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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이 너희들중에 있으니 (요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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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그들이 알기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고 알았는데 예수의 말은 그가 들려야 한다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빛이 어디 있는가를 찾아 다닌다. 빛은 무엇이고 빛은 어디 있는가를 찾고 있다. 그러면 빛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태양이나 전기불을 보면서 ' 이것이 빛이구나 '라고 아는 것찼 곧 빛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세상에 빛이라 " 예수님은 자기가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은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궁핍을 해결해 줄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 그런때 예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이다. 모두가 왕이 되고 싶은 세계에서 그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오셨다. 이런 분이 우리의 빛으로 오셨다. 왕이 돼야만 행복한 사람들에게 예수는 어린 양으로 오셔서 사람들의 빛이 되신 것이다. 부자가 되어야 행복하다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으로 오셔서 그들의 빛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빛이다. 간혹 빛을 찾으려는 사람중에 엉뚱한 빛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를 하다가 빛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비치는 빛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게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참 빛은 우리 가운데 있다. 내가 어둡고 곤고할 때 주위를 살펴보면 빛이 있게 된다. 그리스도는 항상 사람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이 하나만 있으면 그가 빛이 되는 것이다. 종교안에는 이런 빛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어두울 때 밝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모두 다 같은 차원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빛이 있을 수가 없다. 단지 좀 열심인 사람, 좀 성실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 빛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을 만나기 위해 산으로 기도원으로 가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얻어낸 빛은 잠시 우리를 신비로운 황홀들의 빛이었다. 빛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고 차원이 다른곳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이다. 빵으로 고통하는 사람에게 빵으로 살지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빛이고 명예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주님으로만 만족해하는 사람이 빛이다. 빛은 교회안에 있다. 우리는 교회안에서 빛을 찾아야 한다. 나를 둘러싼 형제 자매들이 다 나의 빛이다. 형제 자매들의 말을 잘 들으면 우리는 빛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또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어 버리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보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자기가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는 자기 생명을 미워함으로, 자기 생명을 깸으로 영원한 생명을 해방시킨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의 빛이다. 주 예수 자신이 사람들의 빛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있었다. 군중들은 그녀를 끌고 예수께 와서 이 여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게 되었다.( 물론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기록되었는데 예수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말은 흑암이다. 앞뒤가 꽉 막혀서 올데도 없고 갈 데도 없다. 모세다.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빛이 되어서 우리를 비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빛이 없다. 자기 스스로 빛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빛을 만날 수 없다. 피조물이 그 지은 자를 부인하고 무슨 길이 있겠는가 주님 자신이 길이다. 내 앞에 있는 형제가 나의 길이다. 우리는 서로가 다 길이다. 옛날에 나도 하나님과 직통으로 연락해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굉장히 혼란했다는 생각이 난다. 아마 하나님 생각과 내 생각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였던 것같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자기 생각은 가까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생각이라고 믿는 것이 자기 생각을 믿는 것이 되고 말았던 것 같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데 ' 너는 서울로 가라 ' 는 음성이 하늘에서 들렸다고 하자. 그 사람은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고 가겠지만 사실은 그가 평소에 서울에 가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개인 개인을 쫓아다니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예수를 보내는 분이시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 누구 들었거늘 너는 왜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 고 묻게 되는 것이다.이것은 빛 앞에서 빛을 찾는 사람같고 길안에서 길을 묻는 사람같다. 이렇게 사람은 항상 자기 앞에 보이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다른 것을 찾는다. 아버지앞에서 아버지를 찾고 스승앞에서 스승을 찾는다. 그래서 결국 엉뚱한 것을 붙잡게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은 ' 빛이 너희중에 있을 때 빛을 믿으라. '고 하신다.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희들에 대하여 나귀를 타고 가시는 당신 자신이 빛이기 때문이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며 '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 했을 때 ' 주 하나님만 경배하라 하였느니라.' 라는 대답은 정당한 것이었다. 정당한 위치에서 나온 말만이 진실이고 빛이다. 빛이신 분 앞에서 왜 빛을 찾는가! 길이신 분 앞에서 왜 길을 찾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할 때 분명히 정해 놓은 길이 있다.그것이 생명이다. 생명자체가 길이다. ' 나 '와 ' 갈길 '이 따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 나 '와 ' 나의 운명 ' 이 다르지 않다. 내가 곧 나의 운명이다. 하나님은 ' 나 '를 창조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 생명이 순수하기만 하면 그 생명은 길이기도 하고 빛이기도 하다. 좋은 예로 개미를 보자. 하나님은 개미를 만드실 때 그냥 개미를 만드셨을 뿐이지 지혜를 따로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개미는 그 생명자체가 지혜이기 때문에 지혜를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지혜롭게 살고 있다. 우리가 말을 하자면 하나님이 개미를 지혜롭게 하셨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는 개미와 지혜를 가를 수 없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만일 창조한대로 산다면 그것이 바로 길이고 빛이다. 우리자신이 확실하게 하나님에게로 온 줄을 안다면 그 인식 자체가 빛이고 길이고 지혜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로 온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당장 흑암에 헤메이게 되여 빛앞에서 빛을 찾고 길앞에서 길을 찾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앞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신다하거늘 어찌하여 너는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하느냐. 인자가 누구냐.'라고 묻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는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이다. 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아니고 살아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죽는다는 말을 듣고 죽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항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에 대해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빛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가까이 있을 때 보고 듣고 만져서 빛의 자녀가 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한 빛 가운데 거하게 된다. 이것이 곧 영원한 국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을 성경에서는 " 저의 눈을 멀게 하시고 저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하였음이라. "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는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영광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찾는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 다르기 때문에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앞에 놓고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라고 묻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마치 눈이 먼 것처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영광을 본 후 ' 주여! 내 입술이 부정합니다. 내 입술을 숫불로 태워 주십시요 ' 라고 기도하였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니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이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의 영광은 사람의 개념안에는 없는 것이므로 마치 하나님이 깨닫지 못하도록 눈을 멀게 한 것 같다고 이사야는 표현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 다. 우리는 교회안의 삶이 너무 즐겁고 영광스러운데 세상 사람들은 즐거워 하는 우리를 보고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즐거운 것도 없는데 공연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람의 눈과 귀로 볼 수 없는 영광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가까이 계신다. 빛은 우리 가운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 형제 한 형제를 소중히 하지않으면 안된다. ' 저런 것이 무슨 빛이야. 나는 큰 빛을 보리라' 한다면 그런 사람은 영원히 빛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기도중에 큰 빛을 보았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빛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이지만 교회안에서의 빛은 반딧불처럼 작지만 영원히 우리의 心碑에 새겨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빛을 소중히 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는 항상 나귀를 탄 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는 항상 한 알의 밀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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