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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다 (고전 06: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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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던져진 생이다"라고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자유가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자유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참 행복을 누리는 자는 사람이 가진 이 자유의 뜻을 알고 자유의 한계를 지키며 향유하는 자입니다. 질적인 생의 가치를 향유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인간됨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은 피조물이다"라고 창세기 1장부터 성경 전체를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들은 창조주에 의해서만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소중하며 높은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문제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만큼 보존되어서 살아 움직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의 값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가 주신 하나님 형상의 본질을 지켜 나갈 때만 우리들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피조물의 한계 안에 제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피조물인 자신을 바로 자각하자는 말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창조자인 것처럼 착각하여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을 부립니다. 여기에 인간의 파멸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피조물의 특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자유를 누리도록 엄청난 특권을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위치의 존재임을 알아야합니다. 철학적 용어를 빌면「자기 정체감」(self-Identity)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정직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가 뭐라고 평가해도 나는「나」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유식하다고 평가해도 나는 나의 무식함을 알고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부지런하다고 평가해도 나는 나의 게으름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의 정체를 바로 알고 있으므로 높이 평가하지도 낮게 평가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자기 존재를 인정함에 정직해야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진실할 때만이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의 나됨에 대한 판단 기준을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첫째,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소유권, 자주권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을 살펴보면 과연 나의 노력, 나의 수고로 되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얼핏보기에는 나의 수고로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복을 받아야 가능하게 됩니다. 복이란 내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져야만 합니다. 복중에서 두 가지만 예를 들면, 우선 부모님을 만나는 복입니다. 세상의 어느 자식이 부모님을 골라서 원하는 부모 슬하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똑똑해도 별수 없이 낳아주는 대로밖에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복입니다. 둘째는 어느 시점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시간의 복입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대학에 가기가 어려운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두 개씩 들고 나갔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귀가할 정도로 책과 씨름해도 대학에 들어갈 확률은 아주 희박합니다. 적어도 30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학생들은 공부 노이로제에 걸러 조금만 건드려도 자살하겠다고 벼릅니다. 한마디로 때를 잘못 만난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 시기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도 절대로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요즘 남자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유가 없습니다. 구조적인 약속에 매여 실적 위주로 몰아가는 직장에서 꼼짝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혼자만 진실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구조적인 악이 몰아치는데 나 혼자서 진실을 논한다고 진실해집니까 생각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힘든 세상입니다. 최근에 미국에서는 가뭄이 심하여 그곳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50%가 감소될 위험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미국에서 흉년이 든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사람이 아무리 수고해도 근원적인 복이 내리지 않으면 만사가 헛일입니다. 씨를 뿌렸다고 열매가 내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내 몫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이 사상이 철저했습니다. 상투가 바로 여기서 생긴 부산물입니다. 한국을 다녀가는 외국인들을 보면 긴 담뱃대와 갓을 기념품으로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갓 속에 감추인 상투의 철학은 알지 못하지만 마냥 신기한 모양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몸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것으로 함부로 손대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 하나라도 마음대로 자르지 않아 머리가 길어지면 둘둘 말아서 올려놓은 것이 상투입니다. 심지어는 손톱까지도 마음대로 자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라는 가치관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나 자신이 목적일 수 없습니다. 로마서 14:7에 보면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자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모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입니다.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음식을 먹을 수는 있어도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물을 줄 수는 있어도 꽃을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소중한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본문은 우리 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영과 말씀에 응답하는, 즉 예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나의 기쁨이요, 나의 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그가 세운 목적만큼 그 가치를 누리게 됩니다. 만일 돈을 목적으로 세웠다면 돈만큼의 가치밖에 없고, 썩어질 육체의 향락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육적인 가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지위가 목적이었다면 그 무상한 지위만큼의 가치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그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살게 됩니다.
