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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을 더하소서 (눅 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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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 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권을 빼앗긴 나라에 살면서 온갖 고통을 겪었습니다. 정치경제사회도덕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 걸쳐 일대 혼란기였습니다.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던 바로 그때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면에서도 불안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문제가 악의 끝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메시야 대망사상은 저들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속히 메시야가 왔으면' '하루속히 이 혼란스런 세상이 끝나고 천지개벽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았으면'-저들은 믿음만으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많은 이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이 바로 메시야다. 우리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틀림없다'하며 저들은 신앙을 한층더 확증해나갑니다. 그러나 여기에 시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이의가 없는데,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께서 나라의 주권을 회복해주시고 이 사회에 만연하여 있는 모든 부조리를 시급히 해결해주셨으면'하고 바랍니다. 또하나, 예수님의 메시야 왕국을 상상하면서 저마다 자신들의 입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의 왕이 되시면 나는 어떻게 될까, 우편에 앉아볼까 좌편에 앉아볼까'-예수님 덕분에 세상적인 영광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 그런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예수님께 대한 기대감은 더욱 팽배해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보고 듣고 배운 바가 많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은 꽤 진전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을 따르면서 저들이 무척 놀랐던 점은 다름아닌 이적(異蹟)입니다. 하나하나의 사건을 보면서 저들은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믿음에 놀랍니다. 예수님의 믿음, 아주 엄청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평화, 그 평화와 안정을 보면서 예수님의 믿음에 놀라게 됩니다. 오늘날의 심리학자 가운데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의 무능과 나약함과 불가능함은 대부분 이미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다시말하여 미리 결정되어버린 제한성 때문이다.' 미리 결정되어 버린 제한성(predetermined limitation)-여기에 매여 있기에 불안에 떨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 예정된 제한성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고 합니다. 내가 만들어놓은 감옥, 내가 만들어놓은 편견의 울타리에서 탈피할 때에 비로소 나는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믿음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위대한 믿음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풍랑을 명하여 잠잠하게 하십니다. '일어나라' '눈을 뜨라'환자들을 명하여 그들의 병을 고치십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방금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십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걷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 성(城) 과부의 독자를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사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관에 손을 얹으시더니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고 명하십니다. 죽어 상여에 실려나가던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됩니다. 그뿐입니까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이미 장례를 치렀고 썩은 냄새까지 나는 시체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놓게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큰소리로 부르십니다. 그러자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사로가 무덤에서 어정어정 걸어나오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놀라다못해 말문이 막힙니다. 그 초자연적인 역사, 그 이적 자체에 놀라고, 뒤이어 이적 자체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의 믿음에 놀랍니다.
저는 예수님의 믿음이 참으로 굉장하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많은 사람과 함께 무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소리치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경우, 만에 일이라도 나사로가 안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걱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과연 그러실 수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굉장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신 분 앞에 저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입니다. 그 믿음에 탄복하고 더욱 깊이 우러르게 됩니다.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능력을 믿고 계십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이 복음만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미 죽었던 사람이라 해도 이 말씀의 능력과 함께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능력을 철저하게 믿으셨고 기도의 응답을 믿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기도 드리면 언제든지 들어주신다'하는 사실을 믿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계셨습니다. 이 복잡한 현실의 와중에서 모든 사건들이 합동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계셨습니다.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두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랑을 믿고 계셨습니다. 특별히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 이 현실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 내 형통함만이 아니고 내 교훈만이 아니고 내 죽음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하게 믿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풍랑 속에서도 고물에 누워 평안히 주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배가 파손될 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벌벌 떠는 제자들을 보시고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6)" 하시며 바다를 잔잔케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안정과 평안이 있었습니다. 용기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이 속한 누가복음 17장 1절로 보면 내가 죄를 짓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좀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실족지 않게 할 수 있는 길은 믿음뿐이라고 합니다. 이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하셨는데, 이 용서할 수 있는 힘 또한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여기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절)"-예수님의 그 굳건한 믿음, 그러한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저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을 더하소서"-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일단 저들에게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고 판단하고 여기에 좀더 더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가진 믿음이 아직 불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있긴 하지만 시험을 당하면 그만 넘어지기 일쑤고 사건을 만나면 꼼짝못합니다. 이 점을 알고 좀더 큰 믿음을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믿음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위대한 믿음을 가져보려고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을 쳐본들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 노력, 내 의지로부터 자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믿을만하게 돌아가고 환경이 바뀐다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야 한다, 믿음은 예수님께로서 오는 선물이다 하는 데까지 깨닫게 됩니다. 이 귀중한 진리를 발견하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주여, 우리의 믿음을 더해주시옵소서-더해주기를(the more) 바란다고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있느냐 없느냐로 되묻고 계십니다. 양적인 믿음에 대한 질문에 질적인 믿음의 문제를 거론하십니다. 있느냐 없느냐, 어떤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많으나 적으냐, 더해야 하느냐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보다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하고 더 위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느냐-큰 믿음에 관심이 쏠려 있는 제자들에게 진실을 묻고 계십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하십니다. 겨자씨는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제일 작은 종자입니다. 티끌만큼이나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있느냐 없느냐, 비록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문제가 안 된다, 작아서가 아니라 없어서 문제가 아니냐 하십니다.
