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의 변모(2) (마 17:1-9)

첨부 1


< 1절 >

우리는 지금 마태의 평면을 관찰해 본다. 우리의 관심 속에 들어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의 마태적 해석이다. 예수는 세 제자를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셨다. 명백히 4장 8-10절을 상기시킨다. 사탄이 높은 산에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세계의 지배권을 얻을 생각이 있는가 제의하였다. 예수께서는 세계의 지배권을 얻을 수 있는 사탄의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미리 제시된 순종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적에게 부딪혔고, 죽음에로 향하는 길이 무엇인지 그에게 그려 보여졌다(16:21). 마태는 그의 이야기 전개하는 가운데, 여기 이 순간에, 적극적인 반대 행로,즉 4장 8-10절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전개했다. 변모의 사건은 은둔생활, 고향이 이미 상실된 상태, 백성의 입장에서 보는 적대시 속에서, 예수의 생이 끼어들어간 정반대의 찬란한 양상을 제사하였다. 9절에서 마태는 이 표상을 묵시적인 표상 (orama), 곧 계시된 환상으로서 묘사하였다.

마태는, 결코 단순한 환상(Vision)을 근거로 하여, 이해시키려는 새 시대의 역사학적 관심과 그것을 결합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영광 받으신 예수의 광경이 하나님께서 선사한 "나타나 보임( )"이지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으므로 경험한 일상적인 생이 아니라는 신학적 관심을 나타낸다. 일상적 경험에 대립된 사건이요 하나님의 전망으로부터 결론지을 수 있는 하나님의 특수한 계시가 문제인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 장면(환상)을 다니엘서안의 묵시가의 계시 수용의 양식(樣式)과 방법을 가지고 기술한다. 그 나타남에 대한 "봄"과 "소리"의 경청에 의하면, 다니엘은 "그의 얼굴"이 지극한 놀람에 얻어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천사가 다니엘을 "어루만져" 정신을 차리게 하여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단 8:16-17; 10:9-12, 16-19).

< 2절 >

그러나 이 계시의 뜻은 무엇인가 부활하신 자의 장차 올 영광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주신 '환상'이다. "그의 얼굴을 해같이" 비춘 것은, 언젠가 의인(義人)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빛날 것을 예시한다(13:43). 그의 옷이 빛과 같이 희다:천사의 옷이 부활절 아침에 희었다(28:3). 또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구름이 눈부시도록 희었다(5절). 모세와 엘리야는 추측컨대 여기서 옛 시대의 주석가나 신 시대의 그들이 행한 것과 같이 율법과 예언자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석의가 상상한 것과 같이, 5-6절을 신명기 18장 5절과 결부시켜 율법사역자로서 새 시대의 예언자인 모세를 상기시킨다. 또 엘리야는 왜 전형적인 예언자여야 하는가 이미 성서적 전통에서와 같이 그들은 단순히 하늘 세계의 대표자이다.

< 3절 >

그리고 그 환상은, 구름 속에서 그의 빛이 힘으로 현재하시고 세 하늘의 인물을 조명하는 하나님 자신을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빛의 구름에서 나는 목소리로써 말하고, 예수는 그의 아들로 현재한다. 마태는 여기서 세례시의 하늘의 목소리(3:17)를 반복한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예수를 모세와 엘리야에 대립해서 돋보이게 한다. 그들에 대해서는 더 말이 없다. 이 복음서의 독자들은 다음의 사실을 알 것이다:하나님께서 "그를"(아들을) 유일하고 특수한 방법으로 다룬다(1:18-25; 2:15; 3:17). 곧 "그를 나는 기뻐한다." 그는 사탄이 주려는 지배권을 받기를 주저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유일한 방식으로 순종한 분이다(4:1-11).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주권과 모든 지식을 이양해 받은 분이라고 어렴풋이 느낀다(11:27). 그들은 경험한다:곧 그는 인자(人子)다. 그는 고난과 죽음에 있어서 아버지께 대한 순종을 수행한 인자라고(16:12). 하나님의 목소리가 그를 계시하였다. 이 단화가 부활절 아침의 이야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28:3-7), 갈릴리 산에서 이루어진 예수의 최후 결정적 현현(28:16-20)에 교차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된 자, 고난받는 자, 부활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을 계시하는 자에 관한 이야기다. 곧 여기 이 산에서 나타난 하늘의 영광 안에만 유일하게 그리고 처음으로 인자가 뚜렷이 계시된 것이다. 그의 말을 제자들은 들어야한다. 그 이야기 가운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산을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지시 손가락이다:산 아래서의 매일 이라는 일상성의 평면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과 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할 것이다. 그가 변모 후에 산을 내려 올 때 제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인자의 고난에 관해 말하게 된 사정(11-12)은 마태에게는 중요하다. 이것과 같이 또한 중요한 것은 세 제자들이 산 정상에서 일어난 사건 후에 곧 바로 연속된 장면에서와 또 겟세마네의 장면에서, 그러므로 예수의 생애 기록의 절대적 "깊은 점"에서 함께 등장하리라는 것이다(26:37).

