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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후심판경고한선지자나훔 (나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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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저자소개 우리는 나훔에 대해서 "악인의 멸망을 예언하는 선지자"라는 명칭을 붙입니다. 나 훔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는 역사적으로 주전 620년 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예언을 선포한 때는 주전 612년경 전후였습니다. 나훔이 이 심판의 예언과 경고를 한 대상은 니느웨입니다.

당시의 가장 강력한 세계제국이 앗수르 였습니다. 이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살 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나훔의 심판의 멧세지가 띄워진 것입니다. 니느웨는 나훔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주전 607년경에 멸망했습니다. 지금은 그 자취도 찾을 길이 없는 그러한 옛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100 여년 전, 1850년대에 한 고고학자 팀에 의해서 면망된 니느웨 성의 성터가 발견되었습니다.

나훔은 연대적으로 요나 선지자 보다 약 150년 후에 등장합니다. 요나와 나훔은 둘 다 같은 대상을 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멧세지를 던졌습니다. 둘 다 앗수르의 수도 인 니읏 백성들을 향해서 심판의 멧세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 은 달랐습니다. 물론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다 같이 증거했습니다. 요나가 이 멧세지를 던졌을 때 니느웨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 였습니까 나중에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니느웨 성을 향한심판을 작정하셨 지만 그 백성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긍휼히 여겨 그 백성의 죄를 용서하 시고 그들을 실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요나 선지자의 회개의 멧세지와 또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삶을 돌이켰던 니느웨 백성들이 약 일백년이 지 나자 그들은 다시 더욱 강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 앞 에서 돌이킨 것을 다시 돌이켰습니다.

한 신학자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했던 것을 다시 회개했다"는 대단히 흥미 있는 표현 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니느웨 백성들의 죄악을 간과 할 수 없는 마지 막 시점 도달하여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나훔이라는 선지자를 세워서 그 백 성들을 향해 멧세지를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예언서에는 하나님의 심판 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멧세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훔서에는 하 나님의 구원의 멧세지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심판의 멧세지 밖에는 없습니다. 그들 의 범죄 때문에 그들이 멸망한다는 멧세지로 그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 미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그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경홀히 여겨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훔서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여기에 구원의 멧세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나훔서 안에는 이제 그 백성이 멸망한다는 심판의 멧세지, 재앙의 멧세지만이 있습 니다.그래서 이 선지자를 일컫어 "악인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라고 합니다.

구원의 약속이 없습니다.구원의 시간은 이미 지나 갔습니다. 사람이 언제나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착각입니다. 언제나 회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할 때에만 회개가 가는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동안에만 회 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긍휼이 중단되는 순간,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떠나는 순간에는 아무도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 할 만한 때에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 다. 회개는 본질적으로 성령의 일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소리쳤다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회개나 전도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전도를 해보신 분들은 그것을 알 것입니다. 꼭 같은 말씀을 꼭같은 삼황에서 전해도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의 전도 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에게 이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 밖에 없습니다. 나훔이 바로 그 멸망을 외쳤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1장 1절을 보십시오.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이것이 우리가 나훔에 대해 알 수 있는 전부 입니다. 그는 엘고스 출신이며 이름은 나훔이라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이런 엄청난 멧세지를 전달하는 대부분의 예언자들 에 관해서 그들의 사생활이나 그들의 삶의 내용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요 성경은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말 씀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멧세지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의 중요한 멧세지는 "하나님이 이 역사속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선지자는 다만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므로 그들이 영웅시 되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 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의 기자들은 이런 예언자들의 이력서에 관한 긴 설명을 삼가했나 봅니다. 성경은 나훔이 엘고스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엘고스의 현재 지명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으며 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부 합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견해는 나훙의 이름과 관련된 지명으 로서 가버나움이 그 엘고스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훔은 스바냐나 하박국, 예레미야와 동 시대인 이었습니다. 나훔서의 현저한 특색 가운데 하나는 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훔서 전체가 일종의 시입 니다. 이 시는 히브리 알파벱 순으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적인 예언이지만 여기에 는 낭만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준엄한 공의를 선포하는 시 입니다. 악인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시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기록한 선지자의 이름의 뜻은 나훔서의 멧세지의 내용과는 정반대 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위로하다"는 것입니다. "위로하다, 격려 하다."

