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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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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양이라는 말이 500번 이상 나옵니다. 양은 성경에서 가장 친근한 언어입니다. 구약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로는 양을 tson[촌]이라고 하니 "작은 가축" 이라는 뜻입니다. 양은 벌써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은 농사를 지었는데 아벨은 양치는 목동 이었습니다. 양은 인류 시초부터 사람과 함께 살아온 동물입니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양은 주된 재산입니다. 생계의 수단이었습니다. 통화가 없던 옛시절에 양은 거래의 수단이었습니다. 양은 그만큼 사람의 생활과 밀접했습니다. 양은 사람들에게 고기와 마시는 젖을 줍니다. 옷감을 짜는데 필요한 양털을 제공해 주고 또 거친 옷으로 만들 수 있는 양피를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사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요소였습니다. 번제물,속죄제물, 속건제물, 화목제물 등에 있어서는 빠지지 않는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에는 지붕 덮개로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양과 염소, 나귀와 노새, 소, 약대 등 4종류의 짐승이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가축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양이 가장 먼저 잘 길들여진 것입니다. 팔에스타인 농가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양 한두마리는 길렀습니다. 족장 시대 에는 가축으로 그 재산을 헤아렸습니다.
첫째. 양은 매우 애정이 깊은 동물입니다. 사무엘 하 12장 3절에 보면 양을 기르는 사람이 마치 자식 다루듯이 합니다. 순한 자식이 부모를 따르듯이 양는 사람을 잘 따릅니다. 사람의 손에서 풀을 받아 먹습니다. 둘째. 양은 비공격적입니다. 순하고 복종을 잘합니다. 사자나 이리, 뱀, 시랑이나 곰 같은 억센 짐승 앞에서는 오금을 못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7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우리 주님을 가리켜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양으로 비유 했습니다. 셋째. 양은 끊임없는 관심과 관리가 필요한 동물입니다. 양은 자기 방어의 힘이 약한만큼 목자의 소리에 잘 따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방심하면 마태복음 12장 11절에서와 같이 웅덩이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양의 중요한 특징은 무리를 지어 살기 좋아 합니다. 또한 풍뎅이가 한번 나자빠지면 자기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듯이 양도 마찬가지 입니다.
돌봐 주는 목자가 없다면 결국 죽고 맙니다. 양은 이렇게 쓸모가 많으면서도 연약 합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필요 합니다. 인류가 살아 오면서 양만큼 사람의 재산이 되어 떼를 지어 살면서도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의 특질은 항상 목자와 연관 됩니다. 목자를 히브리어로 [로에]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는 헬라어로 [포이멘]이라고 했습니다. 포이멘을 우리 말로는 목사라고 번역 했지만 목사가 아니라 목자라고 해야 더 적절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는 교회에 몇가지의 직분이 있습니다. 사도가 있습니다. 사도는 세습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사도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현존하는 직분이 아닙니다. 전도자와 장로가 있습니다. 전도자는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문적인 사람입니다. 이단사설을 분별하여 양들을 보호하고 장로를 세워 교회를 자립시키는 일을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목자와 교사는 모두 장로의 직분으로 이해 합니다. 한국교회는 장로가 제자리 채는 일부터 먼저 해야할 것입니다. 교회에 군림하는 계급이란 없습니다. 자신을 주님의 대리로 자처하는 소위 [거룩한 주의종]의 개념은 어디에서도 채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한사람 목사의 권위 아래 수종드는 장로의 직분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조직상 하나님이 주신 권위라는 주장은 사실상 인위적인 것입니다. 이런 인본주의적인 발상은 교회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할 수 없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이 명하지 않는 일을 자행하는 것은 마귀적이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 같아서 멸망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 전서 5장에서 말합니다. 1절서부터 "너희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사도의 말을 존중해야 합니다. 기록된 성경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은 참으로 존귀하고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장로들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선한 행위와 덕망으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말씀대로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성경은 양과 목자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양과 목자의 관계에 대한 비유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에스겔서 34장과 요한복음 10장은 가장 확대된 비유입니다.
오늘 드리는 본문 말씀에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인류를 양으로 보십니다. 그리고 인류는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유대지방에서 밤이 오면 목자는 양들을 우리 안에 몰아 넣습니다.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어두운 밤에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벽으로 두르기도 하고 혹은 산나무 울타리로 하는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두서넛 목자들이 한 울타리를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양들이 우리 안으로 다 들어가면 번갈아서 울타리 문을 지킵니다. 한 사람이 그 울타리 문을 지키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쉬기도 합니다.
아침이 오면 목자들이 울타리 문으로 옵니다. 각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주인된 목자를 따라 나섭니다. 목자는 그 양들을 몰고 들로 나갑니다. 주님은 이런 모습을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그 우리의 문이 되십니다.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도 되시고 목자도 되십니다. 참 목자나 양은 반드시 우리의 문을 통하여 출입합니다. 문을 통과하지 않고 울타리를 넘어서 들어 오는 것은 도적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양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탈취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 예루살렘의 종교가들을 향하여 이런 도적이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목자들이 다가 왔습니다. 도덕이라는 이름의 목자들. 정치라는 이름의 목자들. 우리 생활의 자양분이 되는 문화나 철학이라는 이름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혼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세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신없이 살다가도 목표하는 일이 성취 되었다고 여겨지면 으례히 생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만리장성을 쌓고 불로초 불사약을 구하던 진시황제가 그렇고, 3천 갑자년을 살았다는 동방삭이의 고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종교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종교는 영혼의 문제로 귀결하는 것입니다. 이미 원시인들까지도 신봉하는 종교가 있었다니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고 삶을 풍성하게 해줄 참 목자는 없습니다. 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까지도 도적이요 강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말씀 하십니다. 본문 말씀에서 주님이 나는 선한 목자라고 강하게 주장 하시는 것도 아마 에스겔서 34장에 낱낱이 열거된 거짓 목자, 삯군 목자들 때문에 더욱 그리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양의 목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양들의 생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모진 고통과 배신의 쓰라린 상처로 주님이 당하신 하중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영원한 빗장으로 꽁꽁 닫혔던 지옥문을 깨뜨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음부에서 부활의 열매를 가지고 우리에게 생명의 목자로 다가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나오면 영생의 꼴을 얻습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십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5절은 이미 우리가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이에게 " 돌아 왔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 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많은 상처들, 그 많은 아픔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양들은 그 손의 못자국을 보고 목자를 압니다. 그 몸에 함킨 수없는 상처를 보고 목자를 사랑합니다. 그 부르심의 인자한 목소리에 감격하여 목자를 따릅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양들만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버려진 양들을 부르십니다.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저들을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그 손바닥엔 마르지 않은 선혈이 뚝뚝 떨어집니다. 험한 세상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이리 저리 헤메시는 주님의 몸은 갈기 갈기 찢겨졌습니다. 그 상채기마다 핏방울이 아롱아롱 맺혀 있습니다. 2천년 전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은 피를 흘리시며 당신의 양들을 채고 있습니다. 저 애절한 음성을 들어 보십시요. 간장을 녹이는 통곡의 부르심이 아니십니까.
주님은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한마리의 양이라도 우리 안으로 불러서 보호 하시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영원하신 뜻입니다. 주님은 버려진 영혼들을 구원하여 관리하고 보호 하시려고 세상에 목자들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종들을 불러서 거룩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목자장이신 주님은 지금도 주님 명령에 충실한 목자들을 살피십니다.
당신이 다시 오실 때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주시려고 주님은 기대에 차있습니다. 참으로 사랑스런 우리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좋으신 우리의 목자장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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