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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청백 (눅 1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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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세 가지 상황 안에 살고 있다고 봅니다.
먼저는 자기라는 상황이 있습니다.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곧 이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객관화할 줄 아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주체도 되고 객체도 됩니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자기가 자기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진실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이웃 혹은 사물과의 관계입니다. 이웃이라는 상황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이야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떤 인간으로 평하는가, 내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전혀 생각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는 나에 대하여 지나친 신경을 써서 마침내 자기 자신의 충실을 잃어버리면 이 사람은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남이 날더러 무어라 하든 말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그만이다라는 식으로 산다면 이 사람은 마침내 매인 고집불통의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두 상황의식의 균형을 잘 이룬 사람을 우리는 인격자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또 하나의 상황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지금도 하나님께서 나를 보살피시고 있다는 신임재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민감하게 의식하는 사람이 곧 종교인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힘있게 행동할 수 있는 시기는 이 상황의식에서 일치를 볼 수 있을 때입니다. 자기 자신도 자기를 옳다고 확실하게 인정을 해주고 이웃들도 자기를 성원한다고 믿어질 때, 이 때가 가장 강하게 설 수 있는 때이며, 이와는 정반대로 이 세 가지 상황의식이 다 나를 정죄할 때 나는 가장 비겁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편 이 상황의식이 분열에 이르려면은 고민하게 되고 주저하게 되며 나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 가지 상황에 끌려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엄격히 따져서 생각한다면 완전히 독립된 행위는 없는 것이며 완전 불가피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불가피성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문 말씀에는 초청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초대는 불가피하거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바리새교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였습니다. 바리새인중에도 두령 즉 지도급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예수님을 초대하여 잔치를 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고 있는 듯 합니다. 따라서 많은 지도급의 인사들을 함께 초대하였는데 이들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 상좌에 앉으려고 윗자리 다툼을 하며 신경전을 벌리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대접을 받으시는 자 임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한 자들을 청하지 말라"고. 이 말씀은 부한 자를 도무지 청하지 말라는데 뜻을 둔 말이 아니고 청하는 자의 마음에 청백함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 뜻이 있는 줄로 압니다.
대접하는 자의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며 추호라도 불순한 동기가 있다면 차라리 청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기본이 되는 깨끗한 마음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어떤 행위를 감행할 때 그의 마음가짐에서 몇 가지 형태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는 순전한 의무에 끌리는 마음입니다.
의무란 언제나 무거운 짐입니다. 과거 때문에 끌리는 의무와 미래 때문에 따라가야만 하는 의무가 있게 됩니다. 가령 이미 빚진 것 때문에 수고해야 하는 일은 과거에 매인 의무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일은 미래를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하는 큰 의무입니다
그런데 이 의무가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은 같은 일이라도 그것이 의무화 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불가피성이란 언제나 괴로운 것입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내가 스스로 자원해서 하는 거기에 기쁨도 행복도 있는 것인데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강한 의무감에 끌려서 일하게 된다면 그 일은 얼마나 피곤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어린애를 많이 낳은 부모가 이들은 왜 태어났는가고 생각하면 자식이 많은 것을 스스로 큰 과오처럼 생각하고 심지어는 운명이나 숙명처럼 생각하면서 낳았으니 어차피 의무적으로 키우고 가르쳐야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효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의무로 생각하며 의무로 강요한다면 이같이 비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느 불우한 가정에 있었던 일입니다. 말썽부리는 아들을 앞에 놓고 그의 아버지가 꾸중을 하시면서 말하기를 "자식된 도리에 마땅히 효도를 다해야 하지 않느냐 내가 너를 키우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했는지 아느냐"고 했더니 이에 대한 불효한 아들의 하는 말이 "누가 낳으라는 것 낳았습니까 자기 자식, 자기가 낳아서 키우느라 수고했는데 어쩌란 말입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의무화한다는 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자녀 교육이 의무화된다면 무거운 짐이며 효도를 의무로써 강요한다면 매우 슬픈 일입니다. 요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감사한 마음에서 자원해서 하는 그러한 효도가 되어야 그 속에 행복이 있고 기쁨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무가 지나쳐서 기계화되는 일도 있습니다. "습관화"란 또 하나의 비참한 비인간화 현상입니다. 반복되는 행동으로 인하여 의무에 끌려가면서 의식은 빠지고 빈 행위만 남은 기계인간의 행위는 아무 뜻도 없는 것입니다. 무의식 속에서 행하는 일은 결코 행위가 못됩니다. 현대는 기능적 인간 보다 더 기계에 가까운 전문화되고 자동화된 인간을 요구하고 있으나 이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인간은 사회라는 큰 기계의 부속이 아닌 것이며 또 될 수도 없습니다. 주고받는 일에는 마음이 따라가야 합니다. 종은 울려야 종입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닙니다. 