역사적 배경 하나님께서는, 한때 회개의 태도를 보였던 니느웨 백성들에게 긍휼과 용서를 베푸 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체헝하고 나서도 이 니느웨 백성 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삶의 태도를 변화 시키기는 커녕 점점 더 오만해져 가기 시작퓰윱강. 그들은 그들의 통치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절정에 달했던 약 200년 동안 말 그대로 전세계를 제패하면서 그들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세계 최대에 달했으며 그들이 점령하는 나라마다 피 정 복민들을 비 인간적으로 학대하면서 그들의 영토를 확장시켜 갔습니다. 그 당시 앗 수르는 말 그대로 공포와 전휼의 대상 이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북방 이스라엘 왕국 을 멸망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북방 이스라엘의 멸망에만 만족하지 않고 드디어 남방 유다까지 삼 킬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점차 유다의 변두리 지역을 점령하더니 드디 어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기에 이르셨습니다. 이때 군대를 이끌고 왔던 앗수르의 왕이 산헤드립입니다. 산헤드립 대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습니 다. 그때 유다 백성들이 이 성을 지키리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 안에 성터를 보전하고 있는 공이 있습니다. 그곳에 화 살 다섯개가 보전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앗수르가 쳐들어 왔을 때 사용했던 화살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현대 성경 고고학의 위대한 발견입니다.

아무튼 유다 백성들이 자기 나라를 수호할 수 있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는데 천재지 변을 통해서 산헤드립이 갑자기 후퇴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는것은 "누워서 떡 먹기"라고 생각하고 자신만만해 했습니다. 그러나 뜻하 지 아니한 여러가지 자연 재해, 쥐가 들끓고 또 격렬한 태양 빛 때문에 그들의 수로 가 완전히 차단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서 그들이 퇴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 여 유다는 앗수르 왕국이 점령하지 못한 유일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앗수르 의 침략의 손길이 잠시 멈추고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갔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께 서 나훔이라는 선지자를 들어서 니느웨이가 멸망하리라는 멧세지를 전하게 하였습니 다. 느니웨 사람들에가는 나훔이 전한 그 멧세지가 "멸망"이며 "심판"이지만 유다 백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하나님께서 "위로"라는 의미를 지닌 나훔이라는 선지자를 쓰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우리는 그 당시 니느웨가 얼마나 강성한 나라였는 가를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 습니다. 예컨대 1장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강장(강건)하고 중다(검개)할지라도 반드시 멸절 을 당하리니...."

그들이 아무리 강하고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할지라도 멸망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들이 군사적으로 중다하고 강력함을 이 말씀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 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너의 결박을 끊으리라."

그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이 지운 멍에를 하나님께서 깨뜨리고 그 결박을 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2장 3절을 보십시오.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 거의 철이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니느웨 군사들의 위용을 신감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2장 8절을 보십시오.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몽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물이 모인 못"이란 그 당시 세계의 중심지 였다는 말입니다. 정신적으로, 군사적 으로, 경제적으로 세계의 심장부 같은 도시가 바로 니느웨였습니다. 9절을 보십시 오.

 "네가 네 상고를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황충이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 고."

장사하는 자들이 하늘의 별보다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이 수적으로 우세 했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의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대장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 었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수 없도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도 그 당시에 니느웨가 자랑하고 있었던 그들의 위용을 가 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내용연구 나훔서는 모두 세 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의 주제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니느 웨는 멸망한다는 심판의 선언이 1장의 내용입니다. 2장은 "심판에 대한 설명"입니 다.

"이렇게 그들이 멸망한다", "이렇게 심판 는다"는 심판의 성명이 2장의 내용을 이룹니다. 3장은 "왜 심판 받는가"하는 "심판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 장에 걸친 나훙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중심 사상을 살펴 볼 수 있습 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범죄와 범죄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그들은 어떤 죄를 범했을까요 본문에 여러가지 많은 죄가 묘사되어 있으나 두 가 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쳇\ 우상숭배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 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여 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비루함이니라"(1:14).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진노를 발하시는 죄는 항상 우상 숭배의 죄입 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거룩한 진노를 발하시는 죄는 항상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미워하십니다.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존 재,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존재, 하 나님을 향한 그 순결한 시선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내가 나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 내가 돌아가야 할 그 분, 내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 그분, 그 분보다 더 많은 비중을 두는 모든 것이 일체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아니 지금도 우매한 민족들은 고목이나 탑, 태양이나 달 등 자연을 숭 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런 것보다 더 간교한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 니다. 이런 우상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둘째\ 인간 학대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 하는도다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 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같은 창, 살륙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겅, 무수한 시 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 하느니라"(1-4절).