이것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작을지언정 그것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 있어야 합니다. 죽은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 살아 있는 생명력-이것을 묻고 계십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언제나 성장할 수 있습니다. 힘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동반합니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한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오면 얼었던 땅에서 다시 새싹이 돋아납니다. 작은 씨앗에서 여리디여린 싹이 터서 굳게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올라옵니다. 얼마나 엄청납니까 생명력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살았느냐 죽었느냐 곧 생명력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질적인 문제가 중요하지 분량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안됩니다. 생명은 필연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에 방해되는 모든 요소를 극복합니다. 힘을 나타냅니다. 이제 무슨 말을 더해야 합니까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참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어떤 믿음이 참 믿음인가, 어떤 믿음이 더 위대하게 되어 놀라운 결실을 가져오게 할 수 있는가를.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거창한 논리나 철학적 용어로 말씀하시지 않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아주 평범한, 매일처럼 경험하고 있는 생활 속의 소재를 비유로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제 겨자씨의 비유에 이어 노예에 대한 비유를 드십니다. 주인이 종보고 밭에 가서 일할 것을 명합니다. 종은 가서 일하고 저녁에 돌아옵니다. 그럴 때에 "너는 여기 앉아 쉬거라, 내가 저녁을 지으마"하고 종을 위하여 저녁을 짓는 주인은 없습니다. 오히려 "얼른 저녁을 지어라, 그리고 너는 내가 먹은 다음에 먹어라" 할 것입니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더욱이 종이 아무리 수고해도 그 수고를 위로해고 칭찬하는 주인이 있더냐, 어림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샛말로 하면 인권의 문제입니다. 아주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종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종으로서의 자아의식을 분명히 하라고 하십니다. 종에게는 내 것이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물질이 내 것입니까 자녀가 내 것입니까 건강이 내 것입니까 생명이 내 것입니까 우리는 큰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소유란 없는 것입니다. 생명조차 내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무엇이 내 것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재물, 시간, 지혜, 영예-그 어느 것도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다윗 왕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먼지만도 못한 무익한 존재이다, 쓸모 없는 종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마음으로부터 신앙이 움트게 됩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야 비로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전도해보셨으면 아마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내가 믿는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이 다 믿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마는, 주위 사람에게 한번 전도해보십시오. 선뜻 믿어줍디까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같이 저 잘난 줄 알고 있어서 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스스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종에게는 목적이 없습니다. 주인이 목적입니다. 주인을 위해 살뿐입니다.
