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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넘어지게 하는 자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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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능력과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마다 권세 있는 말씀에 놀라곤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예수님은 다정다감하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 중에는 단호함이 있고 결단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을 향한 책망의 말씀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하시는가 하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 23:24)" 하기도 하십니다. 그 책망에는 일체의 상식이나 인간적인 타협이 없는 명쾌하고 직선적인 선언이 있을 뿐입니다. 그 말씀에는 은혜와 공의, 사랑과 진리의 선명한 분별이 있습니다. 혼미함이나 혼돈이 전혀 없는 그 분명한 말씀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진노 속에 오히려 사랑이 계시됩니다. 때로는 책망 속에 더욱 깊고 오묘한 진리와 자비가 깃들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더욱 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수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열두 제자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 지내면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더욱 예수님 가까이에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는 수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수제자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무서운 꾸지람을 내리십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여기서 잠깐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를 살펴보십시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수제자 베드로가 대표로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 것 같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예수님께서는 적이 흡족해서 칭찬하십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네가 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내가 누구인 것을 알게 하셔서 이 소중한 신앙고백을 네가 먼저 하게 되었으니 너는 참으로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중한 이름을 기념으로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베드로'는 헬라어로 '페트로스'입니다. 반석이라는 뜻의 '페트라'가 사람의 이름으로 변형된 것입니다. 바위, 반석--이 얼마나 엄청난 이름입니까 "너는 지금부터 베드로다. 이제 너는 반석이다. 그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천국 열쇠를 소유한다는 것-그 엄청난 특권을, 그 큰 영광을 주신다고 하니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벅차 올랐겠습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 감격의 순간도 잠시--기쁨이 한창 고조되어 있었을 베드로에게 날벼락 같은 책망이 떨어집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석이니 천국 열쇠니 하고 꿈같은 칭찬을 들었는데 '사단'이라니,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서양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는 데 쓰는 말이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누구나 다 하니까 너도 하여라"-다른 사람들이 다 죄지으니까 너도 죄지어라 하고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런 정도로야 뭐 어떠냐 대수롭잖은 일인데 뭘"작은 죄는 지어도 괜찮다는 유혹입니다. 셋째, "이번 한번만, 딱 한번만"-늘 짓는 죄가 아니니까, 꼭 한번뿐이니까, 하고 죄를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넷째, "아직 회개할 시간은 많다. 그러니 오늘까지만 죄짓고 내일부터 바로 살면 될 것 아닌가"이처럼 사단은 그럴듯한 말로 간사하게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한 것은 바로 간사한 사단에게 고용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무섭게 책망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신 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언제나 생각보다 말과 행동이 앞서고, 그래서 잘할 때보다 실수할 때가 더 많은 이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당신의 수제자로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심지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이 아닙니까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고개 들고나서지 못해서 물고기 잡던 옛 갈릴리 바닷가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얻지 못한 채 심신이 다 지쳐 있는 베드로를 몸소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당신께서 십자가 고난으로 구속하신 그 소중한 양떼를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더러 목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제나 그제나 시몬 베드로는 여전히 시몬 베드로입니다.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두고 어느 때는 네 이름을 반석이라 한다, 그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천국 열쇠를 주겠다 하시다가, 또 어느 때는 사단이라고 책망하시다가, 이제는 내 양을 먹여라, 네가 나를 위하여 순교해야 되겠다, 하십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똑같은 한 사람이 어느 때에는 베드로, 어느 때에는 사단, 또 어느 때에는 목자도 된다는 말입니까 어찌 이럴 수 있으며, 왜 이래야 하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떠한 수준에 이르면 '나는 이제부터 항상 이 수준에 있다' 하고 착각을 합니다. 한 여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같은 여자인데 어느 시간에는 천사 같고, 어느 시간에는 악마 같습니다. 악마 같은 여자가 따로 있고, 천사 같은 여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둔갑하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태어났을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얼마나 귀한 선물이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 자녀가 부모의 골칫거리요, 원수 같은 존재로 탈바꿈하기도 합니다. 사단 마귀가 따로 없습니다. 한때는 천사처럼 보이던 자식이 어느 때에는 악마로 보이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어느 때에는 돈이 복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주는 등 선한 일에 쓰일 때에 돈은 천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망하고, 돈 때문에 추한 다툼이 일어난다면 이 때의 돈은 악마입니다. 