 이 모든 종류의 살인, 간음, 폭행, 거짓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우리는 인간에 대 한 학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왜 발생합니까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내 사랑의 전부 가 되면 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함이 내 삶의 절 대적인 가치가 된 사람이 우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까 필요에 의해서 쓰고 이용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애정을 두지 않습니다. 물질이 필요하고 힘도 필요하지만, 이것들이 우상이 될수는 없습니 다. 내 애정과 내 사랑은 나를 창조하신 내 생명의 주님, 그분 안에만 있습니다. 그 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상을 숭배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떻게 하면 인간을 학대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람을 사랑하면 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하나 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수 많은 계명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초 점은 사랑입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을 사랑하는 자리에 머물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 신앙 생활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총체이며 요약입니다. 주를 사랑하면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 람이 인간을 학대할 수 없습니다. 십계명을 암송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면,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의 물건인 재산을 도적질할 수 없 습니다.

내가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면 이웃을 향해서 것짓 증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인간을 향한 이계명의 요약은 실로 이 한마디 단어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나 이계명을 떠났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이 죄를 범했을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원인 이라는 것을 나훔서의 멧세지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 강대한 앗수라 제국이, 태양이 지지않는 나라인 앗수르 제국이 하루 아침에 망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로마에 가보면 아마도 폼페이의 최후의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 비참한 인류 문화사의 종말의 흔적이 남아 있는 폼페이. 거기에 가면 지금도, 간음을 하다가 죽어 나둥그러진 남녀 시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앗수르도 참담하게 망했습니다. 앗수르는 나훔이 심판을 예언한 지 불과 20년만에 망합니다. 남쪽에서 바벧론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동쪽으로부터 소위 메 대 제국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북쪽에서 스구디아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결정적 으로 이바벧론에 의해 앗수르가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 최후가 예언되고 있습니다.

2장 1절을 보십시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 왔나니...."

심판을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 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 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1-3절).

 그러나 이 멸망을 예언하는 장면에서 반복되는 선언을 보십시오. 2장 1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오만했던 앗수르 제국, 하나님께서 용서와 긍휼의 기회를 주셨으나 돈이키지 않았 던 이 앗수르, 그들의 강포,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그들의 오만과 자존심이 하늘 을 찌를 듯했을 때 주께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네 대적이다."

우리의 대적은 이 땅에 아무도 없다고 그들이 선언했을 때 하나님아 하늘에서 이렇 게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네 대적이다."

아무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다고 그들은 큰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대적한다"고 선언하시고 역사의 현장에 뛰어 드십니다. 이제 3장 5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우쭌하였던 앗수르 제국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이렇 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그러나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안고 자기의 힘만을 믿고 날 뛰었던 니느 웨의 주민들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그리하여 기월절 607년, 결국 앗수르 제국이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위로

우리는 악인이 득세하고 오히려 의가 짓밟히는 부조리한 역사의 현장을 바라볼 때 마다 "하나님, 왜 이렇게 세상이 어둡습니까 왜 부조리가 판을 찹니까"라는 질문 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역사 속에 간 섭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의 대상인 자들에게는 이것이 진노입니 다. 저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랬던 주의 백성들에게는 이 것이 곧 위로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1장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 니라."

주의 심판이 앗수르 제국에 임하고 일는 동안에 주의 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멧세지가 선포되었습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 라."

나훔서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일뿐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 보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멧세지 이기도 합니다. 1장 5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신위에 있도다 유다 야...." 그렇습니다.. 앗수르의 강성, 악인의 득세, 악인의 번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이 부조리와 어두움이 언제까지 계속됩니까"라는 탄원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유다 백성들에게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소식과 그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위로를 선포하십 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 라"(7절).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 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단순하 위로가 아닙니다. 단순한 격 려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위로와 격려 이상의 무게를 지닌 멧세지 입니다. 다 시 1장 15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위에 있도다. 유다 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 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자 악인의 멸망, 악인의 심판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향한 이 멧세지 를 잊지 않으십니다.

