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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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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아흔이나 된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자녀 5남매가 늙으신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둘러앉아 있습니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맏딸을 부릅니다. 그 딸도 이미 환갑이 넘었습니다. 어머니는 특히 그 맏딸을 사랑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주 귀한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깁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 할머니는 공부를 많이 한 분이 아닙니다. 철학적 유언을 할 분은 더욱 아닙니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본 일 없이 평생을 소박하게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90평생을 살면서 체득한, 진주보다 더 귀한 말씀을 자녀들에게 남기고 갔습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더 많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악한 사람이 더 많을까요, 선한 사람이 더 많을까요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죄는 절망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심판을 부정하는 죄,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죄-참으로 무서운 불신앙의 죄요, 교만의 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를 부인하는 죄-절망의 죄입니다.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 많은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아무런 은혜도 받지 못했다고 부정해버리는 것은 무서운 죄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도둑질하는 것, 살인하는 것, 교만한 것만이 죄가 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한숨쉬는 것, 낙심하는 것, 눈물 흘리는 것, 신세타령 하는 것, 자포자기하는 것. 절망하는 것, 실의에 빠지는 것도 엄청난 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나이 많으신 부모님 앞에서 한숨을 쉬어보십시오. 무슨 큰일이라도 났는가 하여 상심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도 말며 한숨을 쉬어서도 안됩니다.
요즈음 우리는 새로운 말을 많이 접합니다. 총체적 위기니, 총체적 도덕성의 부재니 하는 말들이 그것입니다. 무엇이 전체적으로 망해간다는 것입니까 보편화(普遍化)는 무서운 죄입니다. 철학적으로 'generalization' 이라고 하는 보편화 시각과 판단의식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둡시다.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보고, 하나가 뜻대로 안 된다고 해서 과거의 은혜도 현재의 축복도 미래에 대한 소망도 다 포기하려 합니다. 남녀가 연애를 하다보면 간혹 상대방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해도 보고 마음의 상처도 입습니다. 언젠가 한 아가씨가 찾아와서 울며불며 이야기합디다. "세상 남자는 다 도둑놈이에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한마디했습니다. "아가씨는 도대체 남자를 몇이나 경험해 보았나요 어째서 세상 남자가 다 그렇다고 하지요 나도 남자인데…… 그렇게 도매금으로 매도하면 쓰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좀 보았다고 해서, 마음이 아팠다고 해서 세상을 통째로 뒤엎어서야 됩니까 하나가 잘되었다고 다된 것처럼, 또 하나가 안되었다고 다 망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어 이 나라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오늘까지 유지되어온 것입니다. 그리 쉽게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다 망했느니, 다 썩었느니, 소망이 없느니 하는 것은 불신앙적입니다.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선(善)과 악(惡)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선한 것일까요, 아니면 악한 것일까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샴의 법칙대로 때로는 선이 악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도 악도 각기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악대로 영역을 넓혀가고 선은 선대로 또 그렇습니다.
이 싸움에서는 선이 악에게 패배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계에는 전세계적으로 자유화 물결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어 통쾌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만 공산주의가 온 세계를 잠식해들어가고 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몹시 불안해했었습니다. 어떤 분은 지도에다 표시를 해가지고 다니면서 말하곤 합디다. "소련도 새빨갛고 중공도 새빨갛고 일본조차 불그죽죽하니 이제 쥐꼬리만한 우리나라는 큰일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해주었습니다. "중공의 12억 인구 가운데 공산당은 불과 몇 사람뿐입니다. 소련에도 나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쁜 몇 사람 때문에 전체 국민이 그들의 노예가 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단지 공산사회라고 해서 소망 없다, 망했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그들 사회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교회가 있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선과 악의 대결을 비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시각 자체가 병들어 있는 시각입니다. 선의 무기력함을 통탄하기도 하고,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비참한 생각마저 들것입니다. 그러나 절망은 죄입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선의 힘과 선의 최종 승리를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믿는 순간에 오늘의 내 생활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보십시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man like-인간적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beast like-동물적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devil like-악마적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God like-바로 성도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앞으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까 상대방이 선하면 나도 선하게 대하고, 상대방이 악하면 나도 악하게 굴고, 맞으면 때리고, 미워하면 나도 미워하는 생활은 비인간적입니다. 동물적이지요.
