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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귀를 탄 왕의 행차 (요 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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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에 와 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로 서 예수님이 이날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 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 주간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보내면서 마지막 중요한 활동과 교훈을 하셨습니다.그가 이때 예루살렘에 들어간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고 축제일로 기념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에 수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라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찬양하였다는 데에서 종려주일이란 이름 이 왔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모든 복음서들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역 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묘사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점들이 더러 있습니다.무엇 보다도 중요하게 생각되는 다른 점은 다른 복 음서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신 일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요한복음은 상당히 우발적인 것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환영한 수가 그렇게 많았다거나 크 게 주목할 만큼 그렇게 대대적인 행진이었다고 말하는것 같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탈 나귀도 사전에 준비 했다기 보다 그저 예수님이 나귀를 보고 그것을 얻어 탔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등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종려주일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위는 계 획적이라기 보다 우발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듯 합니다. 또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은 환영한 군중들이 예루살렘 행진의 출발점이라 할수 있는 올리브산 부근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고 지지하던 사람들이 주동이 되고 그들을 합세한 다른 순례자들이 참가한 시위라기 보다 예루살렘이 이미 들어 와 있던 사람들이 최근에 예수가 죽 은 나사로를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에서 예수를 보러 나온것 같이 기록하 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예수님을 정말 메시아로 믿고 그를 열광적 으로 환영한 사람들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독특한 묘사 를 통하여 요한복음의 기자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군중들이 예수님을 찬양했던, "호산나, 야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나 또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으라!"(이 귀절은 시편에는 없는 귀절 이다.)라는 말 등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축복하고 환영하고 있 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차에 모습은 이 노래의 내용과잘 어울리 는것 같지 않습니다. 이 노래는 시편 118편 25-26의 말씀에서 따온 것입 니다:

"주소서 야훼여 구원을 주소서

주소서, 야훼여, 승리를 주소서.

 야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가 야훼의 집에서 그대들을 축하하리라"(시 118:25-20)

그런데 그의 모습이 매우 초라한 것을 우리는 주목합니다. 군마를 타 고 당당하게 들어오는 위대한 개선장군이나 통치자의 모습이나 행차가 아 닙니다. "예수께서 나귀 한마리를 얻어 타셨다"고 하여 우연히 나귀를 얻 어타게 된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가는 사람은 이스 라엘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호산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 '호산나' 란 말은 '지금 구원하소서'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통치자나 영웅 에게 구원해 달라는 부르짖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군중들이 이렇게 왕으로 환호하는데도 이에 대하여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환영 하는 것을 묵인했다는 것이 되고 또 자신이 그것을 인정한 것이 될 수 있 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무리들이 그를 이스라엘의 앙이라고 믿고 그렇게 환영 하는 것을 묵인하고 그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랬다면 어떤 의 미에서였을까요 그는 예루살렘에 오시기 전에 광야에서 수천 명의 사람 들을 기적으로 떡을 먹었을때 사람들이 그를 강제로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을때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몸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왕이 라고 환호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 은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지금은 자인하는 것입니까

또 예수님이 며칠 후에 체포되어 빌라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 었을때 빌라도가 '그 대가 유대인의 왕인가"라고 심문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다...'(요한 18:37)라고 시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시인을 하였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랬을까요

여기 나귀를 탄 사람, 별로 보잘 것 없이 평범하게 차린 시골 사람, 그가 유대인의 왕이란 말입니다. 나귀를 타신 것은 구약 즈가리야서의 인 용에서 온 것입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 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즈가리야 9:9)

여기 즈가리랴에서 분명히 나오는 대로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 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 어오는 겸비한 왕인 메시아는 어떤 분입니까 10절에 그는 "군마"를 없에 고, 병기인, 활을 꺽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은 메시아다 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 나 동시에 이 메시아는 군비를 감축하는 정도가 아니라 군비를 아예 폐지 하고, "뭇 민족에게 편화를 선포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활을 꺽고군마"를 없앨 평화의 왕은 군마를 타고 오시는 분이 아 니고 나귀를 타고 겸비한 모습을 하고 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군마는 군마로 없엘수 없다는 진리를 여기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오 시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비한 왕, 곧 평화의 왕 만이 전쟁 을 영원히 폐지하고 진정한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즈가리야에서 메시아의 묘사는 오늘 우리가 교독문으로 읽은 이사야서 42장에 나타난 묘사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의 예언은 고난 의 종에 관한 것으로 바로 장차 올 메시아를 묘사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 니다. 그 메시아는 어떤 모습입니까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 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버리지 아 니하고, 신비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이사야 42:2-3)

요한이 이 즈가랴아서를 인용하면서 예수는 왕으로 오시는 분이다 라 는 것, 그러나 이 새로운 이스라엘 왕은 평화의 왕이라는 것 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여기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 을 인정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로, 또는 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생각하고 있 는 그런 메시아, 곧 정치적 왕 또는 군사적 장군과 같은 그러한 왕이 아 니고 평화의 실현자로서의 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바로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도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시인했다고 보여집니다.

