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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조물의 대망 (롬 08: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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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사람 사도 바울은 존재하는 전 피조세계와 영계에서 엄청남 ‘탄식’의 소리, 곧 끙끙 앓고 있는 신음의 소리가 들려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의 신음 소리가 아니라 대망(待望)의 신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신음 중에 첫번째는 ‘피조물의 대망’이라고 하였습니다.
8장 19절에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피조물’이 무엇인가
① 지음 받은 전 인류를 총칭하는 것 ② 인간 외의 모든 존재 세계를 총칭한다는 것, 말하자면, 동물계, 식물계, 광물계, 생물계, 무생물계등...을 의미한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양자 모두 해당됩니다.
그러나 다음에 성도의 탄식이 따라 나오는 사실을 볼 때 여기 ‘피조물’(κτσω)응 이성 없는 자연계, 즉 인간계를 제외한 우주 만물과 그 전 영역을 뜻함이라고 봄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고대(ποκαπαδοκα)란 말은 ‘목’(καπα) + 뽑아 내어(π) + 바라봄(δοκω)을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학이 목을 쭉 뽑고 기다린다’는 ‘학수고대(鶴首苦待)’를 뜻합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 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한 말 가운데는 바울의 학수고대가 있습니다. 극성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음 받은 피조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목을 쭉 빼서 치켜들고, 긴장하여 대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그렇게 학수고대함인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학수고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후사들을 의미합니다(롬8:14-16).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원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재림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성도들의 영화’와 ‘영화의 세계’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의 완전 구원과 천국 세계의 도래를 뜻합니다. 참으로 중대한 말씀이 아닌가 우리가 이 세상 학자들에게 전혀 들어 볼래야 볼 수 없는 말이 아닌가
바울은 지금 존재하는 전 피조 세계 곧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성도의 영화’를 대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망하는 정도와 내용이 ‘탄식’ 곧 ‘신음’ 다시 말해서 끙끙 앓고 있는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대망 속에 토하여 지는 탄식의 이유가 무엇인가

Ⅰ.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함이 하나님 본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20절에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공동 번역은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될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허무한 것’이 무엇인가 사탄과 우상,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뜻합니다. ‘허무한 것’이란 타락함, 무익함을 뜻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도록 하였을까
그것은 만물의 왕으로 창조하신 인간들의 타락 때문입니다. 지음 받은 피조 세계의 본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음 받은 것입니다(사43:7, 시19:). 그리고 아담은 이러한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요, 개발하는 선지자요,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이었습니다(창1:28).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여 허무한데 곧 사탄에게 굴복하는 바람에 그 아담의 지배 아래 있던 피조물도 함께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그 고유한 기능이 상실되니, 만물도 그 본래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① 창조주 하나님의 본래 뜻도 아니요 ② 지음 받은 인생의 본래 뜻도 아니요, ③ 더욱이 존재하는 피조물의 본래 뜻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모든 피조 세계는 탄식하면서 학수고대하는 것이 ‘인간의 회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만물의 허무한데 굴복을 가져 왔듯이, 인간의 회복이 만물의 회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Ⅱ.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로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피조물의 ‘바람’은 필수적인 바람을 뜻합니다.
‘썩어질 종노릇’이란 무슨 뜻인가 사탄의 도구나 죄와 불의의 도구로 악용 당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것이 언제 해방되는가 바로 성도들이 영화를 입는 그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아들들(성도)의 영화를 끙끙 앓으면서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의 해방도 인류 영화와 그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Ⅲ.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위함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가 무엇인가
바로 ‘성도들의 영화’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에서 해방되고, 사망에서 해방되어 최후의 부활의 영광을 입는 완전 무죄 상태의 영화로운 몸과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마지막 때의 사건입니다.
사도는 로마서 8장 22절에서 다시 이 부분의 중대한 내용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결코 이러한 탄식의 학수고대는 ‘전 피조물의 공통된 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탄식하고...함께 고통 한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피조세계의 탄식 소리와 그 내용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피조세계의 신음 소리를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연관이며, 우주관인가
보통 자연인들은 존재하는 피조 세계를 ① 아주 아름다운 것으로 ② 아주 조화적인 세계로 ③ 아주 충만하고 완전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자연을 예찬하고, 동경하고, 찬양합니다. 심지어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라! 고 까지 합니다. 이러한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에 비하여, 인생의 무질서와 부조화와 부정을 탄식합니다. 자연의 영구성을 예찬한 나머지 인생의 무상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피조 세계의 외면적인 면만을 쳐다본 결과입니다.
영감의 사람 바울은 지금 피조물의 이면적인 꿈을 세계와, 그 내막의 소리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지금까지 다른 인생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음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인생들이 발견하지 못한 피조 세계의 심각하고, 비참한 신음을 보고들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또 다른 면의 위대한 자연 과학자요 시인이요, 물리학자요, 예술인이요, 천문학자입니다. 결코 우주는 아름다움의 세계만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질서와 조화만의 세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보이는 우주 만물의 미와 조화와 질서 속에는 ‘성도들의 영화로운 구원 완성’을 대망하는 신음 소리들로 가득차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백합화 숲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적자생존의 약육강식의 투쟁을 실로 살벌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생존 경쟁 정도가 아니고, 다른 생명을 끊어도 좋다는 잔학(殘虐)의 세계입니다.
