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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자택일 (마 25:31-46, 신 30: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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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은 항상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중간 시점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존재, 즉 실존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항상 두 길 가운데 서서 양자택일의 결단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또한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왕상18:21"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1.알곡이냐 쭉정이냐

마3: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타작마당은 종말을 의미합니다.1)개인적 종말:예수님 재림전에 죽게 됨으로 맞이하는 개인적 심판, 2)인류의 종말:예수님의 재림으로 맞이하는 전 인류적인 심판. 종말의 심판의 때에 하나님은 분명코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는 심판을 하신다. 알곡은 곡간인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인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진다. 우리는 알곡이 되어야 한다. 알곡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쭉정이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알곡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고 쭉정이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요14"나는 길리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이르는 복을 누려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생명이신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2.좁은 문이냐, 넓은 문이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7:13-14) 넓은 문은:들어가기 편하고/ 쉬우나 좁은 문은 좁고/ 어려운 고난의 문이다. 우리는 지금 좁은 문을 선택할 수도 있고, 넓은 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좁은 문을 생명으로 인도하지만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좁은 문을 선택하여야 한다. 좁은 문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로 따져 볼 때 안 믿는 것보다는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생명의 길이기에 우리는 마땅히 선택하여야 합니다.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지만 생명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좁은 문으로 좁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3.양이냐 염소냐(마25:31-46)/

오른 편에는 양, 왼편에는 며소를 둔다고 했습니다. 양은 백색이요, 염소는 흑색이다. 이것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상징이다. 오른편의 양은 영생의 편이지만 왼편의 양은 영벌의 편입니다.

그러므로 오른 편의 양은 복받은 자이지만 왼편의 양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양이 되고 어떤 자가 염소가 됩니까 1)양은 예수님을 대접한 자입니다.=약한 자를 돌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돌보는 것이 됨으로 마지막 심판 때는 오른쪽의 양이 됩니다.

 2)염소는 예수님을 대접하지 않은 것입니다.=약한 자를 돌보지 않은 자는 바로 예수님을 돌보지 않은 자가 되어 염소와 같은 자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좇아 약한 자를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아벨의 제단이냐 가인의 제단이냐(창4:3-5)

아벨과 가인의 제단 중에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단을 받으셨다. 가인의 제사는 피없는 인본주의(자기중심)의 제사였지만 아벨의 제사는 피의 제사요, 속죄 제사요, 하나님 중심인 신본주의 제사였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가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벨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신본주의 예배를 선택하자.

 5.비둘기냐 까마귀냐(창8:7-9)

노아 홍수 때의 일이다. 배가 산 위에 머물게 되자 육지의 일이 궁금하여 먼저 까마귀를 방주에서 날려보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돌아 왔고 그것으로 지면에 아직 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까마귀는 은혜를 모르는 배반자가 되었고, 비둘기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달자가 되었다. 까마귀는 주인의 은혜를 망각한 채 썩은 시체를 먹느라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인본주의, 세속주의, 세상에 대한 애착사상을 의미합니다. 비둘기는 깨끗한 새로서 노아의 일에 협조했으며 은혜를 갚는 새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까마귀가 될 것이냐 아니면 비둘기가 될 것이냐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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