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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영원자입니다 (요 8: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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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해를 넘길 때면 우리는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하고도 적적한 감상에 젖게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의 한계성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한 해가 끝나 가듯 언젠가 내 인생도 끝나야 한다는 그런 종말 의식이 우리의 적적한 감회 속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별로 한 일도 없 이 한 해를 훌쩍 보내고 말았다는 허무감에, 별 수 없는 인생살 이에 대한 무력감마저 겹쳐 이런 마음을 한껏 부추기는지도 모릅니 다.

날로 발달해 가는 현대 과학은 모든 면에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인간이 결코 성공하지 못할 도전의 영역이 시간일 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물론 과학은 인간의 수명을 60세에서 70세, 80세, 90세, 아니 100세까지도 연장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 나 인간은 수명(壽命)이라는 시간의 한계를 결코 초월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즘은 타임머신(Time Machine)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문제성이 있는 영화이지만, 「빽 투더 퓨쳐」(Back to the Future)가 Ⅰ.Ⅱ.Ⅲ탄 으로 제작되는 것을 보면서, 시간을 극복하려는 현대인들의 몸부림 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시간 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그래서 지혜로운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그런데 인생 중의 한 분으로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께서 어느 날, 시간의 한계 속에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실로 엄 청난 충격을 주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본문인 요한복음 8장 58 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방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유명한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Before Abraham was , I am) 하시니.

이 선언은 「나는-이다」(I am)라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 님의 세번째 선언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

이 메시지는 예수님의 영원성에 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불과 33년밖에 살지 않으셨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성화(聖畵)를 그리는 화가들이 예수님을 그릴 때 대부분 젊은 예수님으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정에 걸려 있는 예수님의 그림도 젊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그림 이상으로 훨씬 나이 들어 보이셨을지 모릅니다. 그 증거를 우리는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 느냐(57절).

예수님은 50대로 보일 만큼 원숙미가 깃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하여간 30대로 보이든 50대로 보이든 그분은 짧은 기간을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기원은 이 땅에 계신 그 순간부터가 아니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8절).

예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엄청난 간격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무려 2천 년 전의 옛날 사람으로서, 유대 의 건국 시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브 라함이 나기 이전부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있었느니라가 아니라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 목하십시오. 그분은 여전히 아직까지도 계시는 분이라는 이야기입니 다. 사실 그분은 아브라함 이전부터가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 이것이 요한복음이 열리면서 선포된 메시지였습니다.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 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존재의 시작은 실로 태초 였습니다. 아니 태초 이전이었습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영원자(永 遠者)로 계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영원하시다는 사실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세 가지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수여자(授與者)이신 예수님

본문 52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 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 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 2,53절).

이것을 쉽게 말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야,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너는 통뼈냐? 어떻게 감히 「내 말을 지키면 죽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 물론 예수께서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예 수님의 말씀은 그분 안에 죽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있다는 이야 기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그분의 위대한 처방이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11 :25).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분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부활을 가능케 하심으로써 죽음을 넘어서는 해답을 제시하 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로 썩어 가던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써 부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음에 대한 처방을 선언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 안에만 죽음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 이유 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의 한계를 초월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인간의 비교는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기껏해야 인간과 인간을 비교할 수밖 에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위대하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비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당신이 야 곱보다 더 크니이까?라는 질문이 나옵니다(4:12). 즉, 우리 유대 민족 열두 지파의 출발을 이루었던 야곱보다도 크냐? 고 묻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너는 모세보다 크냐?라는 식으로 질문하고 있습니다(6:31,32).

그리고 본문 8장에서 너는 아브라함보다 크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하신 것은 틀림이 없는데 얼마나 위대한가? 유대인들 이 생각한 차원은 유대 민족사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던 그들의 조상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과 비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에 관한 놀랍고도 충격적인 선언 이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 한 지식, 동등한 영광, 동등한 질(質)의 생명을 가지고 이 땅 에 찾아 오신 분이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만이 가지고 있었던 영원한 질의 생명을 인간에게 나누 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하십니다.

바울의 선언처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 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롬 6:23).

 요한복음은 첫 장을 열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

이 생명은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순한 생명 이상의 것을 가 리킵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원한 생명에 관한 선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요 10:28).

