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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을 모신 어린나귀 (마 21:1-11,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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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는 한 나귀새끼를 보셨다.그리고 말씀하셨다."너는 나를 싣고 갈 나의 보좌이다."이리하여 어린 나귀는 영광스러운 직무를 위해서 선택되었다. 주는 날랜 말을 타지 않았고 강한 나귀를 택하지도 않았 다. 하늘의 왕은 연약한 어린 나귀를 타고 인간을 구원하신다. 오늘도 왕을 모시고 나아가는 어린 나귀들은 이 영광스러운 직무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주가 나귀를 타신것은 이번 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구원의 사역을 해나가셨다. 더우기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골고다로 십자가를 지 고 나가실 때 그리고 그 위에 못박혀 죽어갈 때, 가장 무섭고 힘든 시 간에 홀로 일하셨다.아무도 그 짐을 대신할 수 없었기에 왕은 스스로 자기 백성을 대신해서 그 일을 하신 것이다.나귀가 도울 수 있는 일은 한정된 것이다.

 주가 나귀를 타심은 우리에게 용기와 보라을 주기 위함이었다. 어린 나귀가 주를 도우신 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예언되었던 왕 이 예루삶에서 입성하심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종려나무를 꺾어서 그 앞에 펼치고 자기들의 겉옷을 폈다. 오러지 왕에게만 하는 극빈한 예의의 표현이었다. 왕을 향해서 욕하거나 돌을 던진다면 나귀 노릇도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옷을 폈을 때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것은 예수가 아 니라 어린 나귀였다.나귀와 예수는 한 몸처럼 걸으며 하나님의 구원사 역의 일부를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비교적 쉬운 부분이다. 비 록 사람을 안 태워본 경험 없는 어린 나귀이지만 나귀는 자기 힘으로 주를 모실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주가 타실리가 없다. 나귀는 힘 들었지만 영광스러웠다.

 이 어린 나귀의 모습은 우리를 묘사한다. 아무런 영적인 경험도 지식 도 없는 우리가 주를 모시고 걷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어렵고 무서운 부분은 주께서 다 담당하시고 나귀가 할 수 있는 부분만을 그렇게 하 신다. 나귀 같은 우리는 얼마동안 그와함께 걸으며 그와 영광을 나누 는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세상의 어느 나귀가 이보다 더 신나 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영광은 그것이 아무리 커도 하늘 것의 모형일 뿐이다. 이 왕의 입성에는 호위 군사도 없었고 번쩍이는 갑옷과 투구 와 날리는 깃발이 없었다. 함께 동행하는 장군들과 귀족들도 없었다.

대영제국과 프랑스제국의 왕들이 움직일 때처럼 위풍 당당이 없었다.

왕은 혼자였고 들리는 소리는 평민들의 환호뿐이었다.

 하늘의 왕이 세상 왕의 위세가 없었던가하늘 왕은 겸손했다. 그는 겸손해서 나귀의 새끼를 탄다고 예언은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늘 왕의 모습이었다. 왕으로서의 모습은 갖추되 너무도 겸손하게 나귀를 타신 다. 그렇다고 그가 하실 일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왕들 썩은 거 짓 위세가 아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기에 위세를 과 시할 필요도 없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최소한의 영광이지만 초자연의 세게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았다. 영적인 세계 초자연의 세계에서는 아무 허세도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아무 것도 가릴 수 없고 속일 수도 없다. 그냥 그 자체로 위엄과 영광이 넘쳐간다. 그러기에 아무도 자신을 과시할 필요 를 느끼지 않는다. 스스로 눈부신 영광에 쌓여 있기에 허세는 그 자체 가 부끄러움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들은 그 자체가 영광이요 그 자체가 위대한 능력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보잘 것없는 영광과 허세에 잡 혀서 자기가 지닌 참된 보물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적인 허세를 추 구하면 할수록 허전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참된 영적 세상에는 아무런 영광이 없게 때문이다. 무대에 그려놓은 셋트나 소도구처럼 순전히 보 이기 위한 것일뿐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가 비록 어린 나귀를 타고 아무런 인간적인 허 세를 부리지 않았어도 온 우주에 충만한 것이다. 귀신들이 두려워 떨 며 천사들이 찬양한다. 단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권세는 모든 것을 움직인다. 무당도 예수 믿는 사람을 알아본다.

그래서 무서워한다. 이것이 영적인 세상의 권세다. 신자들은 확신이 항상 여기서 나와야 한다.

 주을 알아본 사람들은 외친다."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 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오신 이라는 찬송이 다. 호산나는 "부디 구원하소서"의 히브리어이다. "부디 구원하소서" 에 응답하기 위해서 나귀는 다해서 걷는 것이다. 구원을 운반하는게 자신이기 때문에 주를 모시고 어디든지 가겠는다는 마음을 가진다.

 이 "구원하소서"의 외침은 왕을 알수록 점점 더 깊이를 더할 것이다.

육적인 왕에서 온우주 보이는 것과 안보이는 세계의 운명을 쥐고 계신 영원한 왕으로 이해가 더해간다. 그리고 신앙의 이해가 깊어질수록 매 순간 그를 향해서 구원하소서를 외치는 삶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스도는 알면 알수록 그 가치를 더 알게 된다. 이 구원 을 나귀가 모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을 운반하는 교통수단이다. 군중이 자기에게 꽃을 던지고 찬송해도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 다. 겉옷과 종려가지를 자신의 발로 밟는다. 하지만 그것은 등에 모신 왕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주를 모시고 나가는 이들은 영광을 받는 다. 그러나 절대로 그 영광을 취해서는 안된다.왕에게 돌려야 한다.

자기는 나귀일뿐이다.

 사람들의 호산나 소리를 들으며 우쭐하는 나귀가 되지 않아야 한다.

나귀를 타신 왕께서도 그렇게 겸손하셨다. 그러나 그 겸손한 왕을 모 신 나귀가 어찌 교만할 수 있으랴, 자기가 구세주를 독점한 것처럼 잘 난척할 수 없다. 나귀는 겸손하다. 자기가 누구이고 자기가 모신 분이 누구이지 안다면 너무도 아름다운 나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이 것이 신자의 삶이다.

 만약 우리도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그리고 강하게 살 수 있으랴. 매일 나귀의 심정으로 산다면 매일 꽃을 밟을 것이다. 그 리스도는 우리를 택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는자여 나와함 께 영광스런 행진을 하자. 함께 영광을 나누자.나를 태우라. 내 길을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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