< 4절 >

마태는 하늘의 광경에 대한 `봄'과는 거리가 있는 제자들의 전망을 잘 알고 해석한다. 다시 제자들의 대변자는 하늘에서 온 인물들의 눈길에 압도되어 "초막들"을 세울 것을 스승에게 제안한다. 그것은 축제의 초막을 생각한 것이 아니며, 병약하고 죽을 운명의 인류를 위해 예비해 두어야 할 하늘의 집(비.고후 5:1-5)을 위해 의논하려는 것도 아니다(비. 1에녹41:2; 요14:2). 거저 단순히 하늘의 손님들의 거주할 집을 문제삼은 것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지어놓고 헌당의 예를 들일 때, 그는 하나님께서는 땅에 건설된 어떠한 집도, 또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왕상 8:27)하고 기도 드렸는데,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늘에서 온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광경에 압도되어서 놀람 중에 발상한 것이었으니까 그들의 품위에 맞는 것을 생각해 내지 못하였다. 그때 베드로는 하늘의 사람들을 땅의 사람의 양식에 따라 용납하려고 했으니 아주 마땅치 않은 처사였다. 하늘의 사람들이 산정의 천막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생각이다. 그에게 문제된 것은 산위에서 실현될 하늘의 사람들의 "거처"였다. 마치 성전 안에나 거룩한 도시 안에 하나님의 '세키나'가 거주하는 것 같이 (비. 겔37:27; 슥2:13; 계21:3), 그때 그는 하늘의 인사(人士)들을 그 산에 고착시키려 했었다. 사람은 아직 더 추측해 내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는 16장 22절에서와 같이 예수의 길을 막아 예루살렘에서 받을 고난을 받지 않도록 할 것인가 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설교의 집성(Homillie 56. 2 = 806)에서 "산위에서 예수는 확고히 서있고 사람은 아무도 그 분이 서있는 자리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주석할 만큼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의 입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마태는 그것을 폭로시킨다. 여기서 그에게는 마가에서와 같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이 문제되어 있지 않다(베드로에 대한 책망은 이미 메시야고백에 뒤따르는 장면에 있었다).

< 5-6절 >

하나님의 임재는 이 산위에서 그것의 독자적인 역동성을 발전시켰고 베드로의 제안에 대해서는 단순히 아무 토론도 없이 지나쳐버린다. 구름은 하늘에 있는 세 사람을 덮었다. 이 표현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된다. 구름이 덮을 때에는 그것이 덮임으로써 침침하고 어두어 져야하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그 구름이 빛난 것이었기 때문에 찬란하고 환한 것이 되었다. 제자들은 초막을 마음에 두고 현장 밖에 머물러 관망하고 있었고 들려오는 소리만 듣는다. 그 소리는 제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질려 땅위에 엎드리도록 할만한 힘을 가졌다. 그러나 천지창조 때에 "혼돈하고 공허한 땅"을 향하여 빛의 운행을 명할 수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의 능력을 발휘한 것같이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그 장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밝혀주고, 베드로의 제안과 같은 두서없는 인간의 착상을 밀치고 그 장면을 정리하고 초점을 밝혀주는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일찌기 없었던 광경에 압도되고 두려움에 싸여 땅에 얼굴을 대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하늘의 소리는 그 모든 광경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예수의 인격의 정체와 제자들의 할 일을 가르쳐주는 계시의 목소리였다. 루쯔(U.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 us, II,512<Neukirchener,1990>)는 그 목소리가 제자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두려움에 압도되게 했다고 설명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적극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밝히 이해하도록 해 주는 사건이라고 해야 하겠다. 루츠는 하나님의 아들과의 사귐이 아직 남아있다고 생각해서 그같이 설명하는 것 같다. '봄'을 말씀 위에 둔다면 그것은 예수의 인격의 빛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없는 '봄'은 사람이 자의적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근거를 준다.

