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 별을 보고 온 사람들 (마 02:1-21)

첨부 1


성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입니다. 우리는 성탄을 단순히 예물교환 하거나 혹은 구제하는 날로 생각을 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주 작은 관습에 불과합니다. 성탄의 중심되는 뜻과 그 근본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신 날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성탄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이천 년 전 바로 그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주님의 오심이 어떠하였는가, 또 그 증거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굳이 이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하려 하는가를 깊이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나심을 '나심'이라고만 말씀하지 않고 '오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 가운데에 오셔서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나 한 성자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원한 사건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며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높은 보좌에 계시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기를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어떤 교리를 말하거나, 어떤 깨달음을 전하거나, 어떤 진리나 어떤 철학을 운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한 사건으로 역사 속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 우리의 처지, 이 죄인된 모습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성탄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상하게도 죄인된 사람들은 의인을 향하여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실패한 사람을 만나서 위로해주고 싶어도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병든 사람은 건강한 사람의 위로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죄인은 죄인을 반가워합니다. 혹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실 때에 부득이한 일로 그만 예배시간에 늦은 일이 있습니까 한 5분 늦게 교회에 들어섰습니다. 다들 제시간에 왔는데 나만 뒤늦게 와서 앉으려니까 좀 쑥스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죄송스럽고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있는데 나보다 더 늦은 사람이 들어오면 참 반가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 분이 장로님이면 더 반갑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이 아주 고약합니다. 때때로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혹 부부간에 언성이 높아지거나 분위기가 좋지 않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죄인은 죄인의 위치에서 위로해야 되는데 의인의 위치에서 죄인에게 충고하다보니까 부딪치는 것입니다. 절대로 죄인은 의인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원리는 하늘에까지 도달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별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저 죄인을 만나고 저 죄인을 구원함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도 죄인의 위치로 내려가시지 않으시고는 불가능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인격 세계에 있어서 우주적인 원리가 됩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십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는 자 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고난을 당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 현장에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건 자체가 바로 사랑이요 구원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성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오늘의 본문말씀을 살펴보면, 몇 가지로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하필이면 왜 동방박사들입니까 이것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우주적 사건임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유대나라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유대민족에게 정치적 회복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오신 정치 지도자가 아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우주적이요 세계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머나먼 나라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경배합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마스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정치, 인종, 문화, 제도……모든 문제들을 다 초월한 높디높은 왕으로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말씀해줍니다. 오늘의 성경은 이 점을 아주 명백하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에 우주의 별들까지도 동원되고 있습니다. 지구촌 어느 구석에 있었던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우주적인 사건이요 온 우주를 향한 구원의 역사로 있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편협한 생각--자기 우월감이라든가 귀족연(貴族然)한 자세라든가 혹은 조그마한 고집이라도 다 버리고 우리의 생각이 높고 높은 뜻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 성탄의 의미를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크리스마스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바로 그 때부터 고난이 있고 핍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사랑에 관한 사건이 핍박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선한 일은 반드시 이렇게 고난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 아름다운 일은 언제나 환영받아야 마땅하고 항상 존경과 칭찬을 받아야 마땅할 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주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오시는 벽두(劈頭)부터 핍박이 있었습니다. 박해가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나시자마자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벌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랑에는 핍박이 따른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보니, 헤롯왕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면 자기 보좌가 흔들린다고 생각하고 왕위를 내놓고 싶지 않아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동방박사가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고 묻자 헤롯왕은 수소문한 끝에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아주 간사하게도 "가서 그를 만나거든 나에게 와서 얘기하여 주십시오"하고 부탁합니다. 자기도 경배하러 가는 척하고 그실 예수를 죽일 속셈입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듣자마자 먼저 죽일 생각부터 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제사장과 서기장과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세속적 욕망과 세속적 신분과 지위를 내놓고 싶지 않아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기와 질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시기와 질투에 대해서 '그게 무슨 죄가 될만한 것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는 에덴동산 때부터 시작하여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이 범하는 죄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시기 질투를 깨끗이 없애버릴 수만 있다면 비로소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깊이깊이 뿌리박힌 이러한 시기 질투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게 하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했던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는, 읽어볼 때마다 유감스러운 부분이 한군데 있습니다. 유대나라 왕이 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지라"--당연히 예루살렘이 떠들썩할만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이어서 이렇게 써넣고 싶은 심정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경배하니라.' 왜 이 말이 없습니까 단지 떠들기만 했을 뿐이지 다른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요란하게 떠들기만 했지 실속이 없습니다. 후속 결과가 없습니다. 행동이 없고 열매가 없습니다. 여기에 유감이 있습니다. 성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있고 네온사인도 있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실천하는 행동이 없습니다. 여기 예루살렘 주민들도 왕이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동은 했으나 결과는 nothing--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바로 동방박사들입니다. '박사'를 헬라어로는 '마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헬라어는 '마기'의 복수형인 '마고이'가 됩니다. 물론 그 당시에 박사학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신분을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우리말 성경에서는 '박사'라고 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wise man--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일컫는 이 사람들은 옛날 동방의 페르시아나 바벨론의 사람들로서 왕의 고문관이요, 철학자들입니다. 천문학을 전공한, 특별히 하늘을 쳐다보면서 점성술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다시말 해서 그들은 훌륭한 학자들이요, 지혜로운 사람들이요, 지체가 높은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이기에 땅의 문제가 땅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높이높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모든 땅의 문제가 하늘에서 해결된다고 하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결국 저들은 하늘에서 계시를 받게 됩니다.
