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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과 사람들 (딤후 0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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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인생 길은 혼자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이 인생 길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다정하게 함께 가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경쟁자가 되여 견제를 하며 함께 인생 길을 달려가는 사람도 있으며. 그리고 나에게 큰 피해와 손해만을 입히며 인생 길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이란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좋던지 나쁘던지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살다 떠나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들을 보면 거의가 사람을 잘 만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부모를 잘못 만난 사람들은 많은 고통 속에 자라게 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받쳐서 자신의 삶을 희생하였는데 요즈음의 부모들은 자신의 편안한 삶을 위하여 자식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이 사회가 점점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스승을 잘 만난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눈멀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헬린켈러에게는 설리반 이라는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그의 헌신적인 교육으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선생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살아갈 길과 삶의 목표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스승의 교육 아래서 자라난 아이들은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하여도 선생님을 가장 어렵고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하였는데 지금은 학교에 스승은 없고 입시를 가르치는 강사들만 있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프기만 합니다.

친구를 잘 만나야 합니다. 오늘 이 땅에 친구를 잘못 만나서 인생의 길을 망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특히 사춘기 청소년의 시기에는 이 친구가 삶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가출을 하고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폭력단체에 가입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우리의 자녀들이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의 친구를 집으로 초청하여 그 친구의 됨됨이를 살펴보고 사귀어도 좋은 친구면 사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시켜야 할 것이며 자녀들을 위한 끝없는 기도와 훈계가 필요할 것입니다.

4) 배우자를 잘 만나야 인생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19:14을 보면 “집과 재산은 조상에게 물려 받는 것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배우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커다란 은혜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말씀입니다. 이 디모데 후서는 우리들이 사도행전을 공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이 3차에 걸처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 왔다가 성전에서 잡히게 되였고 무고하게 가이사랴에서 2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다시 로마로 끌려가서 2년간 감옥에서 있다가 재판을 받고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스페인인 서바나에가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네로가 로마의 황제로 있을 때에 두 번째로 체포 되여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였고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다 되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고 순교의 때가 가까워 왔다는 것을 예감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딤후4:6절에서 “나의 떠날 날이 가까이 왔도다” 라고 말한 것이며, 바울은 늘 아끼며 아들과 같이 생각하며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마지막 글을 써 빨리 나에게로 와 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바울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들 중에서 중요한 사람을 생각하여 보면 데마라는 사람과 의사였던 누가, 마가, 구리장색 알렉산더, 등이 있습니다. 이 네 사람은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도 있고 또한 바울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리고 늘 바울의 일에 방해만 하고 해를 끼친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들을 생각하여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구리장색 알렉산더입니다.
알렉산더라는 이름은 그 당시에는 매우 흔한 이름 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구리장색 알렉산더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구리장색이라는 말은 구리를 세공 하는 사람을 말하지만 후에는 대장장이를 가리키는 말이 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 이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배교를 하고 바울의 선교에 많은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이 알렉산더는 바울이 에베소에 방문했을 때 바울에게 많은 악행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을 보면 지금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라고 하여서 알렉산더를 경계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알렉산더는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불리한 증언을 하여 바울에게 나쁜 판결이 나오도록 한 사람으로 바울에게 피해만 입힌 악한 사람 이였습니다.

