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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창 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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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의 악이 어디에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날로 극악해지고 있습니다. 그 악이 어디까지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불의(不義)합니다. 이 불의가 어디에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죄가 많습니다. 많고도 날로 지능적입니다. 극한을 치닫는 죄를 보고 우리는 소름이 끼칠 때가 많습니다. 죄가 어디에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이 세상의 죄와 불의와 악으로부터 피해자라고 생각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이렇게 생각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혹 억울하다는 생각도 해보셨습니까 나는 정말 억울하다, 너무나 억울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이렇게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정말로 나는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있다-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잠깐 생각을 멈추고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열 입곱 살 소년의 때에 형들의 손으로 팔립니다. 생각해보면 그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아버지 같은 나이의 형님들, 그 나이 많은 형님들이 막냇동생인 요셉을 해치려고 합니다. 물 없는 우물에다 던져 넣었습니다. 그랬다가 다시 꺼내어 돈 받고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이토록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형님들이 이러한 마음을 품은 것도 모르는 채 아버지 야곱은 멀리 나가서 양을 치고 있는 아들들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해서 요셉 편에 보냈었습니다. 보내는 아버지나 심부름을 가는 요셉의 마음은 깨끗했습니다. 요셉은 먼길을 우회해서 겨우겨우 형님들의 양치는 곳을 찾아가 문안을 합니다. 그런데 그 형들은 이 깨끗하고 티없는 동생 요셉을 그렇게 노예로 팔아먹은 것입니다. 저들은 노예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압니다. 한번 팔려 가면 일생동안 노예입니다.
거기서 벗어날 길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의 건강도 지능도 기술도 다 주인의 것입니다. 나중에 주인이 결혼을 시켜주어도 태어나는 자녀들까지 노예입니다. 자자손손 노예로 살아야 하는 그 길로 형들이 동생을 팔아먹었습니다. 세상에 이러한 악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런 짓을 자행하려고 하자 맏형 되는 르우벤이 간곡히 말렸던 것 같은데 워낙 극악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 이렇게 악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13년 뒤에 장면은 바뀝니다. 요셉은 대제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형님들은 온 천하가 흉년이 들었을 때에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가서 총리대신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요셉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형님들을 보면서 통곡을 합니다. 반갑기도 하고 분하기도 합니다. 지난 세월이 억울하기도 합니다. 생각하면 감사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의미의 눈물을 흘립니다. 성경에 보면 울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토록 악을 행한 그 형님들을 요셉은 용서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승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위대한 용서는 요셉의 덕이 아니요, 요셉의 높은 인격도 아니요, 요셉의 정치적 수완도 아닙니다, 오직 그의 믿음으로 형님들을 용서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의 신관(神觀), 요셉의 하나님 이해, 요셉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신앙고백으로 나타나고, 그 신앙고백과 함께 마침내 그 은혜 안에 있는 자신의 작은 모습, 은혜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형님들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오늘의 본문대로 간곡한 말로 위로까지 합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님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얼마나 은혜스럽고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말못할 그 많은 고통, 기나긴 13년 동안이나 억울하고 억울한 고통을 당해왔지만 그 가운데서 그는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수난 가운데서 놀라운 믿음, 고상한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믿음으로 형님들을 다 포용하게 됩니다.
45장과 50장에서 요셉이 형님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주고받는 말속에 요셉의 믿음이 구구절절이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합니다. 자신의 말로 하는 법이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형님들을 바라봅니다. 요셉의 위대함이 이에 있습니다. 그 옛날 모세는 바로 이러한 순간에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죽이겠다고 분노할 때에 모세도 같이 분노함으로 그들을 대합니다. 민수기 20장 10절에 보면 그가 분노하여 "패역한 너희여"하고 저주하고 맙니다. 그 순간, 모세는 하나님을 깜빡 잊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받은 바 은혜도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저주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세를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하고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중요한 시점에서 한시도 하나님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위로하고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 많은 환란 중에 얻은 하나님 이해는 이러합니다. 먼저는 섭리의 하나님임을 깨닫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애굽의 하나님이요 온 천하의 하나님이며, 평화로운 가운데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전쟁과 기근, 재난 속에도 살아계시고 온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아가 그 크신 섭리 안에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어서, 가든 오든 팔리든 팔아먹든, 그 모든 사건 위에 하나님의 초월한 섭리가 있음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러한 까닭에 그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형님들이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하고 궁색한 소리까지 꺼냅니다. 그러나 요셉은 조용히 말합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요, 억울한 자에게 보상하시는 것도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악한 자를 원망하지 맙시다.