적어도 악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고 말씀합니다. '진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음미해 보십시다. 진다는 말은 외면한다는 뜻입니다. 악한 일에 외면한다는 말입니다. 눈을 감습니다. 대항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외면하고 무관심하려듭니다. 그러는 동안에 악은 악대로 득세하게 되고 세력을 확장해나갑니다. 결국은 악을 조장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또 악을 기피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악한 대우를 받으면 저 마을로 피하고 그래도 안되면 마지막에는 외국으로까지 갈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민 가봐도 똑같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악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는 절망입니다.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 실망하는 사람, 낙심하는 사람, 그리고 기대를 버린 사람 이들은 악에게 진 사람들입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오면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만, 기적을 체험하는 등 은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운 일만 생기면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절망했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라고 하더냐" "애굽에 공동묘지가 모자라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느냐"-이렇게까지 한심해집니다. 악에게 진 것입니다. 기대를 포기하고 절망한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도 그러합니다. 부부간에나 자녀교육의 경우, 잘나가다가 어디에선가 그만 좀 뜻대로 안되면 금방 실망하고 맙니다. 실망이라는 것은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선언입니다. 어떠한 일에도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종속적인 태도로 변하여 선한 입장을 떠나거나, 상대방이 악하게 나온다고 해서 나 자신도 악하게 대항하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악에 예속된 것이지요. 이처럼 상황에 따라서 나 자신이 변질되는 것 자체가 실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간혹 상대방이 악하게 나올 때, 대항하지는 못하고 뒤돌아 증오와 저주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도 실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면서도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참으로 높은 차원에서 그 악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짓궂게도 이 부분의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면서 웃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창으로 찌르고 침을 뱉으며 저주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놈들 어디 두고보자'고 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 같았으면 꼭 그랬을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예수님께서 그 동안 행하신 모든 것들은 그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 세상 끝이다'라고 말세로 대했다 하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이 한마디의 말씀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잘 나가다가 실패한 사람의 하나입니다. 민수기 20장의 말씀을 보십시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갖은 핍박과 환난을 겪으면서도 잘 참아 견딥니다. 그러나 가데스에 거할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침내 모세를 죽이겠다고 까지 들끓습니다. 모세는 낙심합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이렇게 저주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 어떠한 상황에서도 악을 악으로 대하면 안됩니다. 그 악으로 인해 내 마음속에 증오심을 가져도 안되고. 절망해도 안되며, 원수 갚고자 하는 복수심을 가져도 안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핍박하는 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재미있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디오콘타스' 사냥개가 사냥감을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자라 함은 자기 먹이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냥개처럼 하나님의 성도를 괴롭힌다는 말이 됩니다. 일생을 두고 괴롭힙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것이 곧 승리의 길임을 말씀함입니다. 13절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는 '디오콘테스'입니다. 선한 일에 사냥개가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힘쓰라는 뜻이 있습니다. 전자는 악한 일에 집요하고 후자는 선한 일에 집요하다는 뜻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본문말씀의 마지막 구절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하는 말씀입니다.
Being and Doing에 문제가 있습니다. 존재에 문제가 있고 행위에 문제가 따릅니다. 상태에 문제가 있고 행동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악에서도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이 바로 사는 것만이 이기는 것입니다.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것, 사랑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또한 이기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주례 할 때마다 사랑은 절대적인 것임을 강조하곤 합니다. 신랑 신부에게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하루에 열 번, 아니 백 번도 좋으니 부지런히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향하여 "나를 사랑해요"라고 묻지는 말아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사랑해주면 나도 당신을 사랑할게"--이런 뜻입니까 사랑하는 데에 눈치보지 맙시다. 사랑을 헤아리지 맙시다. 상대방이 늦게 돌아오든 일찍 돌아오든 자신의 페이스를 지켜야 합니다. 상대방이 어떠하든 나 먼저 사랑하고, 내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칭찬한다고 좋아하고, 상대방이 미워한다고 같이 미워하고, 상대방이 욕한다고 욕하는 것은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흔들림이 없이 내 신앙적인 페이스를 곧게 지켜야 됩니다. 어떠한 대우를 받아도 내 할 본분을 다할 때에 비로소 이기게 됩니다.
또한 내 사명을 다합시다. 내게 맡겨진 사명 선교적 사명, 도덕적 사명, 교육적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기대하지는 맙시다. 알아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전도를 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와 자랑을 합니다.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리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병을 고친 사람도 결국은 늙어서 죽을 테니까 대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긴다는 말은 낙심하지 아니하며 더 나아가서는 장차 악이 선에게 패배하고 굴복할 것을 기대하고 내다보는 일입니다. 거기까지 도달해야 진정코 이기는 것입니다.
「유토피아(Utopia)」를 쓴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교수형을 당할 때의 일입니다. 사형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라고 합니다. 이때 그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죽을 때에 사도 바울은 이를 합당히 여기고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지요. 그런데도 스데반은 끝까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침내 그 사울이 변해서 바울이 되었고 그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하늘나라에서 만나 같은 순교자끼리 친구가 되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을 믿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의 손에 죽고 있지만 언젠가 당신들도 회개하여 주님 앞에서 친구로 만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토머스 모어는 엄청난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이겼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을 많이 비난했습니다. 어지간히 마음을 상하게 했지만 그는 분명히 꼽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앞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이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상대방을 위하여 기도하고 복을 비는 것입니다. 악을 죽이는 것도 아니요 악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요, 악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이기는 것입니다. 목적도 선하고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어떤 영국 신사가 미국에서 가든파티를 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아메리칸 인디언 추장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몹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문간에 서서 주인을 불렀습니다. "배가 고프니 빵을 좀 주세요." 그러나 주인은 거절합니다. "당신 같은 야만인에게 줄 빵은 없어!" "그러면 목이 마른 데 물이라도 좀 주세요." "너 같은 놈한테 줄 물이 어디 있느냐" 영국 신사는 추장을 몹시 모독했습니다. 추장은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 뒤 어느 날, 그 영국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목이 마르고 지친 채 산을 헤매다가 그만 기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인디언 추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자기 집으로 데려 옵니다. 물을 먹이고 음식을 주어서 살려놓았습니다. "자, 당신 나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소" 영국 신사가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물도 음식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죽을 지경에서 살렸습니다.
마침내 나는 원수를 갚았소." 인디언 추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원수를 갚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주하지 말라, 복을 빌어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사랑으로 증오를 갚으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우리는 흔히 역사상에서 3대 악처를 꼽습니다. 욥의 아내, 소크라테스의 아내, 요한 웨슬리의 아내입니다.
욥의 아내는 욥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를 저주하며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아내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아내 때문에 철학자가 됩니다. 요한 웨슬리 또한 그 아내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삽니다. 그래서 큰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악을 선으로 갚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고개를 들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십시오. 가장 무서운 힘은 진리의 힘이요, 가장 강한 힘은 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최대의 승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위로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고, 세상 끝날 까지 바로 그 사람 편에서 그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시 한번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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