이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바울을 괴롭히고 바울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직접 알렉산더에게 보복하거나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고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자신에게 아무리 악행을 일삼은 자라고 하여도 그를 저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맡기고 있는 바울의 인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구리장색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를 하고 핍박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들과 대항하여 함께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과 싸우면 우리도 범죄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핍박을 당할 때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원한을 갚아 주실 것을 믿고 핍박 중에서도 인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구리장색 알렉산더의 핍박을 참고 인내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 심판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핍박이 오면 더욱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반대로 핍박이 올 때 인내하지 못한고 함께 대항하게 되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장로교 목사님이시며 신사참배에 반대 운동을 하였던 한상동 목사님께서 1929년 경만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에서 첫 개척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그 마을에는 최부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마을의 세도가로 한 목사님을 무척이나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어느 주일날 설교를 하는데 담넘어에서 돌이 날라왔습니다. 돌은 마루를 향하여 맹렬한 기세로 여기저기에서 날아왔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면서 한 목사님은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고 합니다. 교인들은 방안쪽에 앉히고 자신이 문 앞에 앉아서 날라오는 돌을 다 등으로 막으면서 뒤를 돌려보지도 몸에 돌을 맞을 때에도 꼼짝도 하지 않고 않고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 소문이 온 마을에 퍼지게 되였고 다시는 돌이 날라오지 않아서 교회가 은혜롭게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2. 데마를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하셨습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 고향인 젊은 청년 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바울의 제자가 되여 바울을 따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우고 있던 사람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생쯤 되는 바울의 제자였을 것입니다. 데마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여러 가지로 잘 돌보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바울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바울을 잘 따르던 데마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데마를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1) 데마는 인간적인 배신을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 위급한 시기에 있습니다. 이런 때에 그 동안 사랑하며 섬기던 선생을 배신한 것입니다. 가롯유다가 자기를 제자로 삼으시고 삼년동안 함께 동거 동락하며 말씀을 가르치신 자신의 선생인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아 버리듯이 데마도 감옥에 갇힌 자신의 선생이신 바울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데살로가로 갔다는 말씀입니다. 가롯유다는 돈 때문에 선생을 배신하였고 데마는 바울을 따르는 것보다 세상에 가서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바울을 배신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천한 일이고 짐승만도 못한 일이 바로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참한 모습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늙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데마의 배신이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데마를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측은하게 여기고 있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함께 일하던 동업자들에게 베신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가까운 친척과 형제들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한 때는 죽도록 사랑했던 애인에게까지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일보다 더 큰 절망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배신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배신자인 가롯유다도 끝까지 회개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사도바울도 데마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배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도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가 회개하기를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2) 데마는 예수님을 버리는 배교를 하였습니다.
배교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고백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을 버린 자를 가리키며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배교란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마는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던 사람인데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보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게 되였습니다. 또 그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 것 하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서 매를 맞고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선생으로 모시고 있는 바울도 평생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결과에는 순교를 앞에 놓고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두려움이 생겼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고통도 없고 고난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마는 바울을 내버려두고 믿음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돌아간 것입니다.

말세에 교회에 가장 큰 적은 배교하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 질 것입니다. 살전2:3에서 보면 말세의 첫 번째 징조로 배교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즉 말세에는 주님을 배신하는 배교자들이 속출한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리는 배교가 일어나겠습니까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데마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삶에 여유가 있고 풍요로워 지니까 이제는 즐기려 합니다. 옛날에는 주일날에도 일을 해야 먹고살기 때문에 주일 날 특근을 하기 위해서 주일을 범했고 저녁예배에 나와서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로 주일날 놀러 다니고 즐기러 다니기 위해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또한 말세에는 세상에서 돈을 모으는 것과 즐기며 사는 것이 너무도 재미있어서 믿음을 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는 주일날 교회에 나오기가 점점 더 어려워 질 것입니다. 웬만한 신앙 가지고는 주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지녁예배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얼마나 되고 있습니까 더욱이 수요일 저녁예배는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됩니다. 현대는 바쁘고 피곤합니다. 4살 다섯살 아이들도 아침부터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주일 날에도 예식장도 가야하고 산으로 단풍놀이도 가야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한 두번 빠지게 되면 자연이 신앙이 약해지고 끝에 가서는 믿음을 버리는 데마와 같은 배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배교의 두 번째 이유는 핍박이 임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말세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강력한 권세를 잡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핍박하고 모두 죽이는 무서운 시대가 임한다고 성경에서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부인하고 믿음을 버리는 배교의 일에 동참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러한 일이 지금 일어난다면 저도 순교할 자신이 없습니다. 데마처럼 배교자가 될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그 때를 준비하여 믿음을 키워야합니다. 그리고 환난을 이기고 피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가롯유다와 데마처럼 주님을 배신하는 배교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배교자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배교자는 멸망을 당하고 지옥에 가서도 자신의 배교한 일을 후회하며 가슴을 치고 있게 될 것입니다.