그리스도는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의 수여자로 오셨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그분이 영원하신 분이므로 가능합니 다.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시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어 결국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벽에 부딪쳐 인간의 허무와 불안을 고 백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이 영생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아들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 이로 인하여 우리는 칠, 팔십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인생살이에서 이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덤 건너편의 영원한 삶에 대한 소 망을 분명히 할 수 있으며, 그분이 주신 영생을 지금 이 자리에 서부터 누림으로써 새로운 질의 놀라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 니다. 이 한없는 감격과 기쁨과 평안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영원한 치유자이신 예수님

오늘날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가 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잘 맞추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점쟁 이들이 잘 맞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참 용하게 알아맞히 는 점쟁이들도 많은 모양입니다. 점쟁이들이 미아리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곳곳에서 여전히 성업 중인 것을 보면 그들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마치 점을 보듯이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이것 저것 묻는 사람들이 있습 니다.

이사를 가도 좋겠습니까? 기도를 해 봐 주십시오.

복채와 비슷한 헌금을 놓고, 예언 기도를 받아서 자기 앞날을 결 정하려는 이런 모습은 결코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여간, 이렇게 알아맞히는 사람 중에서도 아주 잘 맞히는 사람을 귀신 같이 알아맞힌다고 합니다.

 어느 주일학교의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설 명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세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절대로 속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것 하나하나를 다 아시거든요.

이때 샛별 같은 눈을 반짝이던 한 꼬마가 선생님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그러면 하나님은 귀신 같이 알아맞히시겠네요?』

본문에는 그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위대한 진리를 당당하게 말씀하시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 다고 누누이 반복해서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귀신 들려서 그런 것이 아니냐?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진리를 말씀하실 수 있는 까닭은 그분 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다 아십니다. 인간의 예감과 직감도 미래를 예언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점쟁이들이 잘 알아맞히 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맞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다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아십니다.

 여기 위대한 선언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나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느니라.

아브라함 시대에도 예수님은 계셨습니다. 그 이전에도 계셨고, 지 금도 계시고, 훗날에도 계실 분이십니다.

 당신은 어떤 상담자를 찾아가기 원합니까? 만약 내 과거를 완벽하 게 아시며, 내 현재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시고, 또 불확실한 미 래를 향해서 나와 함께하시며 놀라운 소원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 계신다면, 그 분을 찾아가서 당신의 모든 문제를 내놓고 의논하 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그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

그는 모사(謀士)라 보라 한 아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니 그 의 이름은 모사라!(사 9:6) 이 모사라는 번역이 좀 어색한데, 영어 성경에서는 상담자 (counsellor)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상담자이십니다 . 그분은 나의 과거를 아십니다. 그래서 나의 과거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현재도 바꾸실 수 있으며, 나의 미래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이 우리 와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걱정에 싸여 있지는 않습니까?

한번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집회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장차 올 미래에 대해서 많은 설교를 했는데, 그렇다면 목사님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까? 빌리 그래함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나는 나의 미래를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나의 미래를 붙 들고 있는지를 압니다.』 아주 적절한 대답입니다. 나의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나의 미래까지도 가장 보람되고 가치있는 삶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그분 이 내 삶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하거 나 조바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며 내 삶에 대한 처방과 해답을 완벽하게 알고 계신 그분이 내 삶을 인도하신다면, 우리는 앞으로의 모든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 습니다.

 주 앞에 오는 사람마다, 그리고 참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마다 주께서는 그의 과거를 치유하시고 다 용서하십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도 아니하리라(히 10:17).

이 놀라운 치유자!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인생 길을 나와 함께 가시겠다고 약속한 임마누엘의 하나님! 나의 미래에 빛나는 영원한 기업을 보장하신 이 놀라우신 분!

주님은 우리가 살면서 허덕이고, 넘어지고, 좌절하고, 불안해 하 는 이유를 다 아십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그것을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 근원적인 원인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아들이 너 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 다. 과거로부터의 자유! 나를 얽매고 좌절시키는 이 치욕스럽고 끊어버리고 싶은 멍에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그분! 여 전히 불안하고 초조한 내 삶의 길에 뛰어드시며 나와 동행하시겠다 고 선언하시는 그분! 빛나고 영원한 기업을 나에게 보장하시며 그 미래를 향해서 함께 가야 한다고 외치시면서 그 미래를 보여주시 는 이 놀라우신 주님!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이 영원한 치유자!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오셨고 영원을 알고 계시 기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예수께서 우리가 겪는 고통과 갈등과 모든 문제들에 관해 지금 여 기에서 나의 진정한 치유자가 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치유자가 내 삶 속에 들어오신 사실은 실로 감격과 감사와 찬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영원한 치유자이십니다.

영원한 구원자이신 예수님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 하였느니라(56절).

