 고백은 자칫 우리를 자기 비하의 자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저는 못나고 부족하고 연약한 것 투성입니다라는 단순한 자기 비하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부정이어 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리에 섰 을 때 무서운 전쟁은 없습니다. 우리 삶에 어떤 폭풍우가 닥쳐와 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기 비하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준비된 사람을 쓰려 하심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삼백 명만 데리고 전쟁에 나가게 하신 세번째 이유는 준비된 사람만 쓰시기 위함입니다.

본문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싫어하시고 소수 정예 를 좋아하시는 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숫자가 많고 적음에 있지 않았습니다 . 만약 3만 2천 명의 군대를 지휘하면서도 기드온이 여전히 겸 손하였다면 문제는 달랐을 것입니다. 병사들의 수가 많아서 승리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전략을 잘 짜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 니다. 주님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주님을 신 뢰했다면 하나님은 3만 2천 명 그 이상을 주셨을 것입니다. 기 드온이 군사의 숫자 때문에 자만하고 교만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삼백 명만 데리고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뢰하는 것 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똑똑하다고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련하기 때문에 쓰시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신뢰합니까? 참으로 살 아 계신 하나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십니 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지능을 의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돈을 의지하면서 사십니까? 당신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신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남기신 삼백 명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준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일련의 시험을 통해서 기드온이 데리고 나갈 삼백 명을 조심스럽게 선택하십니다. 일단 삼만 이천 명 중에서 두려워 떠는 자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가고 일만 명이 남았습니다. 5절 말씀 을 보십시오.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 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 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 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제외하시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은 6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손으로 물을 떠서 먹는 것은 경계 태세를 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 이 자세는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즉시 대처할 수 있습 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사람은 경계 태세를 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준비되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받았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많은 숫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히브리 성경학자들은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을 돌려보낸 이유에 대해 서 재미있는 언급을 했습니다. 신빙성이 있는 해석은 아니지만 일 리는 있다고 생각해서 소개합니다. 유대인들이 무릎을 꿇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뿐입니다. 그 외의 경우에 무릎을 꿇는 것은 올바른 신앙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 다. 그런데 삼백 명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목이 마르다는 이유 때문에 쉽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했다는 설명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심스럽게 준비된 사람을 가려냈습니다 . 물을 마시는 일만 명 가운데 삼백 명만 선발했습니다.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시고 있던 백성 들은 자신들이 시험받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물을 마시 며 시험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정신 차리고 물을 마셨겠습니까? 아직 전쟁이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나태한 자세를 취한다면, 주님께 쓰임받지 못합니다.

비상 사태는 아니지만 평범한 삶 가운데서도 늘 주님 앞에 준비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장차 주께서 큰일을 맡기실 때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성실성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가정 에서, 직장에서,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시험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험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므 로 언제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몇 년 전 제가 평양을 다녀올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만 해도 북한 왕래가 드물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염려해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양에 도착하기 전에 함께 갔던 목사님들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평양의 모든 호텔에는 빈틈없이 도청 장치가 되어 있으므로 호텔 에서 특별히 말을 조심합시다.

『도청 장치 정도가 아니라 감시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으니까 행동 도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겁니다.』 약간은 농담을 섞어 가며 우스갯소리처럼 한 이야기였는데 일단 호 텔 방에 들어가니까 모든 것이 다 저를 감시하는 듯했습니다. 등 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말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 했습니다. 제 평생 방 안에서 그렇게 경건한 행동을 한 적 이 없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공산당이 지켜보고 있는데 목사 체 면에 속옷 바람으로 돌아다닐 수 없어서 옷을 다 입은 채 경건하 게 주무셨답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작은 행동까지 달라집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순간에도 우리를 관찰하십니다. 우리가 성실한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하나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는지 세밀히 보고 듣고 계십니다. 당신의 삶에 달라질 부분은 없습니까?

위대한 개혁자 존 칼빈의 삶의 지표는 라틴어로 『Coram De o』였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칼빈은 이 말을 일생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할 때 칼빈은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우리 역시 칼빈처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멋지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얼마나 주님 앞에 성실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미 없는 삼만 이천 명보다 준비된 삼백 명을 원하시 는 뜻을 헤아려 보십시오. 교인들의 수가 날로 더해 가는 것은 구원받은 영혼이 늘어 가는 것이므로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숫자 만 많은 것이 좋은 일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훈련된 일꾼이 얼마나 되느냐입니다. 무의미한 삼만 이천 명의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보다 우리 안에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을 드러내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삼백 명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를 책임지고 그리 스도를 믿는 자답게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일에 생명을 내놓는 삼백 명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이 시대에 필요한 기드온의 군사입니다. 당신도 이 대열에 들기 를 원합니까? 당신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는 재능을 다 발휘 해서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생활하십시오. 주께서 우리의 뛰어난 능력이나 재력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몸을 헌신하며 구체적인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말씀을 통해서 그들을 섬기고 사역하기 바 라십니다. 당신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귀한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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