악한 사람 망하라고 할 것도 없고, 악한 사람을 부러워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저주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모든 악은 하나님 자신이 심판하실 것이요, 어떤 억울함을 어느 구석에서 어느 은밀한 곳에서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보상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역사 하십니다. 상도 주시고, 벌도 주시고, 심판도 구원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뿐입니다. 한을 품을 필요도 없고 복수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향한 이 위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요셉은 형님들을 평화롭게 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는 사실상 노예입니다. 노예인 까닭에 자유가 없습니다. 그는 이방 땅 애굽에 와 있고, 보디발의 집에 갔습니다. 우상 섬기는 나라에 왔고, 우상 섬기는 집에서 함께 먹고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사람은 우상 섬기는 이방사람의 집에는 거하지 않습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이기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다. 이제 우상 섬기는 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우상이 있는 집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이방사람들과 함께 기거할 수밖에 없고 그들을 섬겨 일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탄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노예로서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로서 지킬 수 있는 의를 지켰습니다. 죄를 멀리했습니다. 거짓을 멀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을 바쳤습니다. 비록 이방사람의 집에서 노예로 살지만, 완전히 자유를 빼앗긴 가운데 살지만, 신앙적인 자유, 그 중심만은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진실하게 살아갔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주 영원히 숨겨질 수밖에 없는 그 조그마한 의를, 그 진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을 요셉은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구원론 중심의 역사 이해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요, 역사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만민을 구원하시는 바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도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역사의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45장 5절을 보십시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보내셨다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형님들이 동생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팔려왔습니다. 팔려와서 부자유한 노예의 신분에 살았었습니다마는 팔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팔려왔다는 의식(意識)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의식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팔려갔습니까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 있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믿지 않는 집안에 시집을 와 가지고……" 이렇게 한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집을 가면 남편도 예수 믿고 잘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결혼식만 해놓고는 어림도 없지요. 돈에 팔렸습니까 지위에 팔렸습니까 어찌어찌 그렇게 팔려서 쇠털 같은 나날을 썩고 있습니까 그래서 평생을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안 믿는 집에 내가 선교사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보냄 받았다는 것과 팔려갔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요셉은 분명히 형님들로 말미암아, 형님들의 악한 마음과 행동으로 인해서 팔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다'고요.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앞서 보내셨나이다' 역사에 대한 엄청난 이해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형님들을 용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그 놀랍고 신비한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분명히 말씀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그리하여 오늘과 같이 되었다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그 귀하신 능력에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능력을 체험하셨습니까
우리는 '625'라고 하는 엄청난 전쟁을 겪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많은 재산을 잃고, 많은 사람들이 헤어지고-엄청난 민족적 수난이었습니다마는 그러나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625를 통해서 엄청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올드 북(Old Book)」이라고 하는 백과사전을 보면 '코리아'라고 하는 항목의 설명이 세 페이지밖에 안됩니다. '한국전쟁' 이라는 항목은 네 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국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지금부터 40년 전의 한국은 조그마한 나라입니다. 잘 모르는 나라였지요. 그러나 한국전쟁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올림픽을 치르고 세계적인 위치에 올라갔습니다. 알고보면 '625'라고 하는 전쟁을 통해서 이런 일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역사를 이루고 오늘의 번영, 오늘의 이 큰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625가 아니었다면 우선 이 곽목사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전쟁 때문에 제가 이자리에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쟁으로 받은 피해도 많지마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깨달은 바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가늠도 하지 못합니다. 엄청난 교훈이 이 전쟁이라는 사건 속에 있습니다. 급회전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어놓습니다. 역사를 뒤집어놓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회전하게 될 때에는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어놓으십니다. 이 사실을 요셉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깊은 신앙 가운데 깊은 하나님의 이해에 대해서, 그는 새롭게 신앙을 고백하고 형님들을 용서하게 됩니다. 여러분, 용서란 이런 것입니다.
