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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인성의 기적 (눅 0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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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과 따라오는 많은 무리와 함께 나인이란 동리를 향 하여 가실 때에 나인성으로 부터 북망산은 향하여 가면서슬피 우리 는 한 대열을 만나게 되었다. 나인성을 찾아 들어가는 대열이 있고 이성을 등지고 나오는 대열이 있다. 이 두 대열을 배교하여 보자.

 1. 나인성에서 나오는 대열 가운데 네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1)죽은 청년(12, 14) (이것1)그는 청년이라고했다(14절) 청년은 인생의 꽂이다. 가장 높은 이 성과 피끓는 정열을 가졌고 태산이라도 능히 옮길 수 있는 기개와 용기를 오유한 자가 청년이 다.

 (2)부자인 듯 하다(12절).

많은 사람이 그와 함께 나오는 것을 보아서 그 청년은 필시 부자이 다. 부자란 가지지 아니한 것이 없다. 돈만 있으면산 호랑이 눈썹도 구한다는 격으로 모든 사람들이 돈 을 벌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 이 청년은 부자였으니 무슨 부족한 것이 어겠는가

(3)독자이다 (12절) 부잣집 가정에 독자로 매어났으니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또한 그 어머니는 과부라고 했으니 그의 사명이 지중함을 알수가 있다. 그러 면 이 서로 은 청년이요, 부자요, 독자로서 할 일도많고 사명도 크 고 책임은 무거우나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어 머니에게 원통의 대상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눈물의 대상이 되 었으니 그는 인생에서 제일 귀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는 화려한 상여에 편히 누워서 사람들에게 운행된 바 되어 편히 행차하는 것이 지만 그러나 불쌍하고 츠은하다. 이 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고 하였으니 독자를 두고 과부된 것을 보니 아마 청춘에 과부된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이 과부는 어렸을 대 자기 부모의 슬하에서 양육을 받으며 남부럽지 많을 사랑과 귀여움을 아다았을 것이다.

(1)원나라 서시와 같은 미모의 여성이 되라고했을 것이다.

(2)맹자의 어머니와 같이 장래에 현모이것양처가 되라고 축복도 했 을 것이다.

(3)에스더와 같은 국모가 되라고 기도도 했을 것이다.

 그는 고르고 또 골라서 결혼하자 될 때에는 가정생활에 대한 계 획, 부부 생각했으랴! 철석같믿고 살던 남편, 진심으로 귀여워하고 사랑해 주뱝針둘도 없는 남편, 살 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인 내 남 편이 어린 씨 하나만을 남기고 무정하게 도 세상을 등지고 떠나갔으 니 누구를 믿고 살아간단 말이냐! 그야 말로 청천에 벽력이다. 청상 과부의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남편을 의 지하던 마음을 돌려 어린 자식을 의지하고 독자 아들에게 일루의 소 망을 품고 전생명을 쏟아서 아들만을 믿고 의리하며 살아와다.

 아들이 병들더니 정성어린 투약과 간호의 효과도 없이 남편 죽고 돈 없애고 자식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 까 이제 는 누구를 믿고 살까 눈물이요 한숨이요 절망이다. 원통 함을 풀길이 없어 그 이가 얼마나 많이 있는 가 오늘 이오천만 내 민족의 처참한 운명은 실로나인성 과부와 같지 않을 까

3)직업적 상부군 유대나라 풍속에는 직업적인 상부군과 울음꾼이 있었다. 이들 상부 군과 울음꾼들은 턱을 대고 사람이 죽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그러다 가 상가가 생겨나면곧 달려가서 상가를 번화케 하여 돈을 받아먹고 상부군들은 상여를 메고 재미가 나서 주흥에 못 이겨 상부가를 호창 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상부군들이 운상시 상부가를 부르는 예가 있는 데 이것은 옛날 서울의 직업적인 치상가들이 부르는 노래 가 각습으로 지방 향촌에 전파되게 된 것이다. 하루 속히 이와같은 악습은 일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와같은 직업적 상부군은 무엇인가 이는 이기주의자들의 군상이며 며 기생충의 무리들이다. 남아야 살든지 죽든지 슬프든지 괴롭든지 상관이없다. 그들 자신들의 배만 부르면 그만이다.

 4)구경꾼 북망산을 향하는 슬픈 행군 대열을 구경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상여의 여부를 혹평혹찬한다. 어떤 이 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나와서 그저 구경만 한다. 어떤 이는 젊은 과부 의 통곡에 일시씬 동정의 눈물을 뿌리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자신 의 신세타령에 눈물짓는 구경꾼도 있다.

 그들과 죽은 청년, 그들과 과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피안 의 불이다. 이땅 한국의 장래와 민족의 수난을 피안의 불로 구경하 는 무리는 없는 가 슬프다! 이 민족들이 언제 민족의 식에 깨어나 고 떨어져 버린 공의의 생기가 돌아오려는가 풍타, 낭타, 물결치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몰려다니는 것이 삼천만 대중의 마음의 바탕이 아닐 까

2. 두 대열의 비교(예수님을 앞장세우는 대열과 시체를 앞세우고 나가는 대열)1)생명의 대열과 사망의 대열 생명이란 귀한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보다 영원한 생명이 더 귀한 줄 알아야 한다. 이 영웝면생명을 생명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에게 집붙임을 받을 때 영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체가 앞선 사망의 대열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성도 여러분은 생명의 주를 구주 로 믿음으로 이미 생명의 대열에 속하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쉬임없 이 따라가자. 요이것11:28)(나는 부활이요 생명)요14:7(내가 곧길이 요 진리요 생명이다 ) 좁은 길-영생, 넓은 길-멸망

2)전도하러 가는 대열과 무덤으로 가는 대열 한 대열은 삶의 뱝뱝뱝뱌, 기쁨의 소식인 복음을 가지 고 가는 대 열인데, 다른 옳은 대열은 무덤을 향해 가는 대열이이었다.