지위, 명예, 지식도 그렇습니다. 어느 때에는 그것 때문에 행복하고 자랑스럽지만, 어느 때에는 그것 때문에 영과 육을 다 망칩니다. 천사가 따로 없고, 마귀도 따로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한 몸으로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지마는 때에 따라서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약점을 우리는 스스로들 깊이 명심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로마제국 말기에 아주 대조적으로 유명한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와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립피나가 그들입니다.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13년 동안이나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회개시켜 성자로 탄생케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참회록」이라든가「신의 도성」과 같은 저서는 여러분도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는 초기 기독교 교회의 최대 사상가로, 우리 기독교의 체계는 그의 신학 사상에서 틀이 잡힙니다. 그는 모범적인 신학자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결코 그처럼 위대한 신학자, 그처럼 위대한 책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라고하면 으레 어머니 모니카도 함께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립피나 역시 아들을 무척 사랑하는 어머니였습니다.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아들을 하루빨리 황제로 세우기 위해 남편을 암살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드디어 아들을 황제위에 앉혔지만 그로 해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네로는 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맙니다. 아그립피나가 자식을 사랑한 결과는 폭군의 탄생이요 파멸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니카나 아그립피나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사랑한 모니카는 아들을 성자로 만들었고, 야심적으로 사랑한 아그립피나는 자식도 망치고 자신도 망했습니다. 같은 어머니이지만 한쪽은 천사요, 한쪽은 악마였다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같은 사람을 놓고 베드로라고도 하시고, 사단이라고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고 엄히 책망하십니다. 그러시더니 뒤에 가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위하여 많은 핍박을 받고 순교해야하겠느니라." 언뜻 보기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고, 이랬다 저랬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귀한 말씀들의 깊고 오묘한 뜻을 바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의 그릇입니다. 하나의 질그릇입니다. 고린도후서4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질그릇 속에 보배가 담겨 있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내용물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 누구 손에 쓰임 받고 있느냐, 누구한테 고용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는 첫째,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 나 살기 위해서 남 죽이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생각을 가진 이기주의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강도와 다름없습니다. 불한당입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 인류를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사는 박애주의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은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소경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습니다. 어차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소경한테 등불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마는 그 소경 생각에, 혹시 다른 사람이 나를 보지 못해서 내 이마를 부딪치면 어쩌나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등불을 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쯤 가다가 한사람과 딱 부딪혔습니다. 소경은 버럭 화를 냈습니다. "여보시오! 이 등불이 보이지 않소" 상대방이 어리둥절하여 되묻습니다. "등불이 어디 있소" "아 여기, 여기 있지 않소 당신도 장님이오" 소경이 등불 든 손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등불이 꺼져 있는 게 아닙니까 소경은 남을 위해 등불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했지만 등불은 이미 오래 전에 꺼져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 등불이 꺼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말입니다. 이래가지고 내가 누구를 돕겠다는 것입니까 내가 나를 구제하지 못하는 주제에 누구를 구제하겠다는 것입니까 내 등불이 꺼진 이상 나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존재입니다. 꺼진 등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누구를 돕느니 봉사하느니 해보았자 괴로움만 더해줄 뿐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 피곤하게 하고, 자신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흔히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면 자기가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겸손해지면 바보가 된 것 같고, 인내하면 남들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 같습니다. 내가 온유한 사람이 되면 아주 형편없는 무능력자가 되는 것 같고, 희생을 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처럼, 자기 존재가 없어지고 마는 것처럼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 없고, 참을 수 없고, 희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렇습니다.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확실히 온유할 수도, 낮출 수도, 참을 수도 없습니다. 그 믿음 없이는 희생할 수 없습니다.