이 말씀은 대단히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기다렸다는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꿈, 아브라함의 진정한 소원도 나를 기다 리는 것이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땅 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땅의 모든 족속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족속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그를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고자 하셨을 때, 그분의 기대와 비전은 비단 한 민족에게만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아 너의 후손, 너의 핏줄을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복은 어떤 복입니까? 단순히 땅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정도 의 복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근 원적으로 그것은 구원의 놀라운 복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성경의 당당한 예언이었습니 다.

 먼 훗날 바울 사도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 의 위대한 진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갈 3:7).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유대인뿐 아니라 그리스 도를 믿는 자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 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8절).

유대인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입니다. 계속 보십시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절).

여기에서의 복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 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복음입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근원적인 복은 사실상 이 구원의 복 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네 후손을 통해서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이 얼마나 복된 사실입니까?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벌써 아브라함의 후손인 메시야를 통해서 온 세계의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전혀 상관이 없었던 우리들은 메시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 손이 되어 복된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요한복음 8장을 보겠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2절).

예수님의 이 위대한 선언에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문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 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33절).

아니 언제 우리가 종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까? 자존심 상하는 말 마시오.

유대인들은 종이라고 하면 아랍 족속들을 생각합니다. 본래 아 랍 족속은 여자(사래)의 종이었던 하갈을 통해서 생겨났기 때문입 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종이 아니라는 것을 상 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의 후손이 아닙니다. 우리의 조상은 본래 종이 아닙니 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당신은 우리에게 자유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겁니까?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죄를 범하는 사람마다 죄의 종이라(34절).

우리의 조상이 양반인가 상놈인가 하는 것이 우리를 종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를 종 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입니 다.

 칼빈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고, 하지 말 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유란 무엇입니까? 해야 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이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하고 있는 것 이라 하겠습니다. 이 부도덕한 죄의 성품에 끌려 다니고 있는 인 간의 모습! 당신은 어떤 것이 진리이고 마땅히 해야 될 일인지 알면서도, 양심껏 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36절).

이런 죄책에서의 해방! 진정한 용서 가운데 새로운 삶을 향해 나 아가는 놀라운 비전과 능력! 이런 삶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또 당신과 나를 부르신 이유는 용서와 자유와 새로운 삶이 포함되어 있는 구 원의 놀라운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이 땅 에 보내심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이 잉태되리라는 그 위대한 사건을 예언하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 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죄로 말미암아 죄책에 끌려 다니다가 마침내 죄의 삯인 사망과 하 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우리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죄에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리하여 우리는 지저분하고 부끄러운 삶에도 불구하고 감히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자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자기 민족만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복음 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런 유대인의 오해를 철저하게 고쳐 주십 니다. 사실 복음은 우주적이고, 세계사적이며 모든 민족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범주는 1장부터가 우주적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1 :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3:16).

하나님은 유대 나라나 유대 민족뿐 아니라, 온 세상을 이처럼 사 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구주로 찾아 오셨습니 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 정하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나의 구세주 라는 사실! 이것이 나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분은 온 세상의 구 세주일 뿐만 아니라 바로 나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가장 많은 사 람이 알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위대한 메시지는 나의 복 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단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은 「내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원 전부터 계셨다가, 죄 때문에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인생의 고뇌와 고통을 해결하시기 위해 인류 역사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 우리를 찾 아 오셨던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 예수님의 엄청난 선언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사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의 선언을 듣 고 그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59절).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주 위대한 성자(聖者)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자 같은 소리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은 하나님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느니라. 아브라함도 나의 때 볼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느니라. 나로 말미암아서만 너희들의 죄 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느니라.

예수님은 훌륭한 분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그분은 좋은 분이다. 소크라테스나 석가나 공자 같은 분이다라고 생각하 는 사람은 기독교의 복음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든가 아니면 미치광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당당한 선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죄악과 죽음의 문제들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자유와 진정한 해답을 주시기 위해서 찾아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당신은 그분을 누구라고 생각합 니까? 그분이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치유자가 되시며, 영원한 구원자가 되셨습니까?

복음은 좋은 소식 정도가 아닙니다. 복음은 엄청난 소식입니다.

복음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 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찾아 오신 어마어마혠國u-Y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분이 나의 구원자가 되시고 나의 치유자가 되시며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내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되시며, 기쁨과 생명과 새로운 능력을 더하 시는 나의 주님, 나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도 정말 그런 분이십니까? 그렇다면 이 예수님께 돌려 드리는 당신의 감사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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