기쁜 소식, 삶의 소식-사람을 살리러 가는 대열 무덤으로 가는 슬픈 소식-시체를 묻으러 가는 대열 이 두 대열 중 어느 대열을 선택하겠는가 그야 말할 것 없이 남을 살리러 가는 전도의 대열에 속하여 야 될고 있것이다.

 시체의 뒤를 따르는 사람에게 생명의 구주를 전하여 믿고 구원받 게 하는 일은 분명 생명을 건지는 일이다.

예수는 만민을 살리시려고 베들레헴에 오셨는데 당시 헤롯왕은 예 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으니 대조가 될 만한 일이다. 이 세상에 는 남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같이 살려는 생각보다 남을 욱이고 나만 살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 들은 기회만 있으면 남을 매장하려 한다. 성도여, 시체를 매장하러 가는 대열에 속하지 말고 복음 들고 남을 살리려는 예수의 대열에 속하시기 바란다.

 3)기쁨의 대열과 슬픔의 대열 예수가 앞서신 생명의 대열은 기쁨의 대열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 씀을 듣는 는 서로 들이 슬퍼할 이유가 없다. 기쁨과 즐거움, 은혜 와 축복이 넘치는 말씀을 들으며 따르는 사람들이 왜 슬프겠는가 또 그가 행하시는 기적들을 볼 때 무서운 것이 없이 활기가 치솟고 소망외가득한데 왜 괴로워하겠는가

그러나 시체가 앞선 대열은 슬픔의 대열이다. 청상과부가 되어 아 들 하나 의 지하고 살고 있었는데 그 아들이 어머니만 홀로 남겨두 고 죽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이겠나 자식의 상여에 매달리듯 따라오 며 며 며 슬피우는 여인을 보며 며 눈시울을 적시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두 대열 중에서 기쁨에 넘치는 대열에 끼어 가야 한다.

이 대열에속한 서로 은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 쁨이 오고)(시30:5),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신다)시30:11)는 약속의 말 씀같이 눈물 흘릴 만한 일이 있어도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될것이다 (시126:6).

성도:사망에서 구원, 영생(자녀), 동행-슬픔이 없다.

바울:옥중에서 기뻐함, 무리와 함께 푸르게 살아있는 나무에서 는 과일을 딸 희망이 있어도 죽은 고목 에서 는 과일 딸 희망이 없다. 생명의 주가 앞선 대열은 모든 것이 소망스럽다. 그러나 시체가 앞선 대열은 모든 것이 절망스럽다.

성도 여러분은 소망의 대열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대 로(소망중에 즐거워하시기를 )(롬12:12)바란다.

 요한 웨슬레:(하나님을 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가장 좋 습니다)라는 말을 세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기쁨으로 소천. 영국 여 왕 엘리자베스1세:(내 생명을 한 치라도 더 연장시켜 주며 며 100만 불을 주겠노라)라고 소리치며 죽음.

 그녀가 입던 옷은 1만 벌도 더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살았어도 이것여원한 소망이 없으니 죽음 앞에서 는 불 안함을 면치 못하였다.

 3. 예수께서 살리심 병든 청년을 위해 백방으로 간호하고 수고하고 재산도 다 없애 버 리고 애써보았으나 실패라, 절망이라, 죽음음이라, 죽어버린 자식을 안고 천만 번 울어본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니아무리 섭하고 또 법법할지라도 오랫동안 동거할 수 도 없다.

 벌써 죽은 독자는 생명이 끊어졌으니 부패하고 냄새가 난다. 북망 산이 그의 집이다. 할 수 없이 상여에 실린 몸이 되어서 자기집을 찾아가는 도중이다. 그들의 잡다한 북망산 일행은 성밖에서 예수의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주께서 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울 지말라)하시고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일행을 멈추신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청년아 내가 네 고구려 시절의 그 넓던 영토 는 다 어디로갔으며, 온갖 복들은 또한 어디로 가서 이렇게 가난해 졌는가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바이며, 국가의 흥망성쇠는 하겠다. (청년아 일어나라)하시던 음성이 오늘의 한국 청년들 귀에 도 들려져야 하겠다. 한국이 다시 사는 길은, 산 송장들에게 새 생 명이 부여되는 방법은, 1오직 예수 영업접하는 데 있다.

2예수를 모셔들이는데 있다.

 4. 결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죽음의 대열을 멈추게 하셨다. 이 죽음 의 대열을 멈출 수 있는 이는 예수 그리 말도 했다. 이런 기적이 일 어나니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다.

적막한 공동묘지로 가던 발길이 뒤돌아서서 나인성을 향하여 들어가 게 되었다. 한국 청년들아하였다신앙의 청년들아!주님의 음성에 발 맞추어 일어나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니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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