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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칭찬이 없었던 라오디게아 교회1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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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점이 전혀 없는 사람이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약점이나 단점은 타락 이후에 이미 보편화된 인간성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약함 혹은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인간됨을 말해 주는 하나의 특성일지도 모릅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말도 인간의 약점에 대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바울은 로마서3장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어느 날 영국 런던에서 장난끼 있는 한 청년이 영국의 명사(名士) 20명에게 장난으로 모든 것이 다 탄로났소. 도망가시오 라는 전문을 띄웠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20명이 다 도망 갔답니다.

 교회를 다니는 네 명의 청년이 어느 날 야고보서를 공부하다가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라는 말씀을 보고, 이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약점을 서로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한 청년이 "나는 교 회를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도 주초(酒草) 문제를 해결하지 못 했습니다라고 말하자, 두번째 청년이 나는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성적(性的)인 면에서 밤낮 넘어집니다 라고 했습니다. 세번째 청년은 나는 아직도 도벽(盜癖)을 못 버리고 있습니다. 사실은 교회에 나오면서도 몇 번씩 슬쩍 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네번째 청년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동료들이 고백하라고 재촉을 하니까 고민하다가 나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다 불고 다니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각 공동체도 그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도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가 칭찬할 만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칭찬받을 요소가 하나도 없는 그런 교회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오디게아 교회 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조차도 약간의 칭찬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투성이의 교회였습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라오디게아 교회야말로 말세의 표상(表象)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칭찬받을 수 없었던 이유 첫째로, 이들은 차지도 더웁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 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5,16절).

이 구절을 해석할 때, 흔히 뜨거운 것은 열심히 믿는 것이고 차가운 것은 안 믿는 것이라고 하면서 믿든지 안 믿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고대 중동의 식생활 풍속에 따르면, 그들 은 아주 뜨거운 물을 먹든가 아주 차가운 물을 먹든가 했지 미지 근한 물은 아예 마실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 그리고 제단에 사용하는 물도 뜨거운 물이든지 차가운 물을 사 용했지 중간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차지도 더웁지도 않다는 말은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 한 교회가 쓸모없는 교인들로 꽉 차 있다면, 주님 보시기에 존재 이유를 상실한, 책망받을 수밖에 없었던 교회라고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다른 두 도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라오디 게아에서 북쪽으로 11km 정도 가면 히에라볼리라는 도시가 있고 동쪽으로는 골로새가 있어서, 이 세 도시가 마치 삼각형처럼 연 결되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방문하다 보면 제일 좋은 도시가 바로 히에라볼리인데, 그곳은 온천 도시이기도 합니다.

저희가 저녁 무렵에 라오디게아를 지나서 그곳에 도착했는데 갑 자기 환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히에라볼리 외곽을 구성하는 절벽이 모두 다 석회질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 전체가 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듯 아름다웠습니다.

히에라볼리는 온천 도시라서 땅 속에서 뜨거운 물이 펄펄 끓어오릅 니다. 이곳에서부터 11km정도 떨어진 라오디게아에 그 뜨거운 물을 공급하도록 수도관이 설치되었는데, 라오디게아까지 오다 보면 물이 식어서 미지근해집니다. 제가 그 물을 만져 보고 맛을 보기도 했는데 정말 미지근하더군요. 2천 년 전의 상황이나 지금이나 지리적 조건이 변하지 않았다니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성경의 정확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하튼 그 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토해 낼 수밖에 없는 물입니다.

그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더 이상 주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 없는 교인들로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 교인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볼 때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모여든 교인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시대를 흔들어 깨우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지 못한다면, 주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의 열정을 가진 사람도 없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뛰어다니는 사람도 없고, 울며 기도하는 영혼들도 없는 교인들로 꽉 찬 교회는 영화 관람을 위해 극장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의미 없는 대중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그러했습니다. 도무지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교회, 차지도 더웁지도 않았던 교회,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는 교인들로 가득 차 있었던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둘째로, 이들은 자만심에 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라오디게아에는 상류 계급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17절).

라오디게아는 문자 그대로 부요했던 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도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출석했던 부자 교회였 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물질적으로 풍요한 교회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이만 하면 됐지 하는 현상 유지식의 사고 방식으로 영적인 생명력 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발전하고 있 는데 현상 유지만 하려고 하면 그 교회는 이미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한 일이 있는데, 그 교회는 소위 상류 계층의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우리 교회는 이제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만하 면 딱 좋습니다. 분위기도 좋고, 우리들의 교제도 좋고, 가질 것도 가졌고, 더 많이 나와야 귀찮기만 합니다. 우리끼 리 교제하는 것으로 너무나 좋습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정신이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만하면 가질 것은 가졌다고 하는 자만심에 취했던 라오디게아 교회, 그러나 그 순간부터 그 교회는 하나님의 손에 불들릴 필요가 없는 교회였음을 본문에서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시대를 향한, 우리 교회를 향한 경고를 읽어야 합니다.

 셋째로, 이들은 자기 성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성찰이 없었기 때문에 자만심에 빠졌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옛날부터 세 가지 큰 자랑거 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첫번째가 은행인데, 그 당시 소아시아의 모든 도시들 중에서 가장 금은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은행들이 라오디게아에 소재했다고 합니다.

A.D. 60년에 소아시아 일대에 지진이 일어나서 라오 디게아 교회도 굉장히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그때 라오디게아 주민들은 로마 황제의 원조를 거절할 만큼 부유했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병원으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안과와 안약이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대한 목양지를 갖고 있어서 많은 양모를 산출하는 것으로도 이름이 났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양모(羊毛) 공장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황금을 보유한 은행과 안약으로 유명했고 울(wool) 산지가 있어서 의류 제조로 널리 알려졌던 이 도시를 향해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 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눈에 발라 보게 하라(17,18절).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 하지만 주님 앞에서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진정한 부요는 물질적인 부요 이상의 것입니다.

또한 이 도시는 안약으로 유명했고, 눈밝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그들이 눈먼 상태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 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밍크 옷을 입었을지 모르지만 주께서는 그들에게 벌거벗었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얼마나 현장 감각을 갖고 말씀하셨는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14절에 보면 아멘이시고 참된 증인이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만 사실은 너는 가난하고, 사실은 너는 눈멀었고, 사실은 너 는 벌거벗었도다. 내 앞에 전혀 부요함을 가지지 못한 자이고 영적으로 눈이 멀어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자이며, 영적으로 벌거벗어서 부끄러운 상태에 놓인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만하면 됐다고 착 각하고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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