족제비가 닭을 습격하는 양태는 닭의 생명을 끊어야만 만족합니다. 고양이가 쥐를 죽이는 장면이나, 뱀이 개구리를 삼키려고 온 몸을 도사리고 있는 자태는 실로 무섭기만 합니다.
보통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단순히 자연 생명계에 이루어지는 생존 경쟁의 자연적인 수단으로 봄에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인간이 죄로 타락하여 저주를 받은 결과에서 온 피조 세계의 저주인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한 포기의 꽃과 풀잎을 보고, 아름답다는 감탄과 애모의 정만은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 이면에는 미가 아니라 추함이 있다. 조화가 아닌 혼란이 있습니다. 평화가 아닌 전쟁이 있습니다. 기쁨이 아닌 탄식과 신음이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신음의 세계를 시인이, 문인이, 그리고 화가가, 음악가 예술가들이 알 수 있다면 저들의 마음은 공포에 떨고, 붓끝은 멈추어지고, 폭발하는 찬사의 노래는 끊어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뱀은 개구리를 삼키려 하고 개구리는 또 다른 벌레를 먹으려 하고, 또 다른 벌레를 저보다 더 약한 벌레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 뱀 위에는 뱀을 노리는 독수리가 있고, 그 독수리 위에는 독수리를 노리는 또 다른 짐승이 있는 것입니다.
꾀꼬리와 소리는 실로 아름답고 감미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뱀은 그 꾀꼬리의 둥지에 침입하여 그 알을 삼키려 하고, 매는 그 어미와 새끼를 함께 엿보아, 둥지 안의 단란을 깨뜨려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부엉이의 음험함, 두견새의 교활함은 조류 세계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꽃피는 봄동산, 우거진 여름의 살찐 숲, 열매 맺는 가을의 황금 들판도 결코 에덴은 아닌 것입니다.
물 속도 예외일 수도 없습니다. 연못에 몇 마리의 뱀장어가 있으면 다른 어류들 복부에 구멍을 뚫어 피를 빨아먹습니다. 정어리, 참치 등은 고래의 먹이가 되어 버리는가 하면, 또 그것을 잡아먹는 고기가 있어, 어류들의 세계도 살벌합니다.
하얀 벚꽃은 아름답고 화사합니다. 그러나 그 푸른 잎을 갉아먹는 벌레는 보기조차 싫은 것입니다. 솔잎을 뜯어먹어 버려 푸른 산을 망치는 송충이는 보기조차 싫고, 벼 잎을 갉아먹어 농사를 망치는 해충들은 무섭기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타락한 인간들이 얼마나 자연계를 악용하고 남용하고 있는가 창조 본연의 의미와 목적과 질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만을 위하여 쓰고, 사탄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우주 만물을 볼 때 저들은 신음을 토하면서 하는 말이 ‘나는 통탄한다, 나는 고민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여! 어서 구원을 얻어 너와 함께 나를 구원하라. 이 죽음의 종노릇 상태에서 견딜 수 없노라!’고 탄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영화로운 구원을 대망 하면서 만물은 끙끙 앓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① 성도는 재창조(거듭남)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영의 눈과 영의 생각, 영의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바른 창조관, 우주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 자신을 바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후사로 영화로운 미래의 자신을 내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③ 따라서 만물의 존재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바로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우주의 대질서를 바로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3:21-23). 이것은 오직 구원 계시인 성경에서만이 얻는 지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망! 피조물의 대망! 그 정도는 탄식, 곧 신음, 끙끙 앓는 정도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영화를 학수고대하는 대망이요, 신음입니다.
그렇다면 중대하고 중대한 진리를 붙잡게 됩니다. 인생의 구원이 없이는 만물의 회복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해방이 없이는 만물의 해방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기 전에는 만물의 참된 아름다움과 가치도 회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에는 만뮬과 만물, 만물과 인생, 인생과 만물의 관계도 정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성도들의 구원과 영화는 중대합니다.
피조물의 대망!
그것은 성도들의 영화입니다.
그 대망의 정도는 탄식입니다. 신음입니다. 끙끙 앓고 있는 극한의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절망의 신음이 아니라 소망의 신음입니다.
현재의 신음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 신음입니다. 증거의 신음이요, 창조적 신음입니다. 보다 나은 미와 조회와 보다 나은 질서의 새 세계를 추구하는 생산적 신음입니다.
그것은 저들이 탄식하는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화로 가는 길’을 대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구원 완성과 함께 창세기에 나타난 땅에 대한 저주는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창3:17-19). 성도가 영화 되는 그 때는 모든 피조 세계도 새롭게 되어 새 하늘 새 땅이 되고 말 것입니다(계21:-22:).
바로 그 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의 목적도 완전히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새 하늘, 새 땅에, 새 사람들이. 새 왕을 섬기는 새 세계의 도래! 이것이 피조물의 대망이요, 탄식의 주제입니다. 할렐루야!
-다음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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