3.1만세 운동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한 기독교인은 16명이고 그 중에 우리 감리교인은 9명이 였습니다. 그 중에 우리 청주 출신의 청춘수 목사가 있는데 이분은 감신대를 졸업하고 지금의 감독인 총리사까지 지내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에 일제 말에 가서 배신을 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은 한 사람이 변절을 한 것입니다. 이분은 일본인의 앞잡이가 되여서 모든 기독교의 교파를 없애서 일본 기독교에 흡수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팔아서 일본군의 비행기에 사는데 헌납하도록 강요를 하였습니다. 또한 교회의 종을 떼어서 포탄을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게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주기도문을 외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정춘수 목사의 절친한 친구인 신석구 목사가 찾아와서 “당신과 같이 민족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던 사람이 아무리 일제 탄압이 무섭다고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있느냐” 하며 울면서 회개하기를 호소했지만 정춘수 목사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어떻게 되였습니까 후손들에게 배교자로 낙인이 찍히는 비참한 사람이 되였습니다. 우암산 공원에 가면 충북의 독립운동가의 동산이 있는데 그 중에 정춘수 목사의 동상도 있습니다. 지금 청주의 독립유공자 가족 회에서는 정춘수 목사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마땅히 철거 되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배교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해야 하겠지만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끝없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인내하기를 바라십니다.

3. 마가를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마가는 마가 요한 이라고도 부르는 사람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을 말합니다. 막14:51을 보면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병정들에게 잡혀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모든 무리들이 병정들에게 잡혀가매 베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고 많은 성서 학자들은 어린 마가가 잠을 자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병정들에게 잡혀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옷도 못 입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데 병정들이 예수님을 따라오는 모든 사람들을 다 잡아가는 것을 보고 두려워서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도망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마가는 홀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사는 청년으로 집은 어느 정도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면 마가의 집에서 쉬시기도 하고 그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기도 하였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날 최후의 만찬도 마가의 집에서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제자들이 마가의 집에서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의 세례를 받기도 하였던 것을 보면 마가의 집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본부였습니다.

이렇게 마가는 부자 집의 아들로 대범한 성품을 가지지 못한 청년 이였던 같습니다. 그는 외삼촌인 바나바와 그리고 바울과 함께 첫 번째 선교여행에 참여하게 되였는데 선교여행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은 행13:13절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부자 집의 아들이라서 고생스러운 선교여행을 계속하지 못하고 중단하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바울과 바나바는 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떠나자 하니까 바울이 반대를 합니다. 왜냐면 마가와 같이 심성이 나약하여 고난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을 전도자로 세울 수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서게 되였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선교여행을 떠나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선교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마가가 훌륭한 전도자가 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마가와 화해를 하게 되였고 마가는 바울과 함께 전도하다가 함께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 바울이 순교를 당한 후에 마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선교를 하고 그 곳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하다가 원주민에게 순교를 당하였는데 지금도 이집트에는 이 마가가 전도한 복음을 믿고 믿음을 지키는 원주민 교회인 콥틱교회가 있고 약 800명이 상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마가는 어렸을 때부터 믿음의 사람 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와 대담한 성품을 소유하지 못하므로 잠시 하나님의 사명을 거역하고 선교를 포기하기도 했었지만 후에는 굳센 믿음으로 순교를 당한 훌륭한 전도자 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육신의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바울에게 실망을 안겨 준 적도 있었지만 마가는 바울 못지 않은 훌륭한 전도자였기 때문에 바울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누가까지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이만 줄이려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 주위에는 구리장색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핍박하는 자가 있다고 하여 우리의 믿음을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를 미워하거나 저주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우리는 믿음으로 바울과 같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데마와 같이 주님을 배신하려는 유혹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세상살이 너무나 아름답고 좋아 나를 유혹합니다. 신앙생활이 고통스럽다고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내 마음대로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그러나 데마처럼 주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배신자들이 되지 않기를 하나님께서는 간곡히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유혹이 와도 이기시기 바랍니다. 배신자는 참으로 비참한 결과를 가지게 됩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마시기 마십시오. 두 주인을 섬기는 자는 데마처럼 배교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유혹이 오고 핍박이 닥쳐도 주님을 배신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굳건히 서서 이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와 같이 중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중도에 포기하였다고 하여도 마가처럼 다시 회개하고 주님을 위하여 나의 사명을 다 하십시오. 힘들어도 쉬지 말고 달려가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낙오자가 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은혜를 분명하게 깨닫고 믿는 사람은 마가와 같이 다시 돌아와 기쁘게 주님을 위하여 생명을 드려 헌신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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