<7-8절>

그리고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대면해 옮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그 만남을 아직 신적인 분과의 만남인 줄로 알아서 두려움에 질려 땅에 엎드려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정체를 감촉하고, 엎드렸던 몸을 예수께서 어루만지시며 두려움을 진정시킬 때, 하늘을 '봄'으로써 생겼던 두려움은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벌써 하늘의 모습으로 위대한 장면을 보여 주셨던 예수가 아니고, 거기에 예수만이 인간적 모습(사람이 볼 수 있는 분)으로 계셨고 따라서 두렵지가 않았다. 이 모습으로 예수는 제자들과 새롭게 만났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께서 부활의 영광을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매우 인간적인 예수와의 사귐에서 믿음을 얻게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형 앞에서 피해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9절 >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산에서의 경험을 그의 부활때 까지 침묵하라고 명하셨다. 16장 20절과 같이 침묵-계명이 바깥과의 경계선 역할을 한다. 산 위의 계시(啓示)는 제자들에게만 선사되었고 그들은 벡성에게 특수한 그룹으로 대립해 있다. 그의 부활까지라는 시간적 한계는 산의 경험의 성격 해명에 다시 한번 빛을 던진다. 그 한계는 하나의 '앞당겨진 부활의 영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절로부터 회고적으로 이해하고 또 선포할 수 있다. 부활절은 수난으로 가는 길을 포함한다:곧 인자가 산 위에서 명백하게 된 영광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낮아지고 수난의 길을 가실 때 비로소 제대로 정체가 나타난다는 말이 된다. 지금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것에 관해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5b). 두 관점은 마태의 예수상을 종합한다. 그것으로써 신적인 존재들이 거주할 초막은 낮아짐에서 성립하고 몇 제자만이 획득한 높은 산의 절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얼떨결에 내 뿜은 제자들의 대변자의 제안은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된, 직관적인 말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변모'는 그의 수난을 포섭하고 사실 그것을 앞서가는 전주곡으로서 예수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 (parresia )으로써 그 "잔"을 받도록 격려하는 "보여줌"이다. 그것이 종말론적 "환상"(orama)인 한, 변모는 부활한 분의 현현일 수 없다. 그것이 인자의 수난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주석서는 변모설화의 구분에 10-13절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전승의 구성 부분을 생각할 때 원 전승은 1-9절이었고 10-13절은 첨가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누가복음에는 그 단화가 없다. 본 석의에서 엘리야의 출현에 대해서 언급하지 못한 것은 변모이야기의 원형과 원 메시지에서 엘리야가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VI. 마태의 가르침

이 단화의 전통과 내용에 대한 잡다한 추측과 유비적 사용 가운데서 우리는 위의 본문 석의를 통하여 마태복음 기자가 처음부터 증언하고 싶어한 내용을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역대의 교회는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자기류의 메시지를 그 안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신학자(Otto Betz)는 "세계를 해석하는 대신에 그것을 변경시켜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격언을 현대의 정치가들보다는 성서 주석가들이 더 실천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먼저 그 본문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해서는 안되고 그 정경에 실린 모습을 존경하여야 한다. 슐랏터(CA.Schlatter)는 그 대상을 "보는 것", 곧 그것이 전제로 한 것에서부터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태가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읽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하겠다.