미국에서 화성을 향하여 쏘아올린 인공인성을 설계한 네 사람 중의 한 사람과 제가 얼마동안 사귄 일이 있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천문학자인 그를 통해서 천문학에 대한 상식을 많이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했던 말 중에 두고두고 제 기억에 남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습니다"--하늘의 세계를 쳐다보고 그 무궁무진한 신비를 깨닫는 사람치고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땅의 일, 작은 일, 그저 나 자신만을 위한 일, 세속적인 일--여기에 붙들리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생각을 높이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우주의 저 신비한 세계를 바라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신비에 심취되어 있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별을 보는 영감을 얻게 됩니다. 이를 두고 후세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표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러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분명히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있을 때, 바벨론과 페르시아 근방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조로아스터'라고 하는 종교도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동방박사들은 구약을 알고 있었고, 구약에서 말씀하는 '메시야가 오리라'하는 메시야니즘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늘을 쳐다보며 느낀 신비와, 이 신비에 도취된 경건과, 여기에 메시야 사상이 합쳐지면서 예수님의 별을 식별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 보는대로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동방박사들의 행렬을 아주 조촐하게 생각합니다. 흔히들 예수님께 경배한 동방박사는 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서 주일학교 다닐 때부터 '동방박사 세 사람은……' 이라고 들어왔고 또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낙타를 타고 가는 동방박사 세 사람을 그렸습니다. 그저 세 사람이 조용한 밤길을 끄덕끄덕 졸면서 갔나보다 하고 어렴풋이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연구해도 이천 년 전 그 때의 문화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그 행렬은 적어도 칠십 명 이상입니다. 광야를 건너는 그 힘든 여행에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결코 한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더구나 낮에는 자고 밤에만 걸어야 합니다. 별을 따라가야 하니까 밤에 행진을 할 수밖에요. 아주 위험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적어도 칠십 명 이상의 큰 대열을 이루고 준비도 단단히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별을 따라 별을 따라 유대 땅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별을 따라왔으면 끝까지 별만 보고 갈 것이지 중도에 하필이면 예루살렘에는 왜 들렀을까요 거기에 자극을 받아 헤롯왕이 증오심을 가지게 되고 예루살렘 전체가 소동하게 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문은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아마 여기에 하나 덧붙였더라면 '기뻐하고 후회하더라'라고 말씀하였을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예루살렘에는 가지 않았을 것을……'이라고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별만 보고 끝까지 따라갔으면 곧장 예수님께 갈 수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에 들러야 했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외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동방박사들은 다시 별의 인도함을 받아 베들레헴으로 가서 드디어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대했던 대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준비한 예물을 드립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상징적이자 또한 예표적인 말씀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금은 왕에게 드리는 예물입니다. 그래서인지 옛날 왕궁은 전부 금으로 입혔습니다. 지금도 모스크바나 혹은 로마, 파리 등 어디를 가나 옛날 왕궁들을 보면 모두 금으로 죽 입혀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왕들은 금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왕에게 바치는 것이 금이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금을 바쳤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바로 왕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당신은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또 유향을 바쳤습니다. 이것은 제사드릴 때에 쓰이는 재료입니다. 제사장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여 주시는 제사장입니다'라는 고백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몰약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산 사람에게는 필요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 죽은 사람의 시체에 바르는 것이 몰약입니다. 언젠가 삼천 년된 미이라를 개봉한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몰약을 바르고 그 위를 천으로 입히고, 또 몰약을 바르고 천으로 입히고 해서 시체를 사람모양 그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삼천 년이나 지났는데도 썩지 않았습디다.
몰약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몰약은 죽은 자, 곧 시체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께 몰약을 바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당신은 우리 만백성을 위하여 죽으실 것입니다'라는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그 의미를 진정으로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귀한 예물을 바치고 경배한 뒤에 동방박사들은 꿈의 지시하심을 따라 다른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헤롯왕과의 약속을 어기고 다른 길로 간 것입니다.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내심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림길에 섰을 것입니다. 헤롯왕의 영역에 와서 헤롯왕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꿈의 지시를 따르기로 합니다. 왕의 지시를 거역합니다. 마침내 저들은 무사히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만, 이 사실을 알고 속은 줄을 깨달은 헤롯왕은 대노하여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모조리 죽입니다. 성경에 몇 명을 죽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저 베들레헴과 그 지경(地境) 안에 있는 사내아이들을 죽였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한 번 죽이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헤롯왕은 다시 베들레헴을 뒤져서 살아남은 아이들을 또 죽였다고 합니다. '빠져나간 놈들이 있을지 몰라'하는 생각 때문에 거듭거듭 죽였다고 합니다. 열두 번에 걸친 그같은 학살로 베들레헴의 수많은 아이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헤롯왕은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요셉에게 현몽한 주님의 사자로 해서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의 문제를 그 당시로 돌아가서 근본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엄청난 우주적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경배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귀한 예물을 드리면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경배를 드렸습니다. 경배란, 성경 원문 그대로 볼 것 같으면 발에 입을 맞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하고, 그를 높이고 나는 낮추고, 그를 찬양하고, 나는 그에게 헌신하고, 그에게 생명을 바쳐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고의 사랑이며 최고의 경의를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주님께 경배 드립시다. 온전한 경배를 드립시다. 이로 인하여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가 여러분께 임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