억울해서 그리 못합니다. 분해서 그리 못합니다. 하나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새 싹이 나온다고 하는 믿음도 없이 어떻게 썩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 없이는 자기 부정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부정이 없었습니다. 자기 하나를 똑바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르다보니 결국은 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게 됩니다. 자기 부정을 못한 것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자기 부정 없이 살아갈 때에는 이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의 고용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그 해답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바로 여기에 베드로의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일을 생각하느라고 하나님의 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헤아리다보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유익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작은 일 헤아리는 동안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늘 앞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버렸습니다. 현재의 일을 생각하면서 장차 될 일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때 베드로가 하는 말 좀 들어보십시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얼마나 멍청한 소리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 지시겠다는 것을 말리는 행동은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까지 말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만인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만인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시려 한다는 엄청난 역사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그 부활의 영광을 말리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말만 귀에 들렸지 부활이라는 말은 듣지도 못했습니다.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들어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활의 뜻을 알았더라면 그가 어떻게 이와 같은 망언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를 만류한 것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부활을 만류했다는 사실은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없습니다. 자기 부정 없이 자기 정욕에 매여 있는 사람이 삼일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의 깊은 뜻을 알 리가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능력으로, 자신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마귀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의 주제는 '어떻게 하여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타락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귀가 제안했습니다. "모조리 잡아다가 목을 베어 죽입시다!" 그러자 의장 마귀가 반대했습니다. "순교는 교회의 씨가 되오.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오. 그러니 그건 안 되고, 누구 또 다른 의견 없소" 다른 마귀가 말했습니다. "잡아다 매질을 합시다" 의장 마귀는 또 반대를 합니다. "한 대 때리면 똑같은 사람이 열 사람쯤으로 늘어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오." "그렇다면 감옥에 처넣읍시다!감옥 안에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더 좋아라 할 텐데, 그거 되겠소" 좀처럼 그럴싸한 의견이 나오지 않자, 나이 많은 노련한 마귀 하나가 말했습니다. "인간들 스스로 죄를 짓게 합시다." 그제야 의장 마귀도 흡족해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오" 의장 마귀가 물었습니다. 늙은 마귀는 능청스럽게 대답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하면 기도하게 하고, 봉사하겠다면 봉사하게 하고, 사랑도, 희생도, 좋은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게 합시다. 그렇게 하되 한 가지 조건을 붙이는 것입니다. 오늘은 말고 내일부터 하자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귀들은 만장 일치로 회의를 끝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단은 선한 일 하지 말라고 막지 않습니다. 봉사한다는 사람 말리지 않습니다. 다 좋습니다. 다 하라고 그럽니다. 단, 오늘은 그만두고 내일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려고 해도조금 있다가 해라, 선한 일 하려고 해도 내일부터 해라, 돈 벌어서 해라, 쉬었다 해라하면서 자꾸자꾸 내일로 미룹니다. 그런데 이 '내일'이 죽을 때까지 내일이라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사단의 고등 술책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시니 베드로가 참견을 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주님의 인기가 그렇지 않고, 주님의 능력이 이렇게 훌륭한데, 왜 십자가를 지신다고 이러십니까 제가 아는 성경 상식으로도 그렇지 않습니다. 영광의 메시야, 권능의 메시야가 왜 불길하게 십자가를 생각하십니까 또 우리들의 충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대신 죽을지언정 주님을 돌아가시게 야 하겠습니까-베드로의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건방진 추측이요, 엉뚱한 동정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무시한 월권 행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차없이 베드로를 나무라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여러분, 목적도 방법도 그리스도의 것이어야 합니다. 생각도 느낌도 다 주의 것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 말씀대로, 베드로는 가족도 직업도 다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그렇습니다. 베드로는 고깃배도 친구도 다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못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칭찬하실 때에 자기 페이스를 잃었습니다.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자 또 한번 자기 페이스를 잃었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 경우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것은 격에 넘치는 칭찬을 받을 때와 감당할 수 없이 어려운 고통이 올 때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두 경우에 믿음의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본성이 그대로 튀어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를 호되게 책망하신 의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다시 베드로(반석)가 되어라. 베드로가 베드로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느니라" 하고 깨우쳐 주시자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다시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입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잃으면 찾으리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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