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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들의 탄식 (롬 08: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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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현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창조된 피조세계의 이면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엄청난 만물의 탄식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피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자유와 영광의 상태가 오기를 대망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범죄 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범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땅은 너로(인간)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창3:17)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타락과 범죄와 저주로 인해 함께 저주받은 운명에 처한 자연은 인간에게 있는 죄의 지배가 끝나고, 사망과 썩어짐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날이 임하는 때를 끙끙 앓으면서(탄식) 대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조세계의 탄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영감의 사도 바울은 또 다른 대망의 탄식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성도들의 대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탄식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I. 성도들이 누구인가

8장 23절 중에 성령의 처음 익은 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번역함이 좋을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첫 열매’라고 비유했습니다. 이유는 예수 부활 후에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첫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영’(요15:26)이요, ‘성자 예수님의 영’(요16:7)을 가리킵니다.
왜 성도들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였을까
① 이는 오순절 이후 그를 따르던 사도들과 신자들이 우선적으로 받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② 처음 열매를 시작해서 계속해서 열매를 맺게 되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 끝까지 계속적인 구원의 열매가 맺힐 사실을 뜻하고 있습니다.
③ 구원의 은사를 받지 못한 불신자와 대조시켜서 하는 말도 됩니다. 성령의 은총을 받지 못한 불신자들은 ‘성령의 처음 열매’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처음으로 받은 자만이 믿음과 회개와 구원의 역사와 성화의 열매(선행)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성령의 선물’과 상관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II. 대망의 요지가 무엇인가

1. 양자된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대망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3절 중에 성령의 처음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입니다. 이미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이미 신분상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된 자들입니다(롬8:15).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관 세계인 영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객관 세계인 우리 육신의 몸은 구원의 지배 아래 있으나, 아직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입지 못한 종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 육신의 몸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성질의 것이고, 또 이미 죽은 자들은 무덤에서 잠자고 있어, 부활의 영화를 입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몸은 아직까지 타락과 부패와 오염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온갖 연약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들 앞에 감싸여 있습니다. 온갖 교만과 불평과, 시기, 질투, 분냄, 욕심, 의심, 불순종 등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법적으로 양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 양자가 누릴 영광은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재림과 함께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성도는 한 자아 안에 두 형태의 상반된 요소가 대결하고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법을, 육신은 죄의 법을 따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세력이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갈5:16-17).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탄식하였습니다(롬7:21-25).
그 대망의 내용은 ① 구원함을 받은 영도 자유하고 ② 몸도 죄와 사망의 영향에서 부활의 몸으로 자유하고 ③ 하나님의 양자된 영광을 완전히 실현하는 세계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그것은 미래적 소망의 대망입니다.
로마서 8장 25절에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망의 탄식은 몸의 탄식입니다. 몸의 구원입니다. 몸의 영화입니다. 이것은 결코 벗고자 함이 아니고, 더 좋은 것은 덧입고자 하는 미래적 소망의 탄식입니다(고후5:4).
이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을 덧입고자 하는 대망입니다. 이 없어질 것이 없어지지 아니할 것을 대망 하는 것입니다. 이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영원을 덧입고자 하는 대망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덧입고자 하는 대망입니다.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으로 덧입고자 하는 대망입니다. 이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을 덧입고자 하는 대망입니다. 이 유한한 것이 무한에 이르는 영원을 덧입고자 하는 대망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이, 하늘에 있는 장막을 덧입고자 하는 대망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에로 이르고자 하는 미래적 대망의 탄식입니다(고후4:16-5:10).
그래서 우리 생의 선험자 욥도 고백하기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 하구나(욥19:25-27)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썩을 육체의 가죽을 벗은 이후 썩지 아니할 영원의 미래 앞에 저렇게도() 대망의 삶을 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습니다(롬8:24). 이 말은 소망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는 대망의 탄식은 오늘에서 내일을 바라보는 미래적 소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의 영화’입니다. 이 몸의 영화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11:1).