셋째, 본문은 우리 몸은 값을 주고 산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팔린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벌써 죄와 사망과 율법과 정욕과 방종의 노예로 버려진 진노의 자녀였는데 이제 값을 지불하고 구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구속함을 받았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지불되어진 몸입니다. 저는 장사에 대한 문외한입니다만 가끔 개업 예배에 가서는 교역자로서 한 마디 부탁을 합니다. 앞으로 이 집에서 물건을 팔 때에는 정당한 값을 받고, 절대로 깎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령 만 원짜리 물건을 팔천 원으로 깎아 주면 손님들이 당장은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돌아서고 나면 더 깎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미련과 함께 물건의 질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물건에 대해 기쁨이 없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불한 대가만큼 가치가 주어집니다. 많은 대가를 주고 산 물건은 귀하고 그만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많은 희생을 지불하고 얻은 것이 훨씬 더 귀하게 여겨집니다. 도박판에서 쉽게 번 돈은 방탕하게 쓰고, 땀흘려 번 돈은 함부로 쓰지 못합니다. 즉 값이 얼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지불한 대가만큼의 값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교훈 중, 특히 잊을 수 없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중학교 일학년 때의 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주무시는 바로 옆방에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제가 잠을 잤습니다.
어느 날 자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나 봅니다. 주무시던 아버님께서 벌떡 일어나시어 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로 한숨을 쉬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아무 일도 아니라고 여쭈었더니 정중하게 이르셨습니다. 부모 앞에서 한숨을 쉬는 것은 막중한 불효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쉽게 죽는다고 절망하며 한숨쉬는 것은 얼마나 큰 불효인지 모릅니다. 부모 앞에서는 앓아 눕는 것도 불효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님들이 염려되어 "무슨 일이냐"고 물으실 때 알 것 없다는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얼마나 많은 사랑과 걱정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한 마디로 소외시켜 불효할 수 있는 일입니까 어거스틴은 "위하여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자살하려던 한 청년은 죽으려는 그 순간에 오랫동안 잊었던 어머니의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타나 자살을 보류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도저히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의 머리 속에는 어떤 부모상이 새겨져 있는지 아십니까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괴로움과 "너는 필요 없다"고 짜증내는 어머니의 모습만 남아, 마지막으로 효도하는 마음으로 자살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이 아무래도 부모의 기대에 충족할 수 없는, 즉 사는 것이 부모들의 기쁨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은 무엇입니까 나는 너로 인하여 기쁘고, 너로 인하여 행복하고, 너로 인하여 감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면 됩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고 싶습니까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루에 세 번씩만 고백해 보십시오.
이런 고백 앞에 누가 절망하겠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마지막 한 사람마저 나로 인해 실망한다면 어떻게 더 살아갈 용기가 있겠습니까 지불한 대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살아 있을 이유가 충분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가 소유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분의 위치만큼 내게 가치가 주어졌습니다. 그가 나를 필요하다 하시니 나는 필요한 존재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필요하지 않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 필요하다면 나는 살아야 합니다. 호세아서 3장에 보면 호세아는 창녀인 고멜과 결혼하여 아이를 두 명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멜은 여전히 방탕하여 드디어 가출까지 하며 노예로 팔려갑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고멜을 다시 돈을 주고 사오라고 호세아에게 명하십니다. 그 당시 여자의 노예 값은 남자 노예의 절반인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아내를 돈을 지불하고 사서 다시 제자리에 앉혔습니다. 이제 고멜은 무슨 면목으로, 어떤 자격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바로 살아갈 용기가 없는 입장입니다. 이 때 호세아는 고멜에게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그리하리라"(호 3:3).-즉 "너는 나만 사랑하라. 나도 너만 사랑하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창녀 출신인 고멜이 아내와 어머니로서 자격이 있다 없다고 논할 것 없습니다. 남편인 호세아가 값을 지불하고 사랑하니 가치가 있고 필요한 존재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도 우리 값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 못났다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소중한 것입니다. 나는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 기분대로, 내 뜻대로 나를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내 몸도 내 시간도 내 생명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귀한 값으로 산 것이기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존재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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