주는 일이 있어서 주게 된다면 마음이 울리면서 주어야 하고 받는 일이 있어서 받을 때는 받는 자의 마음이 울리면서 받아야 그것이 참 인간의 행위입니다. 마음이 따라 움직이는 일이 곧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이 없고 또 의식마저 없는 일이라면 그 일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에서 마음에로 움직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중심적인 관심이 행위의 기본 자세가 되기도 합니다. 의로운가 불의한가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나에게 얼마나 이로운가를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을 봅니다. 즉 항상 보수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교인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초대하였는지 모르나, 예수님께서 뒤에 하신 말씀의 문맥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하며 무엇인가 바라는 마음에서 청하였던 것 같이 생각됩니다. 따라서 무엇인가 은근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초청이라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청할 때에 대신 청해 줄 것을 미리 생각하며 줄 때에는 다시 받을 것을 먼저 생각하는 불순한 마음가짐 말입니다. 결혼 청첩장을 받고서 그 옛날 내 딸 결혼식에 저 사람이 얼마 부조했던 가를 생각하든가 또 부조하는 사람이 다음 내 자식의 결혼식 때 받을 생각을 미리 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불미스러운 거래입니까 헌금을 하는 사람이 먼저 보상을 생각하며 선행을 하는 사람이 받을 칭찬을 먼저 생각한다면 이 일은 선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금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 구제할 때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랍비의 교훈에는 "주는 자는 누구에게 주는 것을 모르게 주며 받는 자는 누구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몰라야만 참된 선행이며 이를 하나님께서 보상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마음이나 이기심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실한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는 마음이 작용하기도 합니다. 허영과 허세를 의미합니다만 마음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만이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선행을 하나의 악세사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도덕적 향락주의를 즐기는 묘한 심리가 작용하여 제법 수고도 희생도 하는 것을 왕왕히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교인은 예수님 자신을 존경하여 대접할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체면과 위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작용하여 예수를 모시게 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나 쯤 되면, 지도급에 있는 바리새교인으로서 이 마을에 들어온 손님을 대접하지 않을수 없지 하고 생각하면서 자기 위신과 허세를 위하여 초대했고 또 "나는 이만한 사람이요"라는 뜻에서 많은 유지들을 한 자리에 청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의 교만과 허세가 이 일을 아니하면 안되는 것처럼 강요해서 부득불 그리스도를 초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외식이 예수님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외식에서 봉사도 하고 수고도 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교회봉사나 헌금도 때로는 얼마간의 희생도 이런 식으로 하게 됩니다. 이러한 위선을 예수께서는 크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어떤 날 중학생이 자기의 어머니로부터 주일 헌금 백원을 받아 가지고 교회에 갔습니다. 헌금대가 자기 앞에 왔을 때에 그의 손이 무의식중에 다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그의 용돈 500원 짜리를 꺼내어 바쳐 버렸습니다. 그리고서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400원을 달라고 졸랐습니다. 백원낼 것을 깜박 모르고 500원을 내었다고 말하면서 아쉬워 조릅니다. 이렇다면 이 학생이 헌금을 한 것입니까 형식적으로는 헌금했으나 그 마음은 이에서 멀리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수고가 수고이긴 하지만 그 근본 의도와 마음의 자세는 자신을 위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수고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이며 오히려 외식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무슨 마음으로 행하여야 합니까 본문에 주어진 청백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받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받은 마음, 벌써 받은 줄로 여기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주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과 감격한 마음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아무 보상도 바람도 없는 청백한 마음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이웃의 필요에 끌리는 마음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사랑만이 이유가 되고 그 사랑에 다른 이유란 달리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이웃의 필요에 끌리는 사랑하는 마음과 그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봉사해야 합니다. 저를 사랑하기에 주고, 저를 존경하기에 수고하며, 저에게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그에게 나를 바쳐서 희생도 하는 것입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나를 바치는 일처럼 귀중한 봉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이웃이 나를 요구한다고 느끼며 그에게 나를 줄 뜨거운 마음이 있을 때 참된 행복은 깃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 10:18). 십자가는 결코 불가피성이 아닙니다.
스스로 버리신 귀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의 필요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마음의 중심은 자기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중심에서 이웃을 위하는 마음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며 다시 그것이 구체화되면서 이웃을 위하는 수고와 희생과 봉사 속에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는 마음의 자세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 병든 자, 갚을 수 없는 자를 청하라. 나 자신의 정욕이 아성이 깨끗이 무너지고 청백한 마음에서 봉사하라. 추호의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기 충실과 진실에 행하라. 그리하면 하늘의 상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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