1. 첫째로 변모의 단화는 예수의 인격의 본질을 그의 인간적 생존으로 감추고 있는 외양에서 본래의 모습에로 열어 보이려는 의도를 가진다. 제자들은 예수와의 사귐에서 본 기적행위나 사람의 증언이 아닌 하늘에서 울려나는 신적인 응답과 증언(마 3:17; 8:27; 11:25ff; 요 12:27-29 등)들을 들었다. 그래서 예수의 초월성을 경험했으나, 예수의 변모 사건은 예수의 신적 유래와, 모세와 엘리야의 예수의 업적과의 연관을 한 연출장면으로 보여준 계시 사실이라는 특이성을 가진다.

2.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론을 확립시키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변모의 사실은 베드로의 고백이 엿새라는 말로 표시되는 일정한 시간의 경과 후에 큰 무대로 연출되고 보여진 사실로써 입증하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얻은 예수의 모습에서 특별한 것은, 예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독특한 표현으로서, 세상의 모든 빛의 근원인 태양과 비교될 영광과 생명력의 근원인 예수, 겉옷이 온통 찬란한 태양빛으로 변화된 인격을 지시한다. 이렇게 전면적으로 승리와 영광으로 표시되는 예수의 인격이, 하나님의 감추인 섭리로 당황 중에 베드로가 말한 "초막"이란 말에 의하여, 영광 속에 싸여 있는 수난과 수모를 포함하는 인격임을 나타내고 있다.

3. 변모의 단화는 흔히 "부활의 선취"라거나 부활한 자의 나타나 보임의 전승이 복음서 기자에 의하여 잘못 배정되었다는 비평은 정당화될 수 없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 대하여 협의한다는 장면은 결코 부활절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없으며, 누가복음은 (9:28ff) 마가나 마태와도 달리, 그 시점에서의 의논이 예수의 길떠나심(Exodus)이요,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관해서 였다고 말한다. 그 것은 그가 아직 생애의 도중에 계신 것을 나타내 준다.

4. 모세의 등장은 이 변모의 이야기가 구름의 밀려옴과 함께 시내산의 율법 수여와 연관되고 예수의 변모가 모세의 변모(출34:33-35)에 평행된다는 이해를 불러 일으키므로, 모세가 중요한 배역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엘리야의 등장은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원문 비평에서 마가복음(9:6)이 엘리야를 동반하고 모세가 나타났다고 표현한 것과 마태복음(17:4)에서 초막 "하나에는 엘리야를"이라는 구가 빠져있는 사본(B와 Koine교정본)이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엘리야를 언급한 것에 대해서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보게된다. 그를 또한 예언자들 가운데 으뜸되는 분으로서 모세와 함께 예수의 생애 끝에 연관되었다고 설명해 왔던 것은 큰 의미를 주지 못한다. 10-13절에 있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토론이 변모 이야기와 연관되어져서 한 단화에 의해 일찍부터 다루어진 사실에 비추어 그는 세례자 요한을 대변하는 선구자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된다.

5. 예수를 새로운 모세로 추대하던 최초 교회의 신앙은 바울 서신(고후 3장)에도 흔적을 남기는데, 변모 현장에서의 모세의 역할은 결코 예수가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와 교사됨을 암시하는 입장이 아니라, 율법의 입법자로서 이제 예수의 최후의 사업에 직면하여 그의 역할을 그치고 자신의 업적을 예수께 이양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6. 구름을 뚫고 들려오는 하늘의 목소리는 가장 분명하게 예수의 인격의 정체와 그분에게 대한 제자들의 할 일을 지시해 준다. 그것은 부활절 아침의 빈 무덤 장면에서 여인들의 마음 속에 깃들이어 있던 소원과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시달된 그날 아침의 소식을 울려내던 천사의 목소리와 같이, 변모산에서 울려난 하늘의 소리는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의 어떤 소원의 반사가 아닌, 예수의 사실에 초점을 가진 하나님의 의지의 천명이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의 계시이며 제자들이 따라야 할 유일한 임무의 통고였다. 그것으로 예수의 인격의 본질과 그가 받을 영광은 최고 절정으로 나타났고, 그 순간은 더 계속될 수 없이 그치고 두려움에 휩쓸려 엎드려졌던 제자들이 스승의 도움으로 일어났을 때에는 평상시에 사귀던 예수가 거기에 홀로 계시고 그의 수난에 대해서 제자들은 어떤 준비와 공헌을 해야될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