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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시험 (마 04:1-11, 히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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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절기에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말씀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셔서 시험 받으신 기사입니다. 광야라고하는 곳은 매우 거칠고 살벌한 땅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유대나라는 그 땅이 대부분 광야입니다. 좀 비옥 하고 물이 풍부한 곳은 요단강 계곡과 갈릴리 호수가 일부 뿐이라고 합니다.

이 광야라는 곳은 겨우 동물을 방목할 만한 물과 목초가 약간씩 있을 뿐이 요 인적은 드물고 경작은 전혀 불가능한 불모지입니다. 팔레스틴의 남쪽과 동쪽은 사막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브엘세바 광야요 동쪽은 엔게 디 광야인데 보통 이 두곳을 유대 광야라고 부릅니다. 거기에는 돌과 메마른 흙, 그리고 세찬 바람, 낮과 밤에 극심한 기온변화, 사나운 맹수들이 출몰하 는 매우 험준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곳에서 40일간을 홀로 계시면 서 기도하시고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모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했던 곳은 시내 광야였습니다. 그것은 바위와 돌만으로 덮여있는 시내반도 전체를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광야 에서 선민을 집단적으로 훈련하시고, 또한 이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 지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천국시민이 되게하는 장소로 이용하 셨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다윗도 그리고 사도 바울도 모두 다 광야의 훈 련과정을 거친 분들입니다. 인생길을 광야라고 하는 까닭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겪는 시련과 역경을 두고 하는 말인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광야의 과정들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여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 을 얻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광야에 40일을 계시면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다는 설명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우리도 동일한 시험을 당할 때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 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가지 시험은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들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시험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 하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도움을 받고 시험에 이기도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 나는 인간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겪었던 그 엄청난 투쟁은 결코 예 수님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홀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광야 40일은 제 3자나 목격자의 이야기가 아니 고 그 일을 몸소 겪으신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그 거칠고 황량한 광 야의 외로움, 거친 바위와 돌들, 한낮에 내려 쪼이는 태양과 밤에 어두움을 뚫고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견딜 수 없는 굶주림, 또 한 그 영혼을 유혹하는 마귀의 음성등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 다. 이 시험은 예수님이 실제로 겪으셨던 것이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인간 적 고뇌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한결같은 고난을 당하신 분'(히 4:15)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고 하 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뜻없이 당하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 다. 또 그가 시험을 받으신 것은 같은 시험을 받는 자들을 깊이 이해하시고 도우시며 마침내 그 시험을 이겨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께서 당하신 세가지 시험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이기셨으며 오늘 우리에게 그 시험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시험은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그 때 주 님은 심히 굶주리셨고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는 전 제를 하고 시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험을 보통 물질 때문에 오는 시 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 신지라' 라고 말한 것은 심각하고도 절실한 빵의 문제를 가지고 마귀가 예 수님을 시험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물질생활이란 것은 시 험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문제가 되는 것이 물질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물질을 가지고 여러가지로 시험을 합 니다. 물질만 풍족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하나의 시험입 니다. 이러한 시험에 빠지면 돈만을 사랑해서 탐욕에 빠지게 됩니다. 오직 물질이 최고요 그 이상이 없다는 생각은 하나님과 배치되는 사상입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지나치게 죄악시 하는 것도 모순이요 현실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돈을 곧 죄라고 생각하고 가난과 청빈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 정신은 아닙니다. 그래서 잠언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 게도 마옵소서.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 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잠 30:7)라고 지혜 자는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있는 기도이기는 하나 어떤 면 에서는 너무 소극적인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개인도 국가도 물질에 대하여 그것 자체를 죄악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이 소유하려는 의욕과 기대를 가집니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에 유대민족은 빵문제 하나도 해결하기 어려웠습니다.

주님께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볼 때에 무엇보다 먼저 빵문 제를 해결해 주어야하지 않을까, 그것이 이 백성들의 가장 절실한 문제요 요 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생각하셨던 것같습니다. 예수께서 만일

돌로 떡을 만들어 내는 경제기적을 일으키신다면 그것은 곧 '이 민족을 가난 과 기아에서 구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라고하는 것이 당시 유대 민중들의 일반적인 생각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유대 민중들의 가장 실제적이고 절박한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예수님은 그것을 마귀의 시험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빵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빵만 해결해 주면 다 된다고 하는 생각은 하나의 유혹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예수님은 그 유혹을 물리쳐 버렸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예수님이 구세주시요 메시야로 서의 증거와 그 자격이 확실히 들어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후진국이나 개발도상의 국민과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추구하는 것 은 빵 문제입니다. 물론 당연히 빵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 일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하셔야 할 근본사업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주 린 백성들에게 육신의 떡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라면 아마도 '거 지 근성'을 가진 무리들을 양산했을 것이며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사람들만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육신적으로도 영적 으로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벳세다 광야의 기적은 물질의 기적입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 을 배불리 먹이신 것은 뿐명히 하나의 '경제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과 만유의 주이시기 때문에 물질의 부 를 허락할 수 있으시고 떡을 배불리 먹여 줄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 때 이후로 다시는 그러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기적이 있은 후 수많 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 들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지 영생하도록 있는 참된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후 다 시 그런 일을 하지않으시니 모두 다 예수님을 떠나 버리고 겨우 열두 제자 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한다고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진정한 요구는 영적인 요구입니다. 인간에게 주는 진정한 사랑도 떡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입니다. 또 오늘의 교회가 참으로 해야 할 근본 목적도 구령애의 불타는 마음으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 문제는 도외시하고 지엽적인 문제를 마치 근본 문제인양 사람 을 현혹시키는 것은 분명히 마귀의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오신분이 지 경제기적을 이루려고 오신 분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부터 낙원 의 풍요로움과 축복을 보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드는 그러한 쉬운 지름길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어렵 고 고통스운 진리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가 하신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 만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 이었습니다.