 "유다여,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여!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위에 있을 것이다. 시온의 성산에 주의 백성들의 발이 세워지는 그 날이 올 것이다.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으라. 너희의 악인은 내가 진멸하겠다. 그러 므로 너희는 안심하고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으라."

이 말씀은 "네 의무를 다하라"고 백성들을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심판하 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증언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위 로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격려입니다.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역사가 요동할 때, 이 세상이 말할 수 억는 어두움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 들어갈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 들과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왜, 하나님...." 이제, 우리는 15절의 말씀에서 하 나님의 위로를 발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악인이 득세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의로우십니다. 우리 주님은 잠시 자신의 역사의 의로운 집행을 유 보하고 계실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실망하지 말고 낙심치 말 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성도에게 명하신 삶의 거룩한 의무를 다 하십시오.

 하나님의 자기 계시 이 책에는 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나타납니다.

우선 1장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 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여기에 두개의 모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는 것과 "죄인을 결코 사히지 아니 하신다"는 것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 분은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하나님은 앞서 이 사실을 드러 내셨습니다. 요나 선지자 때,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심판을 작정하시고도 그 백성이 회개했을 때 노하기를 더디하시던 그 하나님. 여기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경혼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 죄를 무한히 반복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마침내 여러분의 일을 간섭하시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까지 마저 읽어야 합니다.

 "죄인은 결코 사하지 아니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하지 않는다" 는 말을 원문 그대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죄인을 형벌받지 않은 채 내 버려 두지 않으시고"

즉 하나님께서는 죄를 그대로 간과하지 않으시고 때가 이르면 죄인을 반드시 다루 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의를 집행하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 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또 하나의 얼굴은 죄악을 그대로 방 관만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두가지 성품을 발견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그러나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 그분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죄를 반드시 처리 하시고야 마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 긍휼과 공의의 하나님의 얼굴이 본문의 멧세지 속에서 드러나 고 있습니다. 이제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집니다. "투기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니요 그 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에서 "투기와 보복"이 아닙니다. 투기라는 말은 본래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향한 나의 감정이 표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면 깊숙히 자리잡은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 입니다. 영어로는 "jealous"인데 이는 "열심이있다"는 말과 같은 어근을 지닙니다. 그래서 "열심이 있다"는 말이나 "투기 한다"는 말은 모두 감정이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가르킵니다. 즉 하나님 은 사물을 적당히 처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 깊은 감정을 가지고 개 입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역사와 인간의 삶의 현장을 지켜 보십니다.

 "투기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니느웨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서 깊은 심려를 가지고 그들의 역사 속에 개입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키는 표현입니다.

 "보복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악인에 대한 징벌의 개념을 가집니다. 내가 손해를 보았으니 너도 손해를 보아야 한다는 그런 차원의 보복이 아닙니다. 악인을 징벌하고야 마는 하나님의 성 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투기와 보복의 하나님."

이 말은 "사랑과 의의 하나님" 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단호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깊이, 그리고 사랑의 깊이를 의미 심장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이 표현 을 쓴 것입니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르 더디하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동시에 죄인을 그대로 간과 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악을 처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개 인의 삶속에서 그리고 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이 하나님의 의를 집행하시고야 맙 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나 주님의 의 앞에서 떠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떪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필요합니 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치시기도 합니다. 누구를 들 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셨습니까 앗수르, 바벧론을 들어 이스라엘을 치셨습니 다. 즉 믿는 사람을 징벌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들어서 치신 것입니다. 지 금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여기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 삶속에서 악을 징벌하 시고 의를 실현 하시기 위해서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가까이하고 그 주님 앞에 깊은 애정으로 나아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의 앞에서 경건하게 머물러 사는 삶의 자 세가 동시에 요청됩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 말씀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 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왜 경건이 성취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악을 극 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 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에게도 한 집단에게도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의인은 나라를 흥케하고 죄는 그 백성 을 욕되게 한다고 잠언 기자는 가르쳤습니다.

 3. 결론

선지자를 통하여 악인의 멸망을 예언하신 하나님은 오늘의 역사 속에서도 악인을 향한 멸망을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멸망을 선언 하시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 람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신뢰하는 자를 내가 안다. 환난 때에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 주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만이 바울처럼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 하리요"(롬 8:31).

그러나 하나님이 두려운 것을 모르고, 자기의 삶에서 자기가 누리고 있는 특권을 지기의 성취인 양 오만하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대적하리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인격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삶을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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