 이스라엘의 왕, 평화의 실현자로서의 왕 예수님이 수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왕이 왕의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귀를 타고 왔습니다. 이러한 메시아의 초라한 행차는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 대통령이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만, 어떤 신문에서는 대통령이 해외 나들이 행차가 너 무 요란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지금의 '왕'의 행차가 그렇다면 고대 절대 왕정시대의 왕의 행차야 오죽이나 요란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행차 는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초라한 행차 광경은 평화의 왕에 게 아주 썩 잘 어울리는 행차광경이라고 봅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예수님의 행차는 단순히 대통령의 행차 그 자체의 관련된 문제만이 아니라고 보입니다. 보다 중요한 평화의 정책 문제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힘의 균 형의 논리를 익숙하게 들어 왔습니다. 그것은 지난 냉전시대의 국제정책 의 헌법과 같은 어떤 움직일 수 없는 어떤 진리인것 처럼 생각하여 온 것 입니다. 그것은 무었입니까 결국 힘은 힘으로, 군사력은 군사력으로, 전 쟁은 전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미국이 이 힘의 균형의 논리로 군비를 확장해 왓고 전쟁을 일삼아 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반도에 북한의 대표들이 핵문제를 둘러싸고 위기감이 팽 배합니다. 며칠전에 남.북 대표들이 판문점에서 만났는데, 북한의 대표들 이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남한 당국 이 언론에 퍼트렷습니다. 그리고는 평양 불바다니 전쟁이 일어나면 남쪽 에서는 그것을 통일전쟁으로 이끌수 있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북한 사회주의 사회는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의 노래를 알지 못하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메시아가 군마를 없애고 활을 꺽고 평화를 실현하리라 는 평화의 왕을 믿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쪽 사람들이 비록 서울 불바다 운운하는 바보같은 소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쪽에서 평양 불바다나 통일전쟁 운운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우리는 나뀌 새끼를 타고 오는 메시 아로 대답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김영삼 정권은 위기감을 더욱 조성하고 상승시키고 있는듯 합니다. 이것을 매우 우려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만일 예수님이 무서운 장군이나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가진 왕 이나 또는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천상의 존재로 오셨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여전히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를 친근하게 생각하고 그를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 들이고 믿을수 있는 것은 그의 초월적인 능력이나 지위 때문이라기 보다 우리들과 꼭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가 만일 "하는님의 본체" 그대로, "하느님과 동등 됨"을 그대로 가지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무서워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존경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그가 천사와 같은 영광스럽고 화려한 천상의 존재로, 초인간적인 존재로 권위를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우리 위에 군림하셨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를 복종할수 잇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사랑하기는 어 려울 것입니다.

 그가 만약 권력을 가지고 재력을 가진 귀족으로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 고 우리에게 좋은 정치를 베풀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 에게 능력과 선정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 리가 진정으로 해방되었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고 또 우리는 그를 진 정으로 우리의 친구, 형님 오빠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를 사랑하고 그를 존경하고 그를 가깝게 친근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바로 우리와 꼭 같은 나약한 인가의 모습을 하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에 묘사되어 잇는 대로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취하셨으며 사람의 형상을 입으시고"우리에게 오셨고 우리와 함께 살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랑하는 주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George T. Liddell은 시, "보통인간 그리스도"(The Christ of Commen Folks)를 소개합니다:

나는 갈릴리의 사람, 주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랑하노라.

 그가 와서 나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땀흘리고 일하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왕중의 왕의 찬양일랑은 다른 사람들이나 하려므나 평범한 것들(common things)의 왕, 평범한 인간의 그리스도를 나는 사 랑 하노라

거지와 약한 자들, 가난하고 병들고 눈먼자들,

길잃고 방황하는 자들(the wayward and the tempted), 이런 자들은 그 는 찾아다녔도다

형제나 친구처럼 또는 고칠 물건을 찾아 떠돌아 다니는 노동차처럼 그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을 도와 주었다

나의 주님은 오늘날까지도 나같은 평범한 사람임을 나는 안다 그는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법이 없음을 나는 안다 좀고 더러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를 사랑한다 그는 지친 사람들을 찾아 만나고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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