마귀의 두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것을 전제로, 네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더라도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사자들을 명하여 손으 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이 것은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명성을 얻고자하는 유혹입니다.

인간의 지위가 높아지고, 권세와 명성이 크게 떨치고, 사람들로부터 큰 칭찬 과 찬사를 받게 될때, 마귀는 우리를 파멸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기와 명 예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때를 조심하라는고 하는 것은 그 기 회를 마귀가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그가 행한 기사.이적들과 그가 행하신 초자연적인 능력들은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 켰고 예수님 자신은 이로인하여 큰 인기와 명성을 얻었으며, 백성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큰 유 혹인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제자들 마저도 점점 높아 져 가는 예수님의 인기를 지켜 보면서 엉뚱한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그의 좌.우편에 앉을 것이냐 하는 것을 가지고 싸 움도 하고 자리를 청탁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 때까지 예수님이 세속적인 국 왕이 될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그러한 기대가 모두 오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 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라고 만류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무어라고 말씀항 셨습니까 그런 충고는 사탄이 시키는 말이며 결국 나를 넘어지게 만드는 일이라고 하면서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욱 생각하여야 하지 않겠 느냐고 타일르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중에서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자기가 그 처럼 위대한 자라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태도는 아닙니다. 하나님 의 일을 아무리 많이하고 크게 해도 그 감탄과 칭찬을 우리가 받을 수는 없 습니다. 예수님과 당시의 헤롯왕을 비교하여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헤 롯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성전을 건립했습니다. 단시일에 끝날 수 있는 일을 수십년을 끌면서 백성들의 인기와 신임과 명망을 독점하 려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은 헤롯을 가르켜 '여우'라고 하였겠습니까 이런 것은 그가 비록 성전을 지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일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우리가 항상 경성하여야할 것은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 의 일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길은 이적이나 마술로써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 수한 사랑과 선한 마음을 가지고 그를 위하여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람들의 감탄과 칭찬.명성과 인기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 라 묵묵히 주님만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 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는 억압과 강요도 아니고 이적과 마술도 아니며, 십 자가없는 천사의 말과 방언도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술책이나 재간은 필요 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가 가신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인기가 없 어도 좋고 오해와 멸시를 받아도 할 수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이라도 지고 가야합니다. 차라리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쉽고 인기를 얻을 수는 있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 너의 하나 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인기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 으며 자기 이름을 선전하는 일, 또는 이상하고 교묘한 수단으로 사람을 미혹 하고 끌어 모으는 일, 그리고 마땅히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일, 그것은 사람들이 아무리 합리화 한다해도 거부해야 될 마귀의 유혹일 뿐 입니다. 현대인들은 그것이 곧 성공인 줄 착각하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 러니까 우리의 성공의 기준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에 맞춰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예수가 가신 길이 아닌 것입니다.

세번째 시험은 무엇이었습니까 마귀가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는 제안입니다. 마귀와 타협하면 천하를 얻게 된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유혹을 받으셨읍니다. 성서는 예수에 대하여, 그 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는데 죄는 없으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인간개인의 구원과 세상의 구 원입니다. 천하만국과 만민 그리고 그 넓은 땅과 세상나라의 영광을 하나님 의 보좌에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시험하는 자는 가장 손쉽고 빠 르고 안전한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권력과 타협하면 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고 빠른 길입니다. 사탄은 '나에게 한번만 절하면 천 하만국이 다 네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네 꿈과 소원은 다 이루어 질 것 이다' 하면서 협상을 제의했습니다.

우리 인간생활에는 이와같이 불의한 세력이나 정당하지 않은 지름길이 하 나의 기회로 주어질 때가 많습니다. 절 한번만하면 천하를 다 얻을 수 있는 기회, 그것을 놓치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예수님도 만일 그 당시 로마정권과 타협하였다면 기독교가 그렇게 극심한 박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은 제국의 판도내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종교.신앙들을 모두 수용하 는정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와는 극렬한 대결이 계속되 었고 역대의 황제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극심한 박해를 가하였습니다. 그 래서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타협하지 아니했기 때문 입니다. 불의한 권세에게 무릎 꿇지 않고 절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가 불의한 세력과 손을 잡으면 그 때는 끝장입니다. 예수님이 절 한번 만 했다면 로마정부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과 뜻을 같이하는 그리스도안의 사랑의 형들이라면 그 누구와도 손 을 잡고 같이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세력에게 절하는 것이라면 비록 단 한번이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탄에게 절하고 천 하만국을 얻었다면 우리가 어찌 그 분을 오늘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따르겠 습니까 그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하셨습니다. 불의와의 타협을 과감히 거절하였 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사순절을 지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삶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를 따라갑시다. 모두 그 고난에 참여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지게하는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겨냅시다.

이러한 큰 승리와 기쁨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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