나를 위해 살수도 죽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뿐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본디 그렇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이것이 종된 자의 좌표입니다. 철저하게 내가 없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생각에 매일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요즘 세대를 가리켜 불신풍조가 극에 달했다고들 말합니다. 서로 믿지를 못합니다. 마음놓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람을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모두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왜 젊은 층에 이런 유행어가 있지 않습니까 "잘났어 정말"-무슨 뜻입니까 바로 불신입니다. '넌 너대로 살아라' '어디 잘난 3척하며 살아봐라' '나는 아니다'-불신의 소치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은 환경과 조건 때문이 아닙니다. 내 교만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가정에서조차 신뢰가 없습니다. 이 또한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나만 생각합니다. 나 중심적입니다. 뿌리깊은 불신풍조가 이렇듯 나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기인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자기 신뢰요 자기 우상이요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착각으로 말미암습니다. 이래서 믿음이 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어린아이들은 부모님들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까 왜 사람을 신뢰하지 못합니까 교만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여기로부터 완전히 탈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종을 생각해보십시오. 종은 절대순종 합니다. 절대충성 합니다. 절대신뢰 합니다. 주인의 말에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절벽 위를 지나다가 그만 실족을 해서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떨어지던 중 다행히도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위에 대고 소리칩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지나던 사람이 내려다보니 참으로 큰일났습니다. 그를 보고 다시 소리칩니다. "나 좀 살려주십시오." "살려줄 테니 나를 믿으십시오." "믿겠습니다." 믿겠다고 거듭 소리칩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살려면 나뭇가지를 놓으십시오. 놓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놓지를 않습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놓아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밑이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위로 다시 올라올 수 있는 가망이 없기에 나뭇가지를 놓고 바다로 떨어져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놓지를 못합니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되묻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말씀대로 하면 어떻게 됩니까"-이래서 불행이 있습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합니다. 우리의 절대의무입니다. 또한 항상 나를 부정하는 겸허가 있어야 합니다. 마이어(Meyer)라고 하는 신학자는 '종이 자기 의무의 한계를 넘어설 때부터 비로소 유익한 종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그 다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다' '아무리 충성해도 모자라고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부족함투성이다'-이러한 자기 겸허, 자기 비하가 있고야 비로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절대신뢰 하게 되고 생명까지 위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믿습니다. 그런고로 내가 나를 믿습니다'-이것이 신앙 안에 있는 신뢰입니다. 업적주의는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했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손에 위탁할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강하게 지적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보상에 많은 신경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주례를 할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백 번 해도 괜찮지만 상대방에게 사랑하느냐고 묻지는 말라." 내가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얼마인가, 나는 이만큼 사랑하는데 상대방은 나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하는 데에 마음을 쓰고 저울질합니다. 그리고는 항상 자기가 손해보았다고 불평합니다.
장삿속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랑인들 제대로 하겠습니까 이렇듯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보상에 연연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이익도 생각지 않고 거저 주고 거저 내 할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연후의 말끝이 또한 '나는 부족합니다'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인 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삯을 누릴 것도 받을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역사를 내 교만의 계기로 삼을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 본분을 다할 뿐이요, 보상을 바라는 기대감을 완전히 내 마음속에서 지워버려야만 비로소 믿음이 있게 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모처럼 교회에 잘 나오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더니 시험을 당하여 그만 낙심하고 마는 사람을 봅니다. 참 유감스럽습니다. 그 시험의 종류가 많고 자기 딴에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목사의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 한가지입니다. 믿음의 걸림돌이 되고 시험에 들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를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육 개월이나 나갔는데 악수 청하는 사람 하나 없더라' '이름조차 불러주는 사람 하나 없더라' '목사님도, 당신 누군데 언제부터 나왔소 하더라.'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나를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조금이라도 선한 일을 하게 되면 미리부터 나발 불고 알아달라고 하는데, 다 알아줄 수가 없습니다. 결국에는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같이 내가 문제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한 믿음은 자라나지 않습니다. 아주 뚝 떼어버려야 합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떼어버리지 않고는 절대로 믿음이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가장 약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더욱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의지를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적 지식, 그것을 믿음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신앙은 의지나 지식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나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가-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반면 완전히 믿어지는 것처럼 큰 은사가 없습니다. 믿음의 은사는 굉장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면,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심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세상을 확장해나가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믿고 하나님 안에 있는 저를 믿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더하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대답을 다시 한번 새겨보십시오. 믿음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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