3. 그것은 인내의 대망입니다.
로마서 8장 25절에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대망은 ‘영화로운 몸’, ‘부활의 영체’, ‘불사의 영생체’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엄청난 미래의 꿈입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의 부활도 입증이 되고, 그가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약속으로 우리는 이것을 보증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확실하고 든든합니다. 존재하는 천지와 세계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이 생명의 약속만은 없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존재하는 천지와 세계는 이 약속 성취를 함께 대망 하면서 끙끙 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장차 이루어질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살아갑니다. 우리 ‘몸의 구속’이란 ‘영화의 몸’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몸의 구속’을 기다리지 않음은 죄가 됩니다. 그 이유는 ① 그것을 기다리지 않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영생의 욕구를 틀어막는 죄가 됩니다. ② 내세를 불신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세는 천국인데 바로 주님이 가신 곳이요, 계신 곳이요, 예수님의 영원한 통치 영역입니다. 완전한 무죄 세계의 영화로움으로 가득찬 곳입니다.
③ 예수님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불신앙하는 죄가 됩니다. 그는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우리에게 이 소망을 약속하였습니다(요14:1-3).
④ 그것은 또한 인내하라 참음으로 기다리라(롬8:25)하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지 못함은 사실상 ‘확실한 몸의 구속’을 불신앙하는 절망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 막연한 것이나, 공상적인 것이나, 허무한 것이 아니고, 확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고,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미래를 대망하는 자가 현재의 고난에서 장차 올 영광을 내다보고 인내하는 승리의 삶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것입니다.

III. 몸의 구속을 대망하는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① 성도들이 받은 ‘몸의 구속’ 곧 영광의 몸은 전 우주(피조세계)가 학수고대하는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전 우주적 대망의 주제입니다.
②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령을 하나님의 첫 선물로 받은 성도들’만이 받는 특별한 영화입니다. 바로 기업의 후사들이 누릴 영광인 것입니다.
③ 그것은 영원한 것 곧 영생입니다.
몸의 구속! 몸의 영화! 몸의 부활! 영화로운 영체!, 영생의 몸! 이것을 믿음으로 받고, 믿음으로 즐기고, 믿음으로 내다보는 땅위의 성도들은 결코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질병의 고통, 연약의 고통, 사별의 슬픔들 중에서도 최후 부활의 몸을 내다보고 끙끙 앓으면서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영화의 소망을 품고 신음을 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화로 가는 길은 전 피조세계가 움직이고 있는 목적적 향방입니다. 아니 그것은 존재하는 역사의 목적적 향방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만물의 존재는 그리스도인을 위해 있고, 성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인류의 회복이 없이는 만물의 회복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도(피조물), 성도들도 함께 영화로 가는 길에서 함께 탄식(신음)을 토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을 대망합니다. 그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8:18)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와 함께 이루어질’ 것이 라고 하였습니다(8:21).
성도들의 몸의 구속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고대 곧 대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망(고대)이란 이 단어는 머리를 쑥 내밀고 열심히 영광스러운 새벽의 첫번 징조를 찾으려고 멀리 수평선을 내다보는 사람의 심정과 태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도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갖고 있는 연약입니다. 그럼에도 몸의 완전한 구속을 바라보는 엄청난 비밀의 열망과 대망을 갖고 있는 소망의 존재들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결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삶이란 지치고 패배 당한 기다림일 수 없습니다.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생명의 인자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 삶은 약동하고 있는 대망의 걸음입니다. 내적으로 자신의 연약과 싸우고, 밖으로 사망과 썩어짐의 세계에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미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자리를 잡고 사는 것입니다(롬8:1).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 세상만을 쳐다보고 살 수는 없는 자들입니다. 죽음의 독기를 띠고 있는 이 세상 배후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축복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 장차의 영광! 이것은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몸의 구속, 부활의 몸, 영생의 몸, 영화의 몸을 대망하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바로 대망의 삶입니다. 대망의 맥박은 탄식(신음) 곧 끙끙 앓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탄식이란 바로 대망의 맥박이 아닌가 이 탄식이란 맥박이 뛰고 있는 자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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