용서 아닌 것을 먼저 생각해보십시다. 첫째, 변명은 용서가 아닙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어디까지 잘못했고, 어디까지 잘했고, 누가 어찌됐고, 어쩌고, 말이 많은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는 더 물을 것도 없고 할 말도 없습니다. 둘째, 분쟁의 완화도 용서가 아닙니다. 여러분, 누구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해서 화해시켜본 일이 있습니까 저는 못해봤습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셋째, 받아들이는 것도 용서가 아닙니다. 꾹 참는 것이지요. 밉지마는, 한이 있고 원통함이 있지마는 참아야지 하면서 참는데, 잘 참다가 또 터지면 그 때에는 더 크게 터집니다. "내가 10년을 두고 참았는데" 이런 소리도 하지 않아야 참은 것입니다. 참은 것이 아니라 버틴 것이요 벼른 것이니 그런 소리가 나옵니다. 두고보자 이렇게 한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한과 원통함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 이런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넷째, 관대와 관용도 용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인격으로 저를 덮으려 하는 것입니다. 받는 쪽으로 볼 때에는 기분 나쁜 것입니다. 그리고 묵인도 용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진정한 용서는 어디에 있습니까 참된 용서란 부당한 일에 대한 사랑의 혁명입니다. 일은 분명히 부당한 일입니다. 더는 말할 필요도 없이 부당한 일입니다. 그 부당한 일에 대한 신앙적인 사랑의 혁명 그것이 용서입니다.
데이비드 옥스버거(David Augsburger) 의 명저「Freedom of Forgiveness」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용서해주는 사람은 엄청난 대가, 즉 자기가 이미 손해본 것 만큼의 댓가를 지불해야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계속적인 사건인 까닭에 동일한 댓가의 희생을 요구한다. 용서는 원상복귀가 아니라 그냥 놓아주는 것이고, 자유케 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본 손해, 내가 당한 피해 그대로를 댓가로 지불해야 합니다. 용서받는 자가 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하는 자가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댓가, 값을 지불하지 않는 용서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부당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은 지금 형님들 앞에 있습니다. 형님들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형님들을 다 끌어내다 목을 친다고 해도 나무랄 사람은 없습니다. 백번 천번 마땅한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이 모든 값을 요셉 자신이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이제 용서받았습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십니다. 하나님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용서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불하는 값이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셉은 이제 형님들을 앞에 하고 웁니다. 처음 만났을 때 울고, 베냐민을 만났을 때 울고, 재상봉 때 울고, 야곱을 만났을 때 울고, 야곱이 죽었을 때 울고, 형님들이 찾아왔을 때웁니다. 이렇게 무려 일곱 번이나 통곡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을 놓아 통곡합니다. 여러분, 그가 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 감격해서 울고, 옛날에 꾸었던 꿈이 오늘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여 울고, 심지어는 형님들이 서로 누가 잘못했느니 잘했느니 이제 와서 비탄하며 싸우지 말라고 당부하면서도 울고, 벌써 다 용서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들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받는 자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빠져 있음을 측은히 여기면서 웁니다. 이것이 눈물입니다. 미국에서는 살인사건의 60%가 분노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합니다. 오늘도 분과 한과 원통함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화해란 없습니다.
비처(H.W. Beecher) 라고 하는 설교자는 말합니다. "용서할 수는 있으나 잊을 수는 없다고 하는 말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과 같다." 종이를 찢어 불태워버리는 것처럼 형체도 없게 될 때에야 그것이 용서입니다. 용서 못한다고 하지마는 용서를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용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아니하고 있는 한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이것이 없이는 주님을 뵙지 못하고, 아무도 이 화해가 없이는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면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북한에 얼마 전에 현대건설에서 기계와 장비를 보냈는데 받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주고받기로 되어 있겠지마는 매스컴에서 지레 야단스럽게 떠들어대고 하는데야 어디 기분이 나빠서 받겠습니까 그래, 누군가가 말합디다. "북한을 도우려거든 성서적으로 하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들을 도와야 합니다. 돕되 저들의 기분을 감안하고 도와야 합니다. 다시 잘잘못을 논하지 맙시다. 우리가 처음 피난 나왔을 때나 전쟁이 있은 다음에 모두가 한이 있었습니다. 내가 고향만 돌아가 봐라-얼마나 원한이 있었습니까마는 이제 4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다 풀어야 합니다. 이제는 그날의 원수도 반갑게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맺힌 것이 없어야 합니다. 아직도 한이 있고 아직도 원통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휴전선을 절대로 무너뜨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화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될 때에, 요셉과 같이 될 때에라야 이룩됩니다. 화해의 역사는 그때에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참 승리는 용서에 있고, 사랑에만 있습니다. 우리는 뼈아픈 체험을 해왔습니다 마는 깨끗이 씻어 내버리고 우리가 받은 은혜로 저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증오와 모든 